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41. 위기.
41.
“방심하지 말고 차근히 적을 압박해라!”
레구르스가 그렇게 말할 때 배가 어디에 부딪히기라도 한 모양인지 크게 흔들렸다. 그로 인해 레구르스는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퍼어억
그리고 그 순간 레구르스는 시야가 붉게 변하며 의식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레구르스님!”
“프레펙투스!!”
병사들의 놀란 음성이 들려왔지만 귓가에만 맴돌다가 의식이 끊어지는 순간 모두 같이 사라졌다.
*
서후는 슬링을 던지는 순간, 적 지휘관과 일치된 기묘한 선이 어그러진 것을 느꼈다. 그의 실수가 아니었다.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파도로 인해 배가 흔들리는 것까지도 서후의 계산 안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배가 이토록 크게 흔들릴 줄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그가 슬링을 던지는 마지막 순간 흔들렸다. 그럼에도 서후의 자세가 흐트러지지는 않았으나 목표물이 흔들렸다.
‘지휘관의 머리에 맞기는 했지만 빗맞았을 확률이 높다.’
“적 지휘관이 쓰러졌다!”
“우리가 승리한다!”
“와아아아아”
백부장 호라티우스의 고함과 함께 병사들의 환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 저들에게 서후는 '아니다. 적 지휘관이 쓰러지기는 했지만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뱉을 수 없었다.
‘제길. 예상대로 되는 일이 없군.’
대신 서후는 변수의 원인, 배가 갑자기 크게 일어난 이유를 파악하고자 주변을 급히 살폈다.
*
세르토리우스는 놀란 눈으로 호라티우스가 이끄는 병사들을 바라봤다. 정확하게는 그들 사이에 가려져 잘 보이지도 않는 서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슬링을 사용할 줄 모른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치열한 전장에서, 더욱이 흔들리는 배 위에서 정확하게 적 지휘관을 쓰러뜨렸다고?
연습과 실전은 엄연히 다르다. 연습에서는 뛰어난 실력을 보이는 자가 실전에서 어리대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연습과 달리 실전은 그야말로 수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며, 더욱이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라면 큰 담력이나 경험이 있지 않고서는 가진 바 제 실력도 발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슬링을 사용할 줄도 몰랐던 자가 레구르스를 정확하게 맞춰?
“레가투스! 아군입니다!”
그것도 잠시, 사비누스의 외침에 세르토리우스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배가 크게 흔들린 것은 세르토리우스의 군대가 코르부스를 내리고 있는 안니우스의 배와 레구르스의 배를 동시에 들이받았기 때문이었다.
오백 명 이상 되는 안니우스 군이 증원되었지만 그들이 모두 선상에 오를 수는 없었다. 이미 정원을 초과했다. 이 이상 승선한다면 배가 버티지 못하고 침몰한다.
따라서 선상전은 많아야 수백 명이다. 세르토리우스의 돌격이 무모한 것 같지만 이곳에 안니우스가 타고 있었고 저들이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았다면 승산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심지어 향후 전쟁의 승패마저 가를 수 있는 돌격이었다.
도리어 역으로 함정에 빠졌지만 한 척의 배로 여러 척의 배를 묶어버린 셈이니.. 다만 어떤 말로도 오늘의 실책을 변명할 수는 없으리라. 따라서 세르토리우스는 생각을 털어버리고 사비누스에게 말했다.
“아군과 합류할 수 있게끔 길을 터라!”
아군 역시 이미 정원이 초과한 이 배로 승선할 수는 없지만 아군이 진입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할 필요가 있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다만 길이 뚫리는 대로 레가투스께서는 아군의 배로 옮겨 타십시오.”
“불가.”
세르토리우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레가투스!”
“너희를 버리고 나 혼자 살아남으란 말이냐?”
사비누스는 호루라기를 불어 진형을 공격대형으로 전환하며 세르토리우스에게 외쳤다.
“레구르스가 쓰러진 지금이 기회입니다. 경황이 없는 저들은 필사적으로 레가투스를 막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저희는 저희 나름의 자구책을 강구하겠습니다! 후사인, 그자가 멍청하지 않다면!”
세르토리우스는 미간을 좁히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비누스의 말이 옳았다. 지금 이곳에 있는 병력들이 지원해온 아군의 배에 한꺼번에 올라탄다면 배가 급속도로 느려진다. 그렇게 되면 금세 추격당할 것이고 그리되면 지금 광경의 반복에 불과하다.
