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39화 (39/298)

# 39

39. 슬링(sling).

39.

세르토리우스의 배들이 늦지 않게 팔마를 떠나긴 했지만 안니우스 군단의 5단 갤리선이 빠른 속도로 추격해오기 시작했다. 5단이라고는 하나 실제는 3단 형태의 갤리선으로 한 조의 노잡이가 5명씩 배치되었기에 5단 갤리선이라고 불렀다.

다행히 세르토리우스가 탄 배도 5단 갤리선이라 순식간에 따라잡힐 리는 없었지만 자신에게 합류한 해적들은 그렇지 않은 배들도 많았다. 따라서 이대로 도망친다면 아군의 신뢰와 사기를 모두 잃어버릴 수 있었기에 세르토리우스는 표정을 굳히며 명령을 내렸다.

“별 수 없군. 해전을 준비해라.”

그 말에 프리마 코호트(prima cohort, 군단 내에서 으뜸가는 전투집단)를 이끄는 프레펙투스(지휘관급 장교) 사비누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로마군의 기본단위는 콘투베르니움(Contubernium)으로 대개 8명의 병사로 이뤄져 있다. 이들은 처벌과 포상을 함께 받는 한 몸이나 다름없었다. 이 콘투베르니움을 10개 묶으면 센튜리(Century)가 되며 센튜리를 이끄는 자를 센튜리온(Centurion, 백부장)이라 불렀다.

다시 센튜리를 6개 묶으면 코호트(Cohort)가 되고 이런 코호트가 10개 모여서 레지오(Legio, 군단, 임페리얼이라고도 부름)가 되었다. 다시 말해 로마의 군단은 대략 5천 명 정도의 전투병으로 이뤄져 있었다. 물론 별개로 군단을 수행하는 비전투원들이나 노예 등을 거느리기도 했다.

다만 프리마 코호트는 보다 특별한 집단으로 앞서 말한 코호트들의 대략 두 배가량 되는 병력으로 이뤄져 있었다. 보통 코호트가 480명 정도니 프리마 코호트는 800~ 900명으로 이뤄진 집단이었다. 이러한 구조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당시 이뤄진 구조이기도 했다.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님! 아시겠지만 이대로 충돌한다면 승전은 어렵습니다.”

자신의 충실한 수하 사비누스의 발언에 세르토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보아하니 저들은 전투탑 뿐만 아니라 코르부스(Corvus, 까마귀)를 장착한 배를 가지고 왔군.”

코르부스는 일종의 접현용 조교로 카르타고에 비해 해전이 약한 로마군이 배에 걸쳐 백병전에 유리하게끔 배에 설치한 장치였다. 다만 배의 안정성이나 균형을 극심하게 무너뜨리기에 포에니 전쟁 후로는 사라져가고 있는 추세였다.

“어쩔 생각이십니까?”

“트리아리(Triarii, 고참병)와 프린키페스(Principes, 주력병)로 이뤄진 자네의 코호트라면 문제 될 것이 있나?”

그러자 사비누스는 즉시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전혀 없습니다. 저희는 그 어떤 적이라도 무찌를 수 있습니다. 다만..”

세르토리우스는 그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자신에게 남은 병사라고는 천 명 남짓한 병력이 전부였지만 이들이 있는 한, 아직은 싸워 볼 만했다. 세르토리우스는 미소를 지우며 사비누스에게 대답했다.

“자네 염려대로 저들은 오합지졸들이지. 해전이 벌어지고 백병전이 이뤄지면 금세 전투를 포기할 작자들이다.”

“하면?”

“로마의 배는 카르타고식으로 건조된 배보다 크다. 대신 그만큼 속도를 내기 어렵다.”

이는 육지전에 특화된 로마군의 특성을 반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카르타고의 배는 노잡이와 같은 비전투병력을 제외한 전투병력이 60~80명이었다면 로마는 120명가량이었다. 대신 그만큼 느렸다.

코르부스가 발명된 이유도 카르타고와 함대전을 벌이기엔 함선건조기술이나 항해기술이 월등히 떨어졌고 그 편차를 줄여 자신들의 이점을 해전에서도 사용하기 위해 개발된 부분이 컸다.

지중해를 장악한 지금이야 사용할 필요가 없으니 사라져가고 있는 추세였고 배의 크기도 점차 줄여가고 있었지만 어쨌든 저들이 코르부스가 장착된 배를 가지고 온 이상 백병전이 벌어지면 필패한다고 봐야 했다.

사비누스가 저들과 해전을 치른다고 했을 때 세르토리우스의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괜히 주저하며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아. 레가투스께서는..”

사비누스는 그제야 자신의 군단장, 세르토리우스의 뜻을 헤아렸다.

