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49. 영원한 것은 없다.
49. 영원한 것은 없다.
쿵 쿵 콰지직
묵직한 소음과 함께 병영의 두꺼운 문이 움푹움푹 패이더니 결국 으스러지며 박살났다. 파성추 비슷한 것을 들고 문을 부순 저들은 병영 안으로 빠르게 침투했다.
당연히 아스칼리스군이 그들을 막으려고 들었지만 마스타네소스가 로마와 손을 잡았다는 소식에 우왕좌왕하느라 저들의 침투를 막아내지 못하고 정문 부근을 금세 점령당하고 말았다.
익티다르나 파드와가 살아 있다면 헛소문이라 일축하고 혼란을 수습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아스칼리스군은 주요지휘관을 모두 잃었다. 그들이 살아 있었다면 병영의 정문이 뚫리는 것은 고사하고 감히 이곳을 향해 공격을 감행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헛소문이다! 정신 차려라!”
“개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니 진형을 갖춰!”
“이 새끼들아! 적이 코앞에 있는데 뭐 하는 거냐?”
하급지휘관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며 병사들을 통솔하려 했으나 그 한계가 명확할 수밖에 없었다. 마스타네소스와 로마가 대두됨으로 서후와 나디르를 죽이려던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전투에 승리해도 승리에 대한 보상을 얻을 수 없다면 대체 왜 귀한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우려 들겠는가? 승리에 대한 보상이 확실할지라도 패배한다고 여긴다면 뿔뿔이 도망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시 말해 정문을 장악한 자들이 퍼트린 소문은 아스칼리스군의 전의를 송두리째 빼앗아 가기에 충분한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다.
최고지휘관을 잃어버린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싸워야 할 이유마저 앗아간 셈이니 하급지휘관들이 아무리 목청을 높인들 그게 먹혀들 리가 없었다.
“나디르!”
서후는 자신과 다시 합류한 나디르를 불렀다. 나디르는 지친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디르는 이곳저곳이 자상으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다행히 대부분 경상이었지만 지친 기색을 볼 때 시간이 더 지체되었다면 목숨을 잃었을 공산이 컸다.
서후는 그대로 자신을 가로막는 아스칼리스군을 베면서 정문을 향해 달렸고 나디르 역시 그를 보조하며 병사들을 베어 넘겼다.
확실히 조금 전과 달리 적들을 상대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했다. 방금까지는 서후와 나디르를 필사적으로 죽이려고 들었다면 지금은 몸을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후도 자신의 앞을 막지 않는 자들은 상대하지 않고 입구를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잠시 뒤 입구를 점령하고 있던 체구가 큰 사내가 서후와 나디르를 발견하고 반색하며 우렁찬 목소리로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바로 호라티우스였다.
“테세우스! 나디르!”
나디르는 서후와 함께 호라티우스가 이끄는 병력에 합류하며 한숨 돌렸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진심으로 반갑군.”
호라티우스가 아니었다면 이곳에 뼈를 묻어야 했을 테니 이건 빈말 따위가 아니었다.
“익티다르는?”
상황을 보니 놀랍게도 암살에 성공한 것 같지만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후는 호라티우스의 질문에 짧게 대답했다.
“죽었다. 그나저나 이게 전부인가?”
호라티우스와 함께하는 병력은 고작 백 명이 넘는 숫자에 불과했다. 이건 자신이 예상했던 병력보다 훨씬 적은 숫자였다. 이곳의 아스칼리스군을 상대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숫자다.
현재 이곳 아스칼리스군의 숫자는 못 해도 천 명은 넘지 않을까 싶었다. 팅기스 이곳저곳에 퍼진 병력을 모두 합치면 족히 이천은 넘을 것이다. 그마저도 아스칼리스가 루사디르를 공략한다고 병사들을 차출했기에 그 정도였지 본래라면 훨씬 더 많은 병력, 최소 오천 이상 팅기스에 주둔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길. 이게 전부다. 나머지는 팅기스 외부에 몸을 숨기고 있다는군.”
그 말에 나디르가 어두운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들이 전부라고? 서둘러 빠져나가야겠군.”
아스칼리스군에게 항복하라고 외치기에 못해도 수백은 되는가 했더니 이들이 전부라면 아스칼리스군이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후퇴해야 했다. 실제로 호라티우스의 수신호에 맞춰 이들은 경계태세를 취하며 빠르게 후퇴하고 있었다.