“사비누스. 반드시!”
“반드시. 레가투스 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세르토리우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외쳤다.
“적을 쳐 부숴라!”
*
호라티우스는 대견하다는 눈으로 서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본래 의도는 공격이 몰릴 수 있게 미끼를 자처한 자살공격이나 다름없었다. 별 효과는 없겠지만 그래도 버티고 있는 것보다는 더 나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테세우스라는 소년이 적 지휘관을 쓰러뜨릴 수만 있다면 자살공격이 아니라 생존할 수 있는 전략적인 움직임이 될 수 있기에 일말의 가능성을 품고 당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정말로 적 지휘관을 쓰러뜨리다니.
“잘했다. 저들이 단번에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버티거나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봐라! 아군이다!”
호라티우스가 말하기 전에 이미 서후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군의 돌진으로 인해 적 지휘관을 사살하지 못했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까?
‘빗맞았어도 최소 중상일 테니 당장 일어나지는 못하겠지만.’
서후는 자신들의 지휘관이 쓰러졌음에도 안니우스군이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이유는 바로 호라티우스와 같은 백부장 때문임을 알아차렸다.
서후는 말없이 품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기세를 잃어버리면 곤란하다.’
대개 모든 일에는 흐름이 있다. 전장 역시 마찬가지. 그 흐름을 역행하여 승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불가능에 가깝다. 지휘관이 죽었든 살았든 어쨌든 쓰러졌으니 안니우스군으로 향하던 흐름이 어느 정도는 세르토리우스군으로 돌아섰다. 유리한 전장에 서고 싶다면 그 흐름이 이어질 때 적을 몰아쳐야 한다.
호라티우스는 그런 서후를 힐끗 바라본 뒤 사비누스의 진형이 공격대형으로 전환되자 병사들에게 외쳤다.
“센튜리온을 죽인다!”
“와아아!”
여기서 백부장을 죽이면 전장의 기세는 완전히 아군의 것으로 돌아선다. 아니 이미 그 기세만으로 저들의 진형이 이리저리 어그러질 것이다. 제아무리 용맹한 로마군이라도 죽고 싶은 자는 없는 법이며 센튜리온이 죽으면 센튜리가 무너진다는 걸 모를 자들도 아니다.
“가자!”
*
적 지휘관과 일치된 기묘한 선은 사라졌지만 그 대신 수많은 선이 보였다. 그건 적을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죽음의 궤적과 같았다.
아까와 달리 저들의 진형에 틈이 생겼다는 말이기도 했다. 일치된 저들의 움직임이 각자 살아남기 위해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별 차이 없었지만 서후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로마군의 무서움은 일치된 단결에 있다. 그런데 그게 무너졌다면..’
서후는 호라티우스의 대열을 벗어나 바닥을 박차고 전열의 아군 병사들의 몸을 밟은 뒤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마치 나비가 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갑자기 왜 저런 짓을 한단 말인가? 호라티우스는 갑자기 서후가 대열을 이탈해 공중으로 날아오르자 의구심을 품었지만 금세 지워냈다. 상당한 높이까지 뛰어오른 점이 놀랍긴 하나 지금은 눈앞의 안니우스군을 쳐부술 뿐이다.
그것을 안니우스군도 바라봤지만 날아오른 자가 소년이라는 점에 별 관심을 끊었다. 공간의 협소함으로 안 그래도 진형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인데 고작 소년 하나를 상대하고자 진형을 바꾼다면 진형이 완전히 엉켜버린다. 그럼 눈앞에서 매서운 기세로 돌격하는 세르토리우스군에게 무참히 분쇄 당하고 말 것이다.
그게 당연한 판단이었다. 저런 여리여리한 소년 따위야 손으로 목을 분지르기만 해도 죽일 수 있는 나약한 존재 아닌가?
레구르스 휘하의 센튜리온 바리우스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적의 간계에 흔들리지 마라. 저 미친놈은 알아서 처리하고 방진을 더욱 굳게 세워라!”
“하!”
바리우스의 말에 병사들은 짧게 외치며 전의를 가다듬었다.
실로 합리적인 판단이었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면 안 되었다. 서후는 그런 식으로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소년의 몸이라지만 이미 일반 성인의 힘을 넘어섰고 무예 실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가 홀로 이들에게 달려들지 않은 이유는 일치된 단결로 자신을 상대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도 무사하기 어려울 테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틈을 준다면 말이 완전히 달라진다.
