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40. 위기.
40. 위기.
사실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이번 역시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아야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거부감을 느끼게 했다. 그나마 멀리서 돌을 던져 죽인다는 점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고 세르토리우스가 자신에게 기대한 부분이 딱 그 정도였기도 했다.
어쩌다 로마에 오게 되었지만 로마의 역사를 뒤바꾼다거나 세상을 바꾸겠다는 대의 같은 게 서후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로마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공훈 정도면 적당했다. 그게 그의 솔직한 염원이었다.
이제 와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만은 범죄자로 몰리지 않았다면 군대에 입대해서 시민권을 얻으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이라면 17살 입대, 20년 이상 복무이니 37살은 넘어야 시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 17살 이전에 어떤 대안을 찾았을 수도 있고.
어쨌거나 자신의 마음과 별개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세르토리우스가 이번 전투에서 죽으면 그나마 있던 계획마저 모조리 사라진다.
이번에도 상황은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
난전, 그야말로 난전이 벌어졌다.
로마군은 체계적으로 전열을 교체하는 전술을 채택하고 있지만 이와 같은 난전 중에도 대열을 유지하며 전투를 치르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일단 대열을 유지하기에 공간이 너무 협소하다. 이런 난전의 승패는 결국 개개인의 전투 역량에 달려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로마군의 기본단위는 8명으로 이뤄진 콘투베르니움이다. 따라서 양측의 수많은 콘투베르니움이 격돌하기 시작했다.
“찔러!”
투웅
일반적이라면 방금의 글라디우스에 찔려 죽었겠지만 상대 역시 고도로 훈련된 로마군이었다.
공격을 받은 안니우스측의 병사는 스쿠툼으로 글라디우스를 튕겨낸 뒤 날카로운 눈빛으로 역시 글라디우스를 내질러왔다. 자연히 공격 후 무방비한 상태에 놓여 목숨을 잃을 위기일발의 순간, 옆에 있던 동료 병사가 급히 방패를 휘둘러 검의 궤적을 뒤틀었다.
그로 인해 다행히 글라디우스는 병사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골이 송연한 순간이었고 너무나 고마웠지만 놀람이나 감사를 표할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병사는 급히 자세를 바로 하며 스쿠툼을 앞세웠다.
척
그런 일들이 선상 곳곳에서 벌어졌다. 따라서 난전은 난전인데 그 치열함과 별개로 사망자는 더디 발생했다.
“레가투스! 적들의 저항이 너무 거셉니다. 일단 후퇴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사비누스의 외침에 세르토리우스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미 늦었다.”
세르토리우스의 말에 사비누스 역시 후퇴로가 적에게 막혔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게 무슨 말씀? 이런! 언제 이렇게?”
“조급함은 언제나 화를 불러오지. 게다가 내가 안니우스 그자를 너무 업신여겼군. 한 번에 무려 실책을 두 가지나 범했어.”
첫째는 조급함에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는 점과 둘째는 적을 얕잡아봤다는 사실이었다.
피레네산맥에서의 의도치 않은 패배에 저도 모르게 냉정함이 흔들린 것이리라. 대장기가 달린 배가 조금 동떨어져서 움직일 때 아니 그 배가 다른 배들보다 바다에 깊게 잠겨 있다는 것을 확인했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배에 오를 때 적의 저항이 거세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챘어야 했다. 평소라면 충분히 알고도 남았을 사실을 이대로 승리를 취하겠다는 조급함에 냉정함을 잃어버렸다. 실책이다. 실로 큰 실책. 적은 자신의 성향을 알고 만반의 준비를 다했는데 자신은 준비되지 않은 전장에 몸을 던졌다.
“프라임 코호트! 목숨을 다해 레가투스님을 사수하라!”
사비누스도 수많은 전쟁을 겪은 베테랑이었기에 얼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비누스의 명령에 저들은 공격대형에서 방어대형으로 진형을 바꿨다. 알다시피 선상은 협소한 공간이라 모든 병력이 세르토리우스를 둘러쌀 수도 없었다. 적들이 그렇게 내버려 둘 리도 없었다. 따라서 세르토리우스를 둘러싼 병력은 전체 병력 중 절반도 되지 않았다. 6개의 콘투베르니움이었으니 50명도 채 되지 않았다.
“호라티우스 센튜리온의 지휘 아래 두 번째 방어진형을 만들어라!”
사비누스는 지휘권 밖에 놓은 병력을 백부장 호라티우스에게 맡겼다. 그러자 호라티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급히 고함을 지르고 호루라기를 불며 남은 병력을 지휘해 방어대형을 만들었다.
