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47. 어둠 속 그림자.
47.
전형적인 무어인(베르베르인)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자신 앞에 놓인 파피루스들을 살피고 있었다. 전체적인 그의 분위기는 잘 벼른 한 자루의 칼처럼 느껴졌다.
“익티다르님!”
그는 바로 아스칼리스를 대신해 팅기스를 다스리고 있는 익티다르였다. 자신을 부르는 수석장교의 목소리에 익티다르는 파피루스에 집중하던 시선을 거두고 수하를 바라봤다.
“파드와. 무슨 일이지?”
“후사인이 전령을 보내왔습니다.”
“전령?”
후사인이 전령을 보냈다고? 익티다르는 슬며시 피어오르는 의아함에 파드와에게 반문하며 다시 말했다.
“이미 토의할 부분에 대해선 모두 토의한 걸로 아는데 내가 잘못 알거나 빠뜨린 것이 있었나?”
해적들에게 보상으로 줄 것과 저들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엊그제 최종적인 토의를 마쳤다. 지금 익티다르가 집중하며 보던 서신도 모두 보급과 물자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바로 루사디르를 치기 위해서 말이다.
본래는 루사디르를 칠 병력을 뺄 여유가 없었지만 해적들의 합류로 아스칼리스를 도울 수 있는 방안이 생겼기에 익티다르는 후사인의 합류를 크게 기뻐했다. 따라서 그는 과할 정도로 상당한 보상을 해적들에게 약속했다. 불과 엊그제 크게 만족하며 돌아간 후사인이 따로 전령을 보낼 정도의 일이 남아 있었던가?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다시 돌려보낼까요?”
익티다르는 수석장교 파드와의 답변에 미간을 좁히며 질문을 던졌다.
“목적이 뭐라더냐?”
“장군님을 직접 뵈어야만 답변을 드릴 수 있다며 일단 장군님을 뵙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나를?”
“마스타네소스가 보낸 첩자일까 싶어서 떠보았지만 후사인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면 모르는 정보들을 꿰고 있는 것으로 봐선 후사인 수하가 맞는 것 같았습니다. 세르토리우스가 어찌 되었는지는 저희도 후사인에게 들은 후에나 알 수 있었던 사실이니..”
“그들?”
“소년과 무장한 해적, 이렇게 둘이 찾아왔습니다.”
“소년이 전령이로군. 무장한 해적은 그 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동행한 것일 테고.”
“제가 보기에도 그런 것으로 보였고 실제로 저와 대화를 나눈 자도 소년이었습니다.”
익티다르는 파드와의 대답에 일말의 경계마저 풀어버렸다.
그 행동의 저변에는 소년이 마스타네소스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해를 가할 수는 없다는 자신감이 깔려있었다. 비단 자신의 실력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용맹한 수하들이 경계를 서는 상황이었으니 소년 따위에게 위협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눈앞의 수석장교 파드와만 해도 믿을 수 있는 걸출한 무예의 소유자였다.
“들여보내. 뭐라 말하는지 들어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파드와는 문밖의 병사들에게 말했다.
“전령을 들여보내!”
파드와의 명령과 함께 문이 열리고 한 소년이 익티다르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예상했다시피 그는 바로 서후였다.
*
‘여기까지는 무사히 통과했다.’
병영 주변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업무를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얼마 전 후사인과 만남을 가진 후로는 병영에 마련된 자신의 집무실에서 업무를 본다는 소리에 서후와 나디르는 결국 병영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게 그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시간을 더 둔다면 안전하게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전에 그가 루사디르로 병력을 이끌고 떠날 확률이 더 높았다. 그러니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후사인의 이름으로 이곳까지 무사히 통과할 수 있긴 했지만..’
단순히 운 좋게 이곳까지 통과한 것이 아니다. 부족한 정보라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그나마 철저하게 계산하고 움직였기에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서후는 그런 생각을 하며 집무실의 익티다르를 빠르게 살펴봤다. 살펴본 시간은 그야말로 눈 깜작할 정도로 짧은 순간에 불과했지만 그 역시 파드와와 마찬가지로 실전형 무관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서후 자신이 예상했던 상황보다 일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익티다르는 지금 처음 봤지만 그에게 안내한 파드와는 보다 주의 깊게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고 그렇게 살펴본 파드와는 실전으로 단련된 진짜였다. 하물며 지금 자신은 수중에 무기도 없는 상황이었다.
‘파드와 이자는 신중한 성품이니 내가 전령이 맞는지 확인하러 후사인에게 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그들이 후사인에게 확인하고 돌아오기 전에 일을 마쳐야 한다.’
