# 52
52. 거부할 수 없는 제안.
52. 거부할 수 없는 제안.
금빛이 도는 구불구불한 머리카락과 푸른색의 강렬한 눈빛을 가진 사내가 연단에서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마치 한 마리 용맹한 사자와 같았고 사자가 먹잇감을 분쇄하듯 실제로 자신의 적들을 갈아버렸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그게 이 젊은 장군의 이름이었다. 그는 로마의 반란군 도미티우스는 물론 그와 협력한 히아르바스의 군대를 순식간에 까부쉈다. 술라가 왜 폼페이우스를 휘하에 두려고 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왜 폼페이우스인지 이곳 아프리카에서도 여실하게 그 실력을 드러냈다.
누미디아의 사람들에게 왜 로마가 로마인지, 왜 로마를 두려워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확실하게 각인시킨 그는 신뢰가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병사들을 훑어보다가 적당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로마에서 서신이 왔다.”
그 말에 병사들은 기대에 찬 눈으로 폼페이우스를 바라봤다. 대승을 거뒀으니 그 서신은 분명 공적을 논하기 위한 것이리라.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이어지는 말은 그들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후임사령관이 곧 갈 것이니 1개 군단만 내버려 두고 나머지 군단은 해산하라는 명령이다.”
레가투스(군단장)는 1개 이상의 군단을 지휘 통솔하기에 폼페이우스 휘하에 군단은 여러 개였지만 레가투스는 폼페이우스 한 명이었다. 어쨌든 군단 대부분을 해산하라는 소리에 병사들이 분개하며 소리쳤다.
“우우우우!”
“그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입니까?”
“해산이라니요? 우리는 레가투스를 따를 것입니다.”
“그런 명령을 내린 머저리가 대체 누굽니까?”
병사들은 폼페이우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극심한 거부감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폼페이우스는 그들의 반응을 잠시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말을 삼가라. 위대한 로마의 콘술(집정관), 술라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이다.”
병사들은 폼페이우스의 서릿발 같은 기세에 잠시 조용해졌지만 이내 곧 다시 아우성쳤다.
“저희는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술라는 폭군입니다. 그가 장군을 두려워한 나머지 장군을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당신의 명령에 따랐습니다.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우리는 당신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이대로 로마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옳습니다. 우리에게 명을 내려주십시오!”
점점 더 과열되는 분위기에 폼페이우스는 다시 강하게 외쳤다.
“우리는 로마의 시민이자 로마의 군인이다. 우리의 명예를 스스로 더럽힐 생각인가?”
“저들이 우리를 인정해주지 않는데 우리가 저들의 인정을 구걸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럴 바에는 우리 스스로 쟁취하겠습니다.”
“이곳 우티카에서 로마까지 뱃길로 삼일 거리에 불과합니다. 삼일이면 로마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진격을 명해주십시오!”
대부분의 정벌을 마친 폼페이우스와 그의 군단은 우티카에 주둔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대로 진격한다면 정말로 삼일 안에 로마에 다다를 수 있었다.
“레가투스! 명령을!!”
“로마를 향해 진격을!!”
“로마!”
“로마!”
폼페이우스는 목청을 드높이는 병사들을 향해 가만히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병사들이 그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잠잠해졌다.
“먼저 감사를 표한다. 부족한 나를 끝까지 추종한다는 여러분의 결의는 나 폼페이우스가 마음 깊이 간직하겠다. 그러나 로마의 반역자를 쓸어버린 내가! 또한 우리가! 저들과 동일하게 로마의 반역자가 된다면 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하고 저들의 목을 베어버린 것이란 말인가? 디그니타스(dignitas, 존엄)를 버리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
디그니타스는 로마 특유의 개념으로 개인의 고결함, 긍지, 가문, 말, 지성, 행동, 능력, 지식 등 사람으로서의 총체적인 가치를 말했다. 사적인 입지였지만 훌륭한 디그니타스는 공적인 입지를 크게 강화시켰다. 로마인들은 특히 로마귀족들은 소유한 모든 자산 중에 이 디그니타스를 최고로 여겼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전쟁에 나가는 것도 불사했고 자살하거나 처자식도 죽일 수 있었다.
폼페이우스가 디그니타스와 죽음을 언급하자 병사들은 수그러든 모습을 보였으나 여전히 그들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전쟁에 승리한 자들에게 영예를 안겨주기는커녕 뿔뿔이 흩어져서 로마로 돌아오라고? 이런 불명예가 어디 있나?
“레가투스! 마음을 돌려주십시오!”
“마음을 돌려주십시오!”