“힘든 전투가 될 것이다.”

사비누스는 그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세르토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모든 배들이 일제히 우회하며 자신들을 추격하는 안니우스의 선단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둥 둥 둥 둥

사방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전의를 고양 시키기 위해 고함치는 해적들의 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서후는 세르토리우스가 왜 이 같은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눈에 보기에도 저들의 배가 아군의 배보다 월등히 컸고 무장도 잘 되어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로마군이다. 이 시대에 전문 전투기술을 숙달하고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 자들은 로마 외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자들을 상대로 백병전을 벌인다?

또한 안니우스라는 자가 이끄는 배의 숫자는 무려 40척이 넘는다. 추산하기에도 5천에 달하는 병력이다.

반면 세르토리우스 측은 병력의 질은 물론 양에서도 크게 밀렸다. 총 30척이나 될까?

더욱이 저들과 달리 한 배의 전투병력은 백 명도 되지 않았다. 샤파트가 합류했다면 조금 나았겠지만 알다시피 그는 합류하지 않았다.

‘치고 빠지기인가?’

다만 우위에 선 부분이 하나 있다면 안니우스 쪽에 비해 세르토리우스 측은 배가 가볍고 날렵했다. 그리고 대부분 기형적으로 충각이 발달해 있었다. 적의 배를 들이받아 침몰시키는 형태로 극대화된 모습이었다. 저들의 배에 구멍을 뚫고 빠르게 빠질 수만 있다면 백병전은 벌일 필요도 없다. 간단히 계산해서 몇 척의 배만 부숴도 수백 명의 적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다는 소리였다.

‘끝까지 싸울 생각은 없겠지. 일단 배를 부숴 저들의 추격 속도를 현저히 줄일 생각이구나.’

그때 세르토리우스 옆에 있던 지휘관이 큰소리로 외쳤다. 사비누스였다.

“방패 들어!”

척 척

그러자 그의 명령을 따라 주변의 병사들이 스쿠툼을 들며 자신은 물론 세르토리우스 등을 보호했다. 아무것도 날아오지 않는데 어째서 저들이 방패를 들었단 말인가? 그러나 의문은 잠시 뒤로 하고 서후는 즉시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겼다. 훈련된 자들은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는 법이다.

쐐에에엑

쾅 쾅

아니나 다를까 거리가 일정 부분 가까워지자 하늘에서 무시무시한 창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무수히 많은 창이 일제히 날아들자 해적들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 그것을 피한 자도 있었지만 운 없게 관통당해 죽은 자들도 매우 많았다. 바로 로마군이 자랑하는 필룸(Pilum)이라는 투창이었다.

‘화살도 아니고 창을 이 거리까지 날렸다고?’

더욱이 화살은 아직 날아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의문은 사비누스와 그 휘하 로마군들의 모습에서 해소되었다.

“필룸 준비! 던져!”

병사들은 사비누스의 명령에 따라 안니우스 선단을 향해 일제히 필룸을 날렸다. 그건 사비누스와 같은 배에 탄 병사들뿐만 아니라 다른 배에 탄 병사들도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거의 동시에 투창하기 시작했다.

필룸에는 가벼운 필룸과 무거운 필룸 두 가지가 있었는데 지금 저들이 던진 필룸은 원거리에 유용한 가벼운 필룸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로마군은 하나같이 놀라울 정도로 먼 거리를 날렸다. 저들 모두가 일반인보다 힘이 월등하지 않을 텐데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그런 서후의 눈에 로마군 손에 들린 기묘한 형태의 고리를 가진 작은 막대기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투창기였다. 투창기를 사용하면 맨손으로 던지는 것보다 3배 정도 더 날아갈 수 있었다. 실제로 투창기에 의해 날아간 필룸은 놀라울 정도로 먼 거리를 날아갔다.

거리가 좀 더 가까워지자 보다 무거운 필룸과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십 척의 배가 격돌하는 치열한 해전이 시작되었다.

후두두둑 후두둑

사방에서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 세르토리우스가 천둥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적의 배를 부수고 후퇴하라!”

“배를 부숴라!”

“부수고 빠져!”

세르토리우스의 명령은 곧 깃발과 트럼펫, 뿔나팔 등의 소리를 통해 아군에게 전달되었고 해적들은 필사적으로 배를 몰아 청동으로 이뤄진 무거운 충각을 안니우스의 배에 그대로 들이받았다.

콰직!

“크하하하! 어떠냐 이 새끼들아!”

휘리리릭

“커커컥”

그 모습에 즐거워하던 해적은 어디선가 날아온 두꺼운 밧줄에 목이 휘감겨 컥컥대다가 그대로 바다에 빠졌다. 그와 동시에 배에 다시 묵직한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풍덩.