서후는 익티다르를 암살할 생각으로 병영까지 침투했다.
익티다르가 죽는다면 첫째, 팅기스의 아스칼리스군은 최고 지휘관을 잃게 되며 둘째, 익티다르가 해적들과 맺은 동맹이 완전히 무산된다. 암살한 자가 후사인의 부하든 아니든 해적인 이상, 아스칼리스는 해적들에게 극심한 분노를 느낄 것이니 후사인 역시 분노의 대상이자 토벌의 대상이 될 뿐이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세르토리우스군이 얻을 이득이 막대하니 서후가 이 일을 감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칼끝 위에 목숨을 건 자의 삶이란 죽고 죽이는 일만 있을 뿐, 거기에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칼을 잡은 자들의 비극이자 현실이다.
어쨌든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그렇기에 나디르가 끝까지 만류한 것이었고. 더욱이 지금은 나디르가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상황이었다.
익티다르가 매서운 눈매로 서후를 훑어보며 그에게 말했다.
“후사인이 너를 보낸 이유, 또한 굳이 나를 봐야 한다고 한 이유에 대해 말해봐라.”
누군가를 속이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일에 많은 것이 달려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누군가를 암살하는 일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그 커다란 중압감과 압박감 속에서도 서후는 차분한 시선으로 익티다르를 바라봤다.
“지난번 결정에 대해 다시 제안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게 뭐지?”
“이번 동맹을 파기한다고 했습니다.”
“뭐?”
동맹을 파기해? 익티다르는 서후의 황당한 답변에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건 파드와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로 그때, 저들이 당황한 순간을 노린 서후가 익티다르를 향해 뛰어들었다.
탓.
채앵!
“이놈이!”
그러나 뛰어난 군인답게 파드와와 익티다르 둘 다 기민한 반응으로 대처했다. 다만 익티다르는 앉아있었고 파드와는 서 있었기에 파드와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파드와는 그대로 검집에서 검을 뽑아 서후의 등을 향해 날렸다. 파드와의 검은 검집에서 뽑혀 그대로 아래에서 위를 향해 사선으로 궤적을 그렸다. 그 공격이 어찌나 매섭고 날카로운지 서후의 등판이 그대로 갈라지고 시뻘건 피가 집무실 사방으로 튀어 오를 것 같았다.
하지만 서후는 파드와가 검을 뽑기를 기다렸다. 또한 그 검의 궤적이 종착점에 다다라 힘을 잃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 서후는 뒤에서 느껴지는 살의와 검에 의한 풍압을 느끼는 순간, 몸을 뒤틀어 파드와의 검을 피했다.
파드와의 검은 아슬아슬하게 서후를 스쳐 갔다. 너무 빨리 피하면 파드와가 중간에 궤적을 뒤틀 것이고 늦게 피하면 검의 궤적에 휩쓸려 목숨을 잃을 것이니 실로 절묘한 순간에 몸을 뒤틀었다.
서후는 놀라운 반사신경과 더불어 수많은 전투 감각으로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해냈다. 파드와가 어리숙한 신병 따위가 아니라 상관의 신뢰를 받는 장수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서후는 몸을 뒤틈과 동시에 앞으로 숙여 파드와의 검을 피했고 그 상태 그대로 회전시켜 발뒤꿈치로 내지른 파드와의 손을 강하게 쳤다.
“큭!”
그 강한 충격에 파드와는 검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검이 휘둘러진 마지막 지점이라 힘을 주기 어려운 정확한 순간에 서후가 타격을 가했기에 검은 서후가 찬 그대로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또한 검의 방향은 앞으로 내질러지던 영향을 받아 익티다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후는 회전한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기도 전에 바닥을 다시 박차고 튀어 오른 파드와의 검을 가로챘고 동시에 발을 옆으로 찢어 달려오는 파드와의 얼굴을 갈겼다.
퍼억
“크윽!”
그 모든 것이 거의 한 동작에 이루어졌다. 파드와가 비척거리며 물러설 때 서후는 이미 검을 쥔 오른손으로 익티다르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부우웅
채애앵
하지만 익티다르도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눈 깜작할 새에 서후가 파드와의 검을 가로챘지만 그런 일련의 과정 중에 뛰어난 무예와 용맹으로 아스칼리스의 총애를 받는 익티다르가 검 하나 뽑지 못했을까? 익티다르는 위에서 아래로 내질러지는 서후의 검을 막으며 크게 분노한 표정으로 서후에게 일갈했다.
