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42. 위기.
42.
근육으로 덮인 탄탄한 허벅지가 매끈하게 갈라지며 피를 내뿜었다.
촤아아악
“크아아악!”
서후에게 당한 병사가 또다시 비명을 질렀지만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이 새끼 죽여버리겠어!”
동료가 균형을 잃고 고꾸라지는 것을 본 병사는 맹렬한 적의를 불태우며 서후에게 검을 내질렀지만 서후는 냉정한 눈빛으로 글라디우스를 쳐내고 그의 목을 재빠르게 끊었다.
“컥커걱”
목이 끊어진 병사는 피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네놈! 네놈 한 놈 때문에!”
순식간에 대형이 무너지고 이런 처참한 지경에 놓인 것은 별 신경도 쓰지 않았던 꼬마 한 놈 때문이었다. 그 원한에 센튜리온 바리우스는 서후를 반드시 죽이리라 마음먹었다.
센튜리온의 투구를 쓴 자가 흉흉한 기세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돌격은 자신을 급히 둘러싸는 호라티우스의 병사들에게 막혔다.
“으아아아!!”
목표물을 잃게 된 바리우스는 울분에 찬 고함을 질렀지만 서후의 신경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바리우스는 결국 철갑처럼 방패를 두르고 진형을 유지하고 있는 병사들과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서후를 보호하라 명한 호라티우스가 피 칠갑이 된 서후에게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홀로 진형을 분쇄하다니.. 너는 대체? 아무튼 잘했다. 테세우스!”
그러나 서후는 그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기세가 타오를 때 적을 박살 내야 한다는 사실은 숱한 경험으로 체득한 일이다.
“세르토리우스!”
앞뒤 다 자른 말이었지만 호라티우스는 그게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서후를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호라티우스는 호루라기를 불며 외쳤다.
삐이익
“서둘러 마무리 짓고 레가투스와 프레펙투스를 지원한다! 서둘러라!”
“하!”
적과 전투하는 전열을 제외하고 후열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방패를 검자루로 치면서 답했다.
호라티우스는 다시 자신 주변에 있던 두 병사집단, 콘투베르니움에게 명령했다.
“너희는 테세우스를 지원한다.”
“알겠습니다.”
서후는 호라티우스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아군 병사의 몸을 밟고 빈 공간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곳엔 사비누스와 안니우스군이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고 있는 지역이었다.
서후는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번개같이 뛰어가 바리우스 백인대에게 행했던 그대로 저들의 연약한 살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테세우스!”
“테세우스!!”
뒤늦게 그를 뒤따라 진격하던 두 콘투베르니움, 즉 16명의 병사들이 서후의 이름을 연호하며 그의 뒤를 따라 저들의 측면을 헤집어놓았다.
*
“적의 진형이 무너졌다. 더 강하게 밀어붙여라!”
사비누스가 저들의 진형이 무너졌음을 확인하고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뛰어난 전사들이었기에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이미 저들을 매섭게 압박하고 있었다.
“크아아악”
“으아아아악”
팽팽하던 전선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로 인해 안니우스측에 다량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로 인해 잠깐의 여유가 생긴 사비누스가 세르토리우스에게 말했다.
“보셨습니까?”
보다마다. 어디서 저런 놈이 나타났단 말인가? 전장의 흐름을 아군에게 유리하게 만든 것도 테세우스였고 저들의 진형을 무참하게 분쇄한 것도 저 소년이었다.
게다가 실로 영리하고 섬뜩할 정도로 냉정하게 적을 베고 있었다. 저런 어린 나이에 난전을 경험해봤을 리는 없을 텐데 어찌 저리도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의 효과를 일으킬 수 있게끔 움직인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 적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지 정확하게 꿰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눈빛은 조금도 흥분하지 않은 채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후두두둑. 후두둑
그때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한 서늘한 빗방울이 그의 이마를 타고 흘렀다.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날씨를 확인한 세르토리우스는 표정을 굳힌 채 큰소리로 명령했다.
“더 강하게 밀어붙여라! 이대로 적선을 탈취한다!”
세르토리우스 홀로 아선으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 외곽에서 코르부스를 내린 적선을 탈취해 후퇴하겠다는 뜻이리라.
사비누스는 순간 멈칫거렸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지금의 기세라면 충분하다.
“이대로 적선까지 밀어붙여라!”
*
위기는 기회와 함께 오지만 기회는 기회를 낳고 그 기회는 또다시 기회를 낳는다. 일이 안 풀리는 자가 잘 풀리는 경우는 드문 편이지만 일이 잘 풀리는 자가 더 잘 풀리는 경우는 꽤 많다.