병사들은 연단에서 내려가려는 폼페이우스를 잡았고 폼페이우스는 그런 저들과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이다가 겨우 자신의 막사로 돌아왔다.
잠시 뒤 그의 막사로 노련해 보이는 중년의 장교가 들어오자 폼페이우스가 입을 열었다.
“병사들은 여전한가?”
폼페이우스의 물음에 6명의 트리부누스 밀리툼(Tribunus Militum, 대대장)중 하나인 그라티아누스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대개 각 군단마다 6명의 밀리툼이 돌아가며 지휘권을 잡고 지휘권을 잡은 자를 시니어(Senior), 그렇지 않은 자를 주니어(Junior)라고 불렀는데 그라티아누스는 그 유능함 때문에 모든 군단을 통틀어 폼페이우스 다음가는 지휘권이 있었다.
참고로 서후가 임시로 부여받은 트리부누스 라티클라비우스(넓은띠 대대장, 원로원 계급 자제)는 트리부누스 아누구스티클라비우스(좁은띠 대대장, 수년간 군 경험을 쌓은 기사계급이나 백부장이 진급)와 함께 이 밀리툼에 속했다.
세르토리우스가 원로원 계급은 아니었기에 임시직일지라도 후자인 아누구스티클라비우스에 임명되어야 했지만 전자는 명목상 지휘관에 불과하다면 후자는 실무형 지휘관이었기에 바로 그런 의미에서 라티클라비우스에 임시로 임명된 셈이다.
“예상하신 그대로입니다. 다만 병사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술라의 이 같은 처사는 레가투스께 심히 부당합니다. 사실 레가투스께서도 서신을 받았을 때는 탐탁지 않아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소한 저들이 타협안을 내놓을 때까지만이라도.”
“그랬었지. 하지만 이번 결정을 번복하는 일은 없을 걸세. 그러니 포룸 카스트룸에 모인 지휘관들은 자네가 알아서 해산시키게.”
포룸 카스트룸(forum castrum)은 로마군 야영지 내의 회합 장소를 일컫는 말로 대개 총사령관 막사 옆에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에 각 군단의 밀리툼은 물론 프레펙투스들과 프리무스 필루스(primus pilus, 수석 백부장)들까지 폼페이우스의 마음을 돌리고자 모여 있었다.
“하지만 레가투스!”
“그라티아누스.”
“예. 말씀하십시오.”
“자네가 보기에 술라는 어떤 사람인가?”
“잔혹하고 무서울 정도로 영리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 봤군. 그는 그런 사람이야. 술라는 이번 명령으로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익을 취한다. 첫째 내가 그의 명에 따른다면 혹시 모를 위험을 손쉽게 제거할 수 있다. 전쟁에 능숙하고 사기가 높은 많은 군대를 한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로마는 큰 위협을 느낄 테니까.”
“하지만 레가투스께서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지..”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게. 둘째, 이를 통해 나의 진의를 파악하고 로마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시켜 줄 수 있다. 타협안? 단기적으로 볼 때는 그게 좋아 보이나 장기적으로는 현명한 선택이 아니지.”
“하지만 폼페이우스님. 이미 저들은 장군을 반역의 위험이 있는 인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그러니까 더더욱 로마의 품에 안겨야지. 해가 뜨거우면 그늘에 피해야지 해를 없애버리려고 해서야 가당키나 하겠는가? 무엇보다 로마라는 넓은 대지 위에 솟은 태양이 언제까지 하늘에 떠 있을 것 같은가?”
“······.”
“내 뜻은 변함이 없으니 병사들을 잘 다독여주도록. 정확히 누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현재 후임으로 예정된 카이우스 안니우스에게 남은 병력을 인계하는 건 자네에게 맡기겠다.”
“알겠습니다.”
“혹 달리 보고할 것이 있나?”
그라티아누스는 얼마 전 카르타고의 토페트에서 소란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로마로 돌아갈 마음을 굳힌 폼페이우스에게 이 근방의 자잘한 소식을 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없습니다. 다만 도적패들의 싸움이 있긴 했습니다.”
“도적패라면 카르타고?”
“예. 그렇습니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지중해의 패자로 불리던 그 카르타고가 이제는 도적패들로 득실거리니.. 언제고 한 번은 쓸어버려야겠지만 그건 내 소관이 아닌 것 같군. 어쨌든 할 일이 많을 텐데 이만 해산하게.”
척!
그라티아누스는 군례를 표한 뒤 그대로 돌아서 폼페이우스의 막사를 벗어났다.
