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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무신의 기억-38화 (38/298)

# 38

38. 슬링(sling).

38.

슬링은 그 역사가 석기시대까지 올라가며 근세까지도 가끔이나마 사용된 무기다. 어지간한 활보다 강력하며 재료조달이나 무기를 제조하는 것도 매우 용이하다.

중세시대에 쇠뇌의 발달과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이미지로 인해 도태되긴 했지만 아이가 사용해도 성인을 죽일 수 있을 만큼 뛰어난 범용성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활과 달리 지속적인 연사가 어렵다는 점과 활보다 숙달하기 어렵다는 점은 큰 단점 중 하나였다. 원심력을 이용해 던지는 무기다 보니 고정된 물체를 맞추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슬링을 이용한다면 누구나 멀리 던질 수 있지만 정확한 물체에 타격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슬링을 잘 사용하기로 유명한 이곳 짐네시안 부족들이 괜히 어린 시절부터 아이를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별다른 훈련방법도 없다. 활도 숙달하기 어려운 무기지만 그나마 활이야 조준점과 자세를 알고 그대로 쏘면 얼추 비슷하게는 날아간다. 슬링은 그렇지가 않다. 정적인 자세로 발사체를 날리는 게 아니기에 사용자가 수없이 날리면서 숙달하는 수밖에 없다.

서후는 자신 앞에서 시범을 보이는 짐네시안 사내를 바라봤다. 그는 저 멀리 있는 나무를 힐끗 바라봤다.

아마, 삼 그리고 양털을 조합해 만든 슬링이 붕붕거리며 허공을 가르더니 이내 곧 묵직한 돌멩이를 빠르게 날렸다.

휘익

빠아악

강력한 충돌음과 함께 나무의 파편이 비산했다. 또다시 명중이었다.

왼손으로 투석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슬링의 줄을 잡은 것이 투석의 첫 자세였다. 왼손잡이라면 반대로 해도 된다는 설명이 있기도 했다.

시범을 보이는 짐네시안 사내는 아래에서 위로 던지기도 하고 위에서 아래로 던지거나 옆으로 던지기도 했다. 투석 방향에 따라 날아가는 거리나 위력이 달라지기도 했다.

여러 번 투석했지만 그가 던진 돌은 모두 정확하게 한 나무의 기둥에 박혀있었다.

짐네시안 부족의 사내, 파로는 서후를 힐끗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누구나 슬링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슬링을 무기로 삼을 수는 없다. 부족민들도 슬링을 숙달하는데 수년이란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파로는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서후는 몇 번의 시범을 보인 후 해보라는 파로의 손짓에 슬링을 그가 들었던 것처럼 들고 표적을 바라봤다.

‘모든 일에는 요령이 있다. 검과 창, 활을 비롯한 수많은 무기들을 다루는 요령이 있듯이 이 돌팔매질 역시 마찬가지.’

일을 빠르게 숙달하기 위해선 그냥 무작정 하는 게 아니라 요령을 알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처럼 단순히 돌멩이를 원하는 곳에 던지는 일에도 요령이 필요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무언가를 움직인다는 것은 모두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사람이랴.’

그나마 이 부분은 리처드가 항우보단 나은 것 같지만 도긴개긴이다. 서후 역시 잘 알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다만 한 가지 아는 사실이 있다면 나의 뜻대로만 누군가를 좌지우지하려 한다면 그 끝이 결코 좋지 않을 것이라는 점뿐이다.

서후는 잡생각을 털어버리고 파로가 던진 모습을 떠올리며 돌멩이를 날렸다.

쐐에엑

돌멩이는 번개같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갔다. 그 모습에 파로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서후를 바라봤다. 표적에 맞지는 않았지만 소년이 던질 수 있는 위력이 아니었다.

‘대충.. 이런 느낌인가?’

감이 왔다. 돌멩이를 넣은 가죽을 언제 놓아야 하는지, 원심력을 얻은 돌을 어느 시점에서 던져야 목표물에 정확하게 도달할 수 있는지 등의 정보가 던지는 즉시 생생하게 그에게 전달되었다.

‘이것이.. 재능인가?’

글은 이름을 쓸 줄 알면 되고 검은 사람을 벨 줄 알면 되며 병법 역시 사람을 부릴 수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던 항우의 오만함이 조금이나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수년을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수준을 단 몇 번 만에 습득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오만해지지 않을까? 타고나기를 이런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나르키소스가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져 연못에 뛰어들어 죽었듯이 서후, 자신도 그런 식의 삶을 살았을 거라는 생각이 지나갔다.

“허.”

서후는 황당함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는 상황이 급박해서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는데 이건 너무나 사기적인 재능이 아닌가?

‘하지만 이것에 취하지는 않겠다.’

뛰어난 재능을 믿고 오만해서 설치다가 단명하는 꼴을 한두 번 본 건 아니지 않은가? 직접 겪어보기까지 한 서후이니 그것을 깨닫는 순간, 오만하기는커녕 도리어 경각심을 지녔다. 나르키소스처럼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도리어 자살하는 모순에 빠지지 않도록 말이다.

서후는 다시 돌멩이를 가죽에 넣고 던질 준비를 한 뒤 바로 표적을 향해 집어 던졌다.

쐐에에엑

퍼어억

“허! 우.. 우연? 우연인가?”

파로는 놀란 표정으로 서후와 그가 맞춘 나무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누구나 한 번쯤은 우연히 맞출 수 있다. 뛰어난 장수들이 사냥 나갔다가 우연히 멧돼지를 만나 그 멧돼지에게 우연히 중상을 입고 죽는 것처럼.