저들의 틈은 점점 더 많아졌고 서후는 점점 더 능수능란해졌다. 기세를 타고 한 마리 야수처럼 날뛰는 서후를 막을 존재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기회가 기회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서후는 자신을 향해 내지르는 안니우스 병사의 팔을 양손의 검을 교차해 그대로 절단했다. 또다시 뜨거운 피가 자신을 덮었고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야말로 무아지경으로 적을 베어 넘겼다. 그 모습은 마치 작은 돌풍이 길가의 낙엽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를 따르는 콘투베르니움은 그런 서후의 모습에 마치 작은 전신이 강림한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따라서 자연히 그의 이름을 더욱 크게 연호하게 되었다.
“테세우스!”
“테세우스!!”
결국 세르토리우스와 사비누스를 상대하던 백인대도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이제 남은 건 한 가지, 학살뿐이었다.
물론 코르부스를 내린 적선에서 병사들이 빠르게 지원되고 있었지만 물밀 듯이 밀고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말했지만 이 배는 이미 정원초과였고 사상자들은 그대로 배 위에 남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저들의 지원병까지 승선했으니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상황이었다.
“이대로 적선까지 밀어붙여라!”
따라서 세르토리우스는 남은 저들의 학살을 명한 것이 아니라 적선 탈취를 명했다. 이대로 아군의 승기가 완전히 굳으면 저들은 배를 침몰시키는 것에 중점을 둘 것이고 그리되면 이곳의 승패와 상관없이 모조리 수장당하고 말 것이다. 아니 적 지휘관, 레구르스가 있었다면 벌써 그렇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척 거리에 자리하고 있었던지라 세르토리우스의 명령을 들을 수 있었던 서후는 저들의 계획을 추측할 수 있었다.
‘적선을 탈취해 후퇴할 생각인가? 하지만 노잡이들은?’
지금 타고 있는 배나 타고 온 배는 항해할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거나 결박된 상태다. 그러니 외곽에서 코르부스를 내리고 있는 또 다른 안니우스의 배를 말하는 것이리라. 아군의 배로 도망칠 수 있을 텐데도 전장에서 병사들과 함께 하는 세르토리우스를 보며 서후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은 벤다!”
그런 생각도 잠시, 서후는 다시 전투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
냉정한 눈빛으로 선단을 지휘하고 있던 카이우스 안니우스가 자신의 부관에게 말했다.
“저 배들은 왜 뒤로 빠지는 것이냐?”
세르토리우스를 죽이기 위해 코르부스를 내린 배 가운데 한 척도 아니고 두 척이나 뒤로 빠지다니? 뭔가 이상했다. 더욱이 세르토리우스의 지원군이 도달한 상황인데 병력을 보강하기는커녕 후퇴했다고?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약속된 움직임이 아니니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부상자들을 실은 배가 아닐까 싶긴 합니다.”
“그래?”
카이우스 안니우스는 심히 미심쩍었다. 이번 전투에서 세르토리우스를 무력화시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를 레구르스가 아니었다. 부상자를 염려하느라 본래 임무를 등한시하는 사내도 아니다.
“지금 즉시 해적들을 상대하던 배들을 돌려 포위망을 더욱 두껍게 하고 특히! 저 배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막아라!”
두 척 중 한 척은 아군 진형으로, 한 척은 이곳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카이우스 안니우스가 가리킨 배는 당연히 전장을 벗어나려는 배였다.
“알겠습니다.”
*
“대장! 언제까지 싸워야 하는 거요? 이러다 다 죽겠소!”
후사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부하들의 아우성을 듣고 있었다.
“신호가 떨어질 거다. 신호가. 응?”
그때 안니우스 측의 배로 보이는 배에서 약속된 깃발이 올라옴과 동시에 불꽃으로 신호가 그려졌다. 급격하게 날씨가 흐려짐과 동시에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고 있었기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다행히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호다. 신호가 떨어졌다! 모두 퇴각한다! 서둘러!”
“저건 안니우스군의 배가 아닙니까?”
“그딴 건 중요하지 않다. 일단 후퇴해!”
“아.. 알겠습니다!”
후사인의 배에서도 동일한 신호가 펼쳐졌고 그와 동시에 일제히 모든 배들이 최초 신호를 보낸 배를 따라 후퇴하기 시작했다.
*
피로 물든 검과 방패를 든 사내가 서후에게 다가왔다. 서후는 무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서후의 온몸은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있었다. 하지만 점점 더 세차게 내리는 비에 의해 피가 씻겨나가며 그의 주변을 핏물로 물들이고 있었다.
“테세우스. 레가투스께서 너를 보자고 하신다.”
그는 바로 호라티우스였다. 세르토리우스 등은 결국 적선을 탈취했다. 그 가운데 서후가 엄청난 전공을 세웠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서후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순간 비틀거렸다.
전투를 치를 때는 몰랐는데 극심한 체력소모로 인해 다리가 풀린 것이었다. 그게 지금이라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엄청난 체력이군.’
생각해보면 실로 엄청난 체력이었다. 자신이 체력분배를 하면서 전투에 임했다고는 하지만 이런 체력이라니.. 단 몇 분 동안 극심하게 움직이는 행동만으로도 급격한 체력방전을 가져온다. 심지어 자신은 단 몇 분을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괜찮나?”