물론 그 가운데 전투가 연신 벌어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세르토리우스가 같은 배에 타고 있던 자들은 프라임 코호트 내에서도 뛰어난 병사들로 이뤄진 백인대였다는 점이다. 고로 세르토리우스가 과감하게 적진을 향해 돌격한 것은 자신의 부하들을 신뢰했기 때문도 있었다.
“세르토리우스!”
병사들로 둘러싸인 한 지휘관이 목청을 드높여 세르토리우스를 불렀다. 세르토리우스가 눈을 들어 살피자 심지어 그는 카이우스 안니우스도 아니었다. 그의 충실한 부관 레구르스였다.
그 모습에 세르토리우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완전히 당했군.”
레구르스는 낭패한 세르토리우스의 모습에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당신은 명성은 오늘 여기서 끝날 것이오.”
그러자 사비누스가 분개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헛소리! 우리는 항상 불리한 전장에 섰지만 결국에 승리는 우리가 가져갔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그 점은 본인도 높이 사는 바요. 그러나. 이번엔 다를 터!”
쿠우웅 쿠웅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르토리우스의 배와 레구르스가 타고 있는 배에 코르부스가 걸쳐졌다. 코르부스를 내린 배의 수는 무려 다섯 척. 얼추 추산하기에도 오백 명의 병력이 그곳에서 더 쏟아져나올 것이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도 아닌 정예군단병이 말이다.
더욱이 대장기를 단 배에는 일반적인 병력보다 많은 병력이 승선해있었고 심지어 노잡이들마저 병사들을 사용해 유사시를 대비한 것으로 보였다. 세르토리우스군은 수적으로 완전한 열세에 처했다.
게다가 이미 신호를 보낸 모양인지 안니우스의 선단은 대장기를 견고하게 둘러싸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레구르스가 이곳에 있는 이상 저 선단을 지휘하는 것은 바로 카이우스 안니우스이리라.
퇴로를 완전히 막아버렸기에 레구르스는 그들을 비웃으며 말했다. 저들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이 전투에서는 승리할 수 없다. 승리할 수 없는 전투에서 승전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면 지난 피레네산맥에서도 그렇게 했을 것 아닌가? 그러니 이건 장담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과 같았다.
“이번엔 어디도 도망갈 수 없다. 이쯤에서 항복한다면 목숨은 보전해주겠다. 그 연후에는 로마의 콘술께서 그대를 어찌하실지 판단하시겠지.”
로마의 집정관은 술라와 그의 부관이었던 메텔루스 피우스다. 이대로 항복한다면 그 끝이야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세르토리우스는 무심하게 하늘을 바라보다가 냉정한 눈빛으로 레구르스를 바라봤다.
“수많은 전장을 전전했지만 나 세르토리우스가 먼저 항복을 청한 적은 없다.”
“그대의 결정이 그러하다면 존중할 수밖에. 쳐라!”
레구르스가 세르토리우스를 비웃으며 명령하자 그들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은 살의를 더욱 진하게 피어 올리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
누군가 그랬다. 인생은 위기의 연속이라 했던가?
개소리하지 말라고 쏘아붙이고 싶어도 사실이 그랬다.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왠지 느낌이 싸하더라니.. 제길.’
“어이. 테세우스라고 그랬냐?”
호라티우스가 방어진형 안쪽에 자리한 서후에게 말을 걸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서후는 백부장 호라티우스와 함께하고 있었다. 호라티우스가 그를 잡아챘고 서후도 홀로 저들을 상대할 생각은 없었던지라 순순히 그의 손길에 응했다.
서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제에 무슨 강단으로 여기까지 따라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수 재간은 있으니 따라온 것일 테지.”
그가 말을 하는 와중에도 연신 전열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들이 베테랑이자 뛰어난 전사인 것은 맞는 모양이다. 전황이 극도로 불리함에도 이들은 전의를 조금도 잃지 않고 맹렬하게 적과 싸우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외통수에 걸려도 된통 걸린 것 같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적 지휘관을 사로잡는 수밖에 없는데.. 공간이 이렇게 협소해서야 저들을 모조리 죽이지 않고는 지휘관에게 다가갈 수도 없다. 아마 그 전에 우리가 당하겠지. 일단.. 일단 버티기만 하면 동료들이 구하러 올 것이다.”