서후 역시 표정을 굳혔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숫자가 적긴 했지만 어차피 마스타네소스군에게 기대한 건 암살 후 후퇴로 확보를 돕는 역할에 있었지 저들을 데리고 팅기스를 점령할 생각은 없었다.
혹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지양해야 할 일이었다. 팅기스는 아스칼리스도 마스타네소스도 아닌 아군이 주도적으로 점령해야 하니까.
‘그래야만 일시적이나마 팅기스에 대한 권한을 주장할 수 있다. 그편이 마스타네소스에게도 팅기스의 권한을 넘길 수 있는 명분을 줄 것이고.’
서후는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 잠시 생각했지만 지금은 팅기스에서 벗어나 세르토리우스와 합류하는 것이 우선이라 눈앞의 전투에 집중했다.
세르토리우스와 합류하게 되면 팅기스 점령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다. 세르토리우스의 병력은 그 수효가 적긴 해도 정예 중의 정예라 사령관을 잃은 군대쯤이야 순식간에 썰어버릴 테고 무엇보다 저들이 로마군을 직접 보게 되면 소문이 사실이라 여길 테니 그것으로 전투는 끝이다.
후퇴하는 도중에 간헐적인 전투가 벌어지긴 했지만 아스칼리스군은 병영에 침투했던 서후 등이 빠져나가는 것을 격렬하게 막아서지 않았다.
“공격 전에 왜 반드시 소문을 퍼트리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겠군.”
병영을 막 빠져나온 호라티우스는 경이로운 눈빛으로 서후에게 말했다. 소문을 퍼트리라고 말한 것은 바로 서후였다.
“당신이?”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마스타네소스의 수하, 이크람이 서후에게 말을 꺼냈지만 그 전에 저편에서 서후 등을 향해 일갈하는 자가 있었다.
“나디르!! 네놈이 감히!”
그곳에는 저마다 무기를 든 해적들이 흉흉한 기세를 발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의 숫자가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후사인..”
나디르는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돌아본 뒤 저들을 이끌고 온 후사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뒤에는 아스칼리스군이, 앞에는 후사인을 따르는 해적들이라. 설상가상에 첩첩산중이 따로 없었다. 아마 파드와가 보낸 전령의 말을 듣고 움직인 것이리라.
“내 이름으로 무슨 짓거리를 벌인 것이냐?”
후사인은 크게 격분하며 나디르에게 외쳤다. 나디르의 해괴한 짓거리에 수하들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인물이라 낙인찍혔을 테니 그만큼 업신여김을 당하게 될 터, 자신에게 모욕을 안긴 나디르를 찢어 죽일 것처럼 노려봤다.
하지만 후사인은 알지 못했다. 익티다르가 죽었고 그 모든 일을 계획하고 감행한 것은 나디르가 아닌 서후라는 것을 말이다. 하긴 누가 알 수 있으랴? 서후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는 일개 소년에 불과했다.
그때 나디르의 눈에 핏발이 서더니 그 역시 강렬한 살의를 발하기 시작했다. 후사인의 왼손에 들려있는 어떤 물체를 봤기 때문이었다.
턱 데구르르
후사인은 들고 있던 머리통을 바닥에 던지며 나디르에게 말했다.
“나의 권위를 무시한 놈들은 누구든 이 꼴이 될 것이다.”
서후 역시 그 머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바라카..’
모든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지만 익티다르의 목숨을 빼앗은 대가로 나디르의 지인인 바라카가 목숨을 잃게 될 줄 누가 알 수 있었으랴?
말없이 분노로 부르르 떠는 나디르를 힐끗 바라본 서후는 씁쓸한 마음을 지우지 못하고 호라티우스에게 말했다.
“로마의 이름으로.”
자신이 나서도 되지만 외형적으로나 배경적으로나 자신보다 위압감을 줄 수 있는 호라티우스가 나서는 것이 좋았다. 체구가 크긴 하나 누가 봐도 그는 전형적인 로마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호라티우스는 서후의 말을 용케 알아듣고 우렁찬 목소리로 후사인에게 소리쳤다. 역시 경험은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대로마의 센튜리온 호라티우스다. 해적 주제에 감히 로마의 일에 간섭하려 하는가?”
“무슨 헛소리냐? 설마 나보고 마스타네소스와 로마가 손을 잡았다는 개소리를 믿으라는 소리냐?”