호라티우스가 급히 손을 내밀어 서후를 부축하며 질문했다.
“괜찮.. 아니 괜찮지 않군요.”
다리가 풀림과 동시에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몸의 모든 기력이 빨려 나간 느낌이었다.
“그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죽지는 않겠군.”
“레가투스!”
호라티우스는 다가온 세르토리우스에게 급히 군례를 표했다.
“센튜리온 호라티우스!”
“예. 하명하십시오.”
“자네도 지쳐 보이는군. 어서 가서 좀 쉬게.”
척!
“알겠습니다.”
호라티우스는 절도있게 군례를 표한 다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세르토리우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후를 바라봤다.
“테세우스. 네가 말한 게 거짓이 아니라는 걸 이번 전투로 확실히 알았다. 군신 마르스가 소년의 몸으로 나타나면 그런 모습일까 싶더군. 거의 맨몸으로 표범과 사자를 죽인 소년이라. 허허.”
검투경기를 즐겨보진 않았지만 그도 로마인인 이상 베스티아리이가 맹수와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모르지 않았다.
“슬링으로 레구르스를 쓰러뜨린 것도 자네였지? 그리고 적 센튜리온을 네 손으로 둘이나 죽였군. 실로 놀라운 무예다. 테세우스 네가 아니었다면 오늘 나는 이곳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 점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한다.”
정중한 예를 갖춰서 말하는 세르토리우스를 바라보던 서후가 간단하게 말했다.
“훗날 제 누명을 벗겨주시고 시민권만 보장해주시면 됩니다.”
그러자 세르토리우스는 대소를 터트렸다. 그는 서후가 왜 그같이 말했는지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하하하. 사자같은 용맹에 뱀처럼 차가운 지혜라니. 하하하하!”
웃음을 그친 세르토리우스는 냉정한 눈빛으로 서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스스로를 숨기고자 했다면 적당히 능력을 보였어야지. 뒤늦게 그런 말을 뱉어봐야 나의 경계심만 높아질 뿐이다.”
“······.”
별수 없었다. 세르토리우스가 죽는다면 훨씬 더 곤란한 상황에 처할 테니. 따라서 서후는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세르토리우스의 반응을 살폈다.
“그나저나 시민권이라. 원하는 것이 시민권이라. 진심인가? 너 같은 능력을 가진 소년이 정말로 그게 전부인가?”
콰르르릉
서후가 뭐라 대답하려고 했으나 때마침 울려 퍼진 천둥과 번개와 급히 다가온 사비누스로 인해 대답하지 못했다. 하늘에선 비가 억수로 퍼부어졌고 풍랑이 점점 더 거세졌다.
“레가투스! 측면에서 샤파트가 이끄는 해적들이 나타났습니다. 아군에 합류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곧 폭풍이 몰아칠 것으로 보이니 이대로 저들과 합류하여 피티우사 제도, 그러니까 에부수스에 상륙하는 방향으로.”
폭풍 속에 바다를 항해하는 건 육지에서 안니우스군을 상대하는 것보다 위험했다.
샤파트의 해적들은 전력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을 테니 이대로 육지에 상륙해서 전투를 치르는 것이 생존확률이 더 높아 보였기에 하는 소리였다.
“속임수에 불과하다. 저자는 아군이 아니라 안니우스에게 합류하려는 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겠지. 그러니 우리는 이대로 항해한다.”
“안니우스에게 말입니까? 이제 와 어째서? 아? 설마 피티우사 제도를 모두 제 손에 넣기 위해서?”
“놈의 목적을 내가 알 필요가 있나? 게다가 안니우스든 뭐든 이제 우리가 싸워야 적은 저들이 아니다. 사지로 스스로 걸어가느니 차라리 폭풍과 싸우는 게 낫다.”
설상가상으로 곧 폭풍이 몰아칠 것으로 보였다. 안니우스군은 피티우사 제도로 돌아가면 되지만 자신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사비누스는 굳은 표정으로 세르토리우스에게 말했다.
“노잡이들을 재촉하겠습니다.”
안니우스군의 노잡이들은 협박에 의해 열심히 노를 젓고 있었다. 장기적으로는 이런 식의 협박이 통하지 않겠지만 당장은 협박이 통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협박도 필요 없었다. 제대로 노를 젓지 않으면 자신들도 죽을 판이었으니까.
세르토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서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도 살아남는다면 나는 나의 성공과 실패를 너와 모두 나눌 것이다. 동시에 너의 영광과 고난도 나의 것이 될 것이다.”
서후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멀뚱히 서 있었지만 사비누스는 그 말에 두 눈을 크게 뜨고 서후와 세르토리우스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어두운 폭풍 속에서 세르토리우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선언했다.
“살아남는다면 테세우스, 너를 내 아들로 삼겠다.”
‘뭐?’
그제야 서후는 눈을 크게 치켜뜨고 세르토리우스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