서후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검을 내지르는 안니우스군의 표정을 확인했다. 조금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애초에 적이 된 자가 나를 얕보고 멸시한다는 건 기분 상할 일이 아니다.
‘적의 방심은 곧 나의 기회니까. 적의 숨통을 끊어놓을.’
어떤 면에서는 기뻐할 일이기도 하다.
서후는 머리부터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양팔이 상체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의 공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으려면 무기를 든 상체 쪽으로 떨어지는 것이 용이하다는 판단에 그는 안니우스군을 향해 다이빙하듯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따라서 서후는 그 즉시 자신을 향해 내질러진 글라디우스를 양손의 검을 쳐냄과 동시에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켜 갑옷이 보호하고 있지 않은 저들의 목을 베어냈다.
촤아아악
서후의 검에 의해 위에서 아래로 이어진 사선으로 목이 할퀴어진 병사들은 단말마도 내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했다.
‘제아무리 겉껍질이 딱딱한 동물도 속살은 연하기 그지없는 법.’
더욱이 자신을 향해 온전히 가시를 드러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저들이 더 큰 위협으로 생각하는 호라티우스의 센튜리가 맹렬하게 저들에게 이빨을 들이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저들의 연한 속살을 무참하게 파먹어주리라.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전장에서 인간의 도리를 내세우는 건 어리석다기보다는 비효율적인 행동이다. 전장 자체가 인간의 도리에서 벗어난 공간임을 인지한다면 생사의 간극 앞에 놓인 자가 그것을 염려하느라 제 목숨을 잃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행동이 어디 있을까?
때문에 서후는 지금 이 순간, 적을 죽이는 것만 생각했다. 저들이 누구고 저들이 어떤 생각과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둔다면 칼끝만 무뎌질 뿐이다. 칼을 뽑기 전이라면 모르나 뽑은 이상 베어버릴 뿐이다.
서후는 저들을 베면서 얻은 저항력으로 추락속도를 줄이며 몸을 뒤집어 바닥에 가뿐하게 착지했다. 서후가 바닥에 착지할 때 그가 벤 병사들이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지고 있었다. 마치 그가 이곳에 온 것을 피로써 환영한다는 듯이 말이다.
병사들의 신경은 온통 호라티우스 센튜리를 향하고 있었기에 서후의 그런 모습을 확인한 자들은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들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당황하고 있었을 뿐,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아니 당황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들이 행동을 취할 때까지 기다려 줄 서후가 아니었다.
서후는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병사들의 허벅지나 종아리를 무참하게 베어냈다. 굳이 죽일 필요가 없었다. 진형을 무너뜨리면 나머지는 호라티우스와 그의 병사들이 알아서 처리한다. 그 일 가운데 몸을 숙이거나 굽힐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몸집이 작다 보니 저들의 진형을 헤집고 다니기 훨씬 더 수월했다.
촤아아악
“으아아악!”
“크아아악!”
“이 꼬마 놈이!”
그 짧은 순간에 스무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쓰러지자 병사들도 서후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할 리 없었다.
‘이미 늦었다. 나를 대항해 방진을 세우기에도 호라티우스의 돌격을 막기에도!’
당황, 분노, 어이없음 등의 감정이 뒤섞인 눈빛으로 서후에게 글라디우스를 날렸지만 그런 느린 손짓으로 서후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틈은 점점 더 벌어졌고 그만큼 몸을 움직이기 더 수월해졌으며 죽음의 궤적은 끝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서후는 그 경험을 따라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런 가운데 바리우스 센튜리의 최전선이 여지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체계적으로 열을 바꿔가며 진격하는 호라티우스 센튜리와 달리 바리우스의 센튜리는 서후로 인해 그게 불가능해졌고 그로 인해 방어진이 아예 붕괴되어 버렸다.
뒤쪽에서는 서후가 날뛰고 있었고 앞에서는 거대한 파도처럼 호라티우스의 센튜리가 밀려들었다. 저들이라고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로마군이 무서운 것은 일치된 단결성과 체계화된 전술에 있지 저들의 무예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다.
저들의 무예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그건 호라티우스 쪽도 마찬가지였고 서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 보니 저들은 이렇다 할 반격도 못하고 무참하게 도살당했다. 앞뒤로 공격당하는데 저들이라고 별수 있겠는가? 서후는 그야말로 일당백의 기세로 적을 베고 베고 또 베었다.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이빨과 발톱이 빠진 맹수를 상대하는 건 여반장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