“이놈이 감히 나를? 이게 후사인이 뜻이더냐? 나를 속인 것이냐? 으드득! 네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후가 세르토리우스와 연관이 있고 또 그 세르토리우스가 마스타네소스를 돕기로 결정했다는 걸 무슨 수로 예상할 수 있을까? 당연히 익티다르의 분노는 후사인을 향했다.
다행히 자신이 의도한 대로 일이 이뤄지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 제 목숨을 잃어서야 그게 서후에게 다 무슨 소용이랴? 때문에 서후는 작은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냉정한 마음으로 바닥에 착지한 뒤 주변을 살폈다.
‘집무실이 작은 편이라 많은 병사가 투입되기는 어렵겠지만..’
달리 말하면 그들이 꾸역꾸역 밀고 들어올 경우, 서후 역시 운신할 공간이 없어진다는 소리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건 서후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저번 선상 전투 때 체계화된 안니우스군에게 홀로 달려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던가? 전술과 체계를 붕괴시킬만한 능력이 없다면 애초에 그런 상황에 놓이지 않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 속전속결만이 최선인 상황이었다. 당연히 서후는 지체하지 않고 다시 익티다르에게 달려들고자 했다.
하지만 비척거리며 물러나던 파드와가 충격에서 회복되고 자신의 또 다른 검으로 서후로 공격했기에 아까처럼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서후는 검을 신속하게 움직여 파드와의 검을 받아내고 이어서 쇄도하는 익티다르의 검 역시 받아쳤다.
챙채챙
그들의 전투를 시작으로 문밖에서도 전투가 일어난 모양인지 병장기 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챙 채챙 챙
“크아악!”
“으아아악!”
그들과 전투를 벌이는 자는 바로 나디르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디르 역시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
뭐 이런 놈이 다 있단 말인가? 자신과 파드와의 공격을 동시에 받아내면서도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다고? 심지어 오히려 압도당하는 건 자신들이었다. 실제로 여기저기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건 자신뿐만 아니라 파드와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면 놈은 아직 상처 하나 없었다. 실로 황당할 노릇이 아닌가?
놈의 검은 독사처럼 매서웠다. 빈틈을 보이면 여지없이 달려들어 그 독니를 몸에 박아넣었다. 익티다르는 정말 자신이 이대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황당한 생각에 분노를 느낀 것인지 익티다르가 크게 외쳤다.
“이 어린놈의 새끼가!”
기술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소년인 이상, 성인의 체중을 실은 공격을 받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때문에 익티다르는 파드와의 검을 받아내느라 틈이 생긴 서후를 향해 온 힘을 다해 검을 내리쳤다. 하지만 익티다르는 그 소년이라는 자가 지금껏 성인 둘을 상대하면서도 조금도 검이 흔들리거나 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
모든 부분에서 전투를 끌면 끌수록 자신에게 이로울 것이 없었다.
상황도 상황이지만 그건 지금의 전투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연하게도 저들의 전투법은 성인 남자가 주요대상이기에 지금까지는 알게 모르게 타격점이 묘하게 조금씩 어긋나서 서후가 유리한 고지에 서 있었지만 슬슬 저들이 감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자신이 패배할 것 같지는 않지만 유리할 때 적을 끝내는 것이 현명한 태도였다. 하지만 조급함에 함부로 움직인다면 오히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전투에서 절대적인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후는 적의 목을 물어뜯을 기회를 만들기 위해 차근히 저들을 공략했다. 그리고 서후는 결국 자신이 기다리던 기회를 포착했다.
허리를 향해 내지른 파드와의 검을 흘려낸 서후는 야차처럼 흉악한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는 익티다르의 모습을 발견했다.
육중한 체구를 이용해 돌격하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기에 서후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격이었다. 그대로 받아내면 체중 차이로 인해 균형이 아예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피하기엔 파드와의 매서운 검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기회란 말인가?
서후는 매서운 눈빛으로 위에서 아래로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익티다르의 검을 바라봤다. 막지 않는다면 자신이 대번에 두 쪽으로 갈라질 만큼 강력한 공격이었다. 따라서 서후는 검을 들어 익티다르의 검을 막았다.
채앵!
당연히 검이 밀리는 것을 느꼈다.
이것을 억지로 막아내고자 대항한다면 자세와 균형이 그대로 무너질 것이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파드와가 자신의 몸에 구멍을 낼 것이다. 그 순간 서후의 눈빛이 변했다.
푸아아악
이윽고 다량의 시뻘건 피가 튀어 오르더니 익티다르 집무실의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