끼이이익

쿠웅

굉음을 내며 배를 강타한 물체는 바로 코르부스였다.

해적의 배가 자신들의 배를 들이받는 순간 코르부스를 고정한 줄을 끊어 접현용 조교를 해적의 배에 고정한 것이다. 코르부스 자체가 엄청나게 무겁지는 않지만 그 위에 올라탄 로마군의 무게는 감히 들어서 옮길 수준이 아니었다.

척 척 척

코르부스가 내려오기 무섭게 방패를 앞세우고 돌진하는 로마군의 모습에 해적들은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후.. 후퇴! 빨리 배를 빼라! 이 새끼들아!”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돌진하는 로마군의 기세에 해적들은 겁에 질려 아우성을 질렀다. 그러나 코르부스가 고정된 이상 배를 빼는 건 불가능했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지중해의 패자였던 카르타고가 로마의 코르부스 전술에 크게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크아아악”

“으아악”

“이 새끼들이!”

이윽고 배에 승선한 로마군들에 의해 해적들은 무참하게 도살당했다. 악에 받친 해적들이 로마군에게 달려들었으나 방패를 앞세운 채 찌르고 빼고를 반복하는 로마군의 정교한 전술 앞에 모조리 차디찬 시체가 되는 건 순식간에 불과했다.

도처에서 그런 일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해적들 가운데는 이미 배를 돌려 도망치는 자들도 있었다. 그만큼 전황이 압도적으로 안니우스 군에게 우세했기 때문이다.

코르부스가 장착되지 않은 함선에는 요새와 같은 전투탑이 설치된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코르부스가 도태되고 나온 전술탑 중 하나였다. 따라서 안니우스의 로마군은 전투탑 위에서 필룸과 화살을 쉴 새 없이 날렸다.

“크아아아악! 으아아악!”

사방에서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물론 안니우스의 로마군들도 죽임을 당하긴 했지만 해적들에 비하면 극도로 경미한 수준에 불과했다.

해적들의 전술이야 뻔하지 않은가? 배로 들이받고 그다음에 배에 올라타 약탈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토록 정교한 해전을 경험해보지도 않은 해적들이 무슨 수로 로마군을 상대하겠고 그들에게 대항해 승전할 수 있을까?

심지어 저들의 숫자도 안니우스 측에 비해 부족했다.

전황이 극도로 불리했지만 세르토리우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명령했다.

“돌격! 돌격하라!”

둥 둥 둥 둥

노잡이와 전투를 독려하는 북소리는 점점 더 빨라졌고 이윽고 세르토리우스가 탄 배도 안니우스 측의 배를 들이받았다.

콰지지직!

“필룸 준비! 투창!”

곧바로 이어진 사비누스의 명령에 그의 병사들은 무거운 필룸을 스쿠툼을 앞세우고 있는 안니우스의 병사들에게 던졌다.

퉁 투퉁

하지만 안니우스의 병사들 역시 훈련된 병사답게 스쿠툼으로 그것을 막아냈다. 흉흉한 살의가 같은 배에 타고 있는 서후에게도 전해져 왔다.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슬링을 날린다고는 하나 돌멩이가 바다 위에 지척으로 깔린 것도 아니고 이미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돌멩이 대부분을 사용한 후였다.

물론 날릴 때마다 어김없이 적의 목숨을 빼앗기는 했지만 이와 같은 난전 가운데 몇 명의 목숨을 빼앗는 것으론 전황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사비누스!! 따르라!”

그때 세르토리우스가 자신의 글라디우스를 뽑아 들고 난간을 밟고 적의 배로 뛰어들었다. 아군의 투창으로 인해 틈이 발생했다지만 위험천만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세.. 세르토리우스님! 제길! 뭐하냐? 서둘러라!”

사비누스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급히 세르토리우스를 따라 배에 승선했다. 그러자 그를 따라 백여 명의 병사들도 일제히 배에 올라 저들과 전투를 치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고 있던 서후는 황당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왜 저런 미친 짓을?’

지휘관이 아닌가? 엄연히 말해 최고 지휘관. 그런 지휘관이 적의 배에 제일 먼저 올랐다고? 황당함에 적의 배를 살펴보니 그곳에는 대장기로 보이는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설마? 후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적의 대장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나?’

실로 대담하기 그지없는 사내가 아닌가?

“젠장.”

서후는 욕설을 나지막이 뱉으며 병사들의 뒤를 쫓아 안니우스의 배에 승선했다. 만약 세르토리우스가 이대로 죽으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세르토리우스와 자신은 현재 운명공동체나 다름없었다.

‘슬링으로 적의 머리통이나 깨부수면 될 줄 알았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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