세르토리우스의 정예병은 남은 8척에 나눠타고 있었다. 지척 거리에 있기에 저들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금세 지원병력이 도착할 것이다. 이미 저들이 막아섰겠지만 어쨌든 그 시간을 버티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번 전투는 레가투스답지 않게 성급했다는 것을 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수하리라.
호라티우스는 전방을 보며 호루라기를 불었다. 그러자 전열에서 싸우던 병사들이 급히 뒤로 빠지고 후열에 있던 병사들이 전방으로 나가 적과 싸웠다.
그 흔한 함성 하나 없이 저들은 묵묵히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검과 방패 등이 부딪치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호라티우스는 서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나?”
서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에게 레구르스를 슬링으로 요격할 것을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도 그와 다를 것이 없었다.
항우와 리처드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소년의 몸으로 스쿠툼으로 무장한 로마군에게 혈혈단신으로 달려들었다가는 금세 꼬챙이 신세가 되어버릴 것이다. 일반 성인보다 힘이 강하다고는 하나 방패를 든 로마군의 진형을 무너뜨리기엔 힘이 부족하고 그렇게 한 번이라도 자세가 허물어지면 독사의 독니처럼 글라디우스가 자신의 몸을 파고들 것이다.
로마군은 그런 식으로 자신들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야만족들을 격퇴했다. 야만족보다야 자신이 낫겠지만 몸을 피할 수도 없는 협소한 공간에서 저들을 홀로 상대한다는 건 미친 짓에 불과했다.
이들은 도적떼가 아니다. 수십 명을 무참히 죽인다고 두려움에 질려 전의를 잃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욱 분노하며 맹렬하게 달려들 자들이며 틈을 비집고 들어와 목숨을 단번에 앗아갈 수 있는 노련한 자들이다.
‘공간이라도 넓다면 저들의 행동반경을 넓게 만들어 그 틈을 파고들 수 있겠지만..’
이런 비좁은 공간에서는 그도 별다른 수가 없다. 막강한 힘으로 스쿠툼 자체를 으스러뜨린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말했다시피 그런 힘은 아직 서후에게 없다. 체구도 저들보다 작으니 낙차에 의한 공격력도 무시할 수 없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성공한다면 우리도 살고 너도 살겠지만 실패한다면.”
삐이익
굳이 실패할 경우를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호라티우스는 호루라기를 분 뒤 크게 외쳤다.
“공격대형으로!”
척 척
완전한 열세에 처해있는데 공격대형이라니? 그의 부하들은 호라티우스만큼이나 노련한 전사들이다. 이 명령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명령인지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공격대형으로 대형을 전환했다.
척 척
대형이 전환되자마자 호라티우스가 외쳤다.
“돌격!”
서후도 칼을 품에서 꺼내 들었다.
“내 말을 허투루 들었나? 네가 상대할 적은 이들이 아니다. 한 사람만 노려라! 한 사람만!”
서후는 검을 들고 싸우다가 능히 적을 요격할 수 있는 순발력과 실력을 지녔다. 더욱이 극심한 난전에 접어들면 철옹성 같은 저들의 방어벽이 그만큼 허물어지기에 수월하게, 더 안전하게 저들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일단 저 지휘관부터.’
전투 실력을 뽐내는 것은 애초에 관심도 없었고 괜히 아군을 불안하게 만들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여러 가지 장애물이 많았다. 선상의 물체들이 그러했고 병사들 역시 탄환의 궤적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니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군의 단말마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힘에 부쳐 하나둘 목숨을 잃는 것이리라. 그러나 호라티우스는 서후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이 맡은 바를 수행할 뿐이었다. 실낱같은 가능성만을 믿고 제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사내가 얼마나 될까? 그런 면에서 그와 그의 부하들은 실로 강철같은 심장을 지니고 있었다.
서후는 어느 한순간 보이지 않는 기이한 궤적이 적 지휘관과 이어진 것을 느꼈다. 이제는 저들의 믿음에 보답해야 할 시점이다.
서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장전하고 있던 돌멩이를 번개같이 그를 향해 집어 던졌다.
쐐에에엑
그가 던진 돌은 재빠르게 바람을 가르고 레구르스에게 쇄도했다. 그리고 결국 둔탁한 소음을 발생시켰다.
퍼어억
명중! 명중이다.
돌을 얻어맞은 적 지휘관의 신형이 급격하게 고꾸라지는 것을 확인했다. 그것을 발견한 호라티우스는 눈에서 불이 튀는 것 같은 희열을 느꼈다.
“적 지휘관이 쓰러졌다!”
“와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일제히 병사들이 기세를 제압하기 위해 거세게 고함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