*
다그닥 다그닥
탄력적인 근육을 지닌 흑마가 바람처럼 들판을 가로질렀다. 그 뒤로 누미디안 지역의 말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항우의 기억만 있었다면 안장과 등자가 있고 없고의 차이를 못 느꼈겠지만 리처드 때에는 안장과 등자는 물론 육중한 마갑까지 착용하던 때라 경험으로 인한 불편함을 느꼈다. 안장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말 위에 두껍고 긴 천이 올려놓은 것이 전부였으니 그걸 안장으로 보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후는 그 누구보다도 능숙하게 말을 타고 들판을 질주했다.
다그닥 다그닥
‘등자를 사용하면 기병 활용도가 극대화되겠지만 안장은 그렇다 쳐도 등자는 시대의 흐름을 뒤틀 수 있는 발명품이라 함부로 사용하기 저어되는 부분이 있다. 로마는 기병이 뛰어난 나라가 아니니 오히려 주변국의 무력을 보강해주는 결과만 가져올 수 있으니.. 하지만 편자는 고려해봐야겠어.’
편자는 말발굽을 보호하기 위한 보조장치다. 야생말은 위기 시에만 달리고 대부분 부드러운 땅을 달리기에 편자가 필요 없지만 군마는 수시로 달렸고 딱딱한 도로를 달리는 경우도 많았기에 말발굽이 마모되어 달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했다. 달리지 못하는 말을 어디에 쓸까? 바로 편자의 필요성이 대두된 이유다.
로마제국 역시 히포샌달(Hipposandal)이라는 금속제 말샌달을 만들어 신겼지만 현대의 개량된 편자와는 확연히 달랐다. 편자의 기원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하진 않다. 어쨌든 지금은 공화정이니 이 히포샌달이라는 편자의 전신 역시 존재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편자는 발바닥에 붙어있는 것이라 태가 나지 않을 테니.’
다만 장제사라고 편자를 만들고 붙이는 직업이 현대에도 남아 있을 정도로 서후의 생각만큼 편자를 붙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행히 리처드의 기억 중에 당시 사용되던 편자에 대한 나름 상세한 기억이 있었기에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등자든 편자든 일단 지금 생각할 부분은 아니고.’
서후는 달리던 말의 고삐를 슬쩍 잡아채 속도를 줄였다. 그러자 힘차게 땅을 박차던 흑마가 그의 인도를 따라 서서히 속도를 줄여 다른 말들과 걸음을 맞췄다.
“사비누스.”
서후가 말의 속도를 줄인 것은 사비누스와 대화를 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저 멀리 어렴풋이 도시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서후 등은 팅기스에서 이곳까지 두 시간 넘게 말을 달렸다. 해안선을 따라 달렸던지라 대부분은 평지였지만 원만한 구릉지대도 군데군데 자리했다.
“예. 곧 아비라(Abyla)에 도착하겠군요.”
사비누스가 가볼 곳이 있다고 했던 곳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아비라였다. 아비라는 팅기스와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고 역시 아스칼리스의 통치 아래에 있었다.
“으흠. 위험한 행보가 되겠군요.”
아스칼리스와 적대관계에 놓인 서후 등이 가기엔 위험천만한 곳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서후의 말에 사비누스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사실상 단 세 명으로 팅기스를 전복시킨 당사자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군요. 또한 말씀하신 제안을 성공적으로 이루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이 지역의 유지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테세우스님께서 자처하신 일이지요.”
서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사비누스에게 대답했다.
“그게 그렇게 되는 겁니까? 다만 저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저들은 아스칼리스 휘하의..”
“아스칼리스가 팅기스를 빼앗기기 전이라면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만 아시다시피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아스칼리스의 위세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저들도 알았을 테니 일단 무작정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 안전에 유의해야겠지만 각자 몸을 지킬 수준은 되지 않습니까? 소장은 이대로 팅기스의 일을 재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까지 드는군요. 그게 제 전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일이 틀어지면 언제든.”
서후는 사비누스의 눈빛에 단순히 자신의 제안을 성취하기 위해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했다.
“제 제안이 우선인 것 맞습니까?”
“물론입니다.”
“일이 틀어지지 않기만을 바래야겠군요. 차!”
‘원한이나 어떤 충성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만 아니라면 저들로서도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 될 것이다.’
서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좀 더 확연하게 드러난 아비라를 향해 말을 달렸다. 그를 따라 사비누스를 비롯한 50명의 병사들 역시 속도를 더 높였다. 저들이 타고 있는 50마리의 말은 바로 이크람이 제공해준 말이었다. 물론 그 가운데는 호라티우스와 나디르도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