해적들을 규합하여 이곳으로 이동하던 후사인도 그 소리를 들었지만 익티다르로부터 들은 것이 있는 후사인은 코웃음을 치며 믿지 않았다. 따라서 후사인은 익티다르가 왜 그 소문을 일축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병영에 침투한 이들이 후퇴하게끔 내버려 뒀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이상했다. 하지만 궁금증은 뒤로 미뤘다. 일단 저들을 도륙하고 볼 일이었다.
“일단 죽여!”
하지만 해적 가운데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숫자가 적긴 하나 정규군의 병영을 습격하고 빠져나온 자들이다. 실제로 하나같이 만만해 보이는 자들이 없었다. 한꺼번에 공격하면 숫자가 많은 자신들이 이기겠지만 섣불리 나서서 목숨을 잃고 싶은 해적은 아무도 없었다. 그 모습에 후사인은 대노하며 소리쳤다.
“이 새끼들이!!”
“두목! 로마군이 맞다면! 컥커컥”
후사인은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 수하의 목을 검으로 베어냈다. 피가 튀어 오르자 해적들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 가운데 후사인이 살벌한 어조로 다시 명령을 내렸다.
“죽여!”
*
호라티우스와 후사인이 옥신각신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서후는 이크람을 바라봤다.
“이들의 대장이 당신인가?”
겉모습은 소년에 불과했지만 호라티우스가 그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서후가 이들의 대표라는 것을 직감한 이크람이 순순히 대답했다.
“그렇소. 이크람이라고 하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음?”
서후의 소개에 이크람이 두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함께한 이들이 로마군이긴 하지만 로마의 반군으로 규정된 세르토리우스군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소년의 신분 역시 알 수 있었다.
“당신들은 로마군이 아니었..”
“군사, 정치, 정보력까지 모두 형편없군.”
해적들과 결탁했다는 소문을 들었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팅기스를 도모해야 했다. 루사디르를 잃으면 모든 게 끝나버리는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당장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이 백 명이 전부라고?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다.
“그게 무슨?”
로마의 이름을 들먹여야 무조건 호라티우스의 말을 따를 것이라 여겼기에 로마의 이름을 내세우라 말했지만 지금은 현실을 가르쳐 줄 때였다.
“간단하게 말하지. 로마는 당신 편이 아니다. 재물을 많이 주는 쪽이 로마의 편이지. 보아하니 경제력도 떨어지겠군. 설마하니 명분 딱 하나만 가지고 있을 줄이야.”
이크람은 심각한 어조로 서후에게 말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오?”
서후는 미로처럼 이어진 팅기스의 건물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젠장. 쉽게 풀리는 게 없군. 그래도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아까 전보다는 나은 상황인가?’
“우리가 단순히 반군이 아니라 야만인이라 할지라도 왕위를 차지하고 싶다면 우리 말을 듣는 게 좋을 거다.”
“······. 무슨 말인지 이해했소.”
“일단 병력을 열 개로 나누도록. 이곳을 빠져나간다.”
서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해적들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땡 땡 땡 땡
그때 요란한 경고음이 팅기스에 울려 퍼졌다. 그건 외부 경계를 서고 있던 팅기스의 아스칼리스군이 보낸 신호였다. 갑작스레 성벽에서 울려 퍼진 소란에 달려오던 해적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멈춰섰다. 저들을 상대하려고 준비 중이던 서후 등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로마군이다!”
“로마군이 몰려온다!”
“적이다! 적이 팅기스를 향해 몰려온다!”
“으아아아아.”
안 그래도 계속된 전투에 불안에 떨던 사람들은 로마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리에 두려움에 질려 온 도시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아! 케이프 스파르텔!’
하지만 두려움에 질린 저들과 달리 서후는 모든 긴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바로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
후사인은 정말 로마군이라 할지라도 팅기스의 아스칼리스군과 힘을 합쳐 싸우면 승산이 있을 거라 여겼지만 그 아스칼리스군조차 허둥지둥 도망치는 모습이 보이는 판에 그들과 함께 로마군과 싸운다고? 익티다르 이 자는 대체 뭘 하고 있단 말인가?
소란의 진위를 파악할 여유도 없을뿐더러 이런 상황에서 로마군과 싸우라고 해적들에게 명령을 내린들 해적들이 그 명령에 따를 리가 없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두.. 두목!”
“으드득. 후퇴하라! 배를 타고 팅기스를 떠난다! 서둘러라!”
그 명령을 내리면서 후사인은 나디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건 나디르 역시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