조금 더 던져봐야 확실해지겠지만 감을 보다 확실하게 잡을 수 있었다.

서후는 다시 한번 슬링을 통해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퍼어억

또다시 명중이었다. 그로 인해 나무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게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고 네 번이 되자 파로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우연이라는 생각은 씻은 듯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테세우스라고 했던가? 이 소년이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실로 괴물 같은 소년이다.

서후는 들고 있는 돌멩이를 모두 던질 기세로 투석하며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돌멩이는 던지면 던지는 대로 날아갈지 몰라도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

잘 차려입은 군단병이 다가와 늠름하게 생긴 장군에게 보고했다.

“출항할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좋다. 지금 즉시 마이오리카로 출항한다.”

척 척

“명을 받들겠습니다.”

병사는 주먹을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가 팔을 쭉 폈다. 팔을 폈을 때는 주먹이 아니라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한 상태로 손을 펴고 있었는데 바로 로마군의 군례였다.

이는 본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경의 중 하나로 ‘내 심장을 당신에게’라는 뜻을 담고 있는 표현이었다. 다시 말해 목숨을 준다는 의미이니 충성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군례의 형태로 굳어졌기에 상관도 부하에게 동일한 군례를 표했다.

따라서 장군으로 보이는 자도 그에게 똑같은 군례를 취했다. 그러자 보고하던 병사는 절도있게 돌아서며 장군이 있던 곳을 떠나갔다.

“안니우스 장군님. 좀 더 기다렸다가 병력을 보충하고 움직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세르토리우스가 마이오리카를 점령한 것이 사실이라면 피티우사 제도의 해적들이 그에게 협조한다는 뜻인데 그러면 1개 군단으로는 조금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그 군단마저 온전한 숫자가 아니며 병사들도 저들을 추격하느라 많이 지친 상황입니다. 히스파니아가 장군님의 지휘 아래 놓였으니 속주병을 더 징집하시어 병력을 늘리신 후에 토벌에 임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상급 백부장의 보고를 받던 장군은 바로 카이우스 안니우스이자 피레네산맥에서 힘겹게 세르토리우스를 격파한 주인공이었다. 안니우스는 자신에게 보고를 하는 수석 백인대장을 바라보고 준엄한 얼굴로 그의 이름을 호명했다.

“레구르스 프레펙투스(Praefectus, 지휘관급 장교)!”

“예. 장군! 하명하십시오.”

레구르스는 안니우스의 호명에 자세를 바로하며 크게 외쳤다.

“자네가 본 세르토리우스는 어떤 사내였나? 아니 적으로 마주한 그는 어떤 장군이었나?”

“······.”

레구르스는 어떤 말도 뱉지 못했다.

“자네가 말을 못한다는 건 많은 것을 시사하지. 차마 내 앞이라 그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지 못한다는 것도 말이야.”

“아닙니다. 장군. 장군께서는 그 세르토리우스를 격파하시고.”

“그건 내가 격파하기 전에 이미 저들의 부대가 와해 되었기 때문이지. 저들의 부대가 와해 되지 않았다면 당하는 건 나였을 거다. 알지 않나? 그 당시 막막하던 전황을 말이야.”

“······.”

레구르스는 안니우스의 말에 당시 피레네산맥에서의 일들이 떠올랐다. 그의 말이 맞았다. 저들 스스로 무너지지 않았다면 패배하거나 후퇴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레구르스는 침묵을 지켰다. 상관이 패배를 거론한다고 그것에 동조한다면 글쎄 그게 과연 부하 된 자로서 현명한 태도일까? 그렇다고 상관이 명백하게 패배할 것을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승리를 말해도 좋을 것이 없었다. 더욱이 카이우스 안니우스는 아첨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건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주역인 그 칼푸르니우스는 어찌 되었나?”

알다시피 칼푸르니우스는 세르토리우스의 장군, 율리우스 살리나토르 암살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잡아서 군법대로 처단했습니다.”

고개를 주억이던 안니우스는 레구르스에게 말했다.

“자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 피티우사 제도의 해적들을 규합하면 그 수가 5천은 족히 넘을 테니 지금 우리 병력으로 세르토리우스와 대적하는 건 위험하다고 보는 것일 테지. 아니 그런가? 우리 적은 다름이 아니라 그 세르토리우스니 말이야.”

레구르스는 잠시 주저했지만 안니우스에 질문에 순순히 대답했다.

“그렇.. 습니다.”

안니우스는 피티우사 제도 주변의 지도를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지금 쳐야 한다.”

레구르스가 의문 서린 표정을 짓자 안니우스가 다시 말했다.

“세르토리우스는 당장 우리와 싸우기 위해 마이오리카를 점령한 것이 아니다. 물자를 보충하고 병력을 보강하기 위해서였을 뿐,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시간을 주게 되면 오합지졸에 불과한 병력들이 금세 위험한 병력으로 변모한다. 게다가 마이오리카라면 짐네시안 투석 용병들이 있지. 그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한다면 우리의 중보병대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아..”

그제야 레구르스는 안니우스가 무엇을 염려하는 것인지 파악했다. 짐네시안 부족의 슬링 실력은 명성이 자자했다. 그들이 투석을 가한 뒤 일제히 그 틈을 적이 파고든다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가정(假定)에 레구르스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해적들이 세르토리우스를 따른다고는 하나 저들은 저들의 이익을 위해 따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세르토리우스가 그들의 삿된 마음을 쳐내고 가지치기할 여유를 주어선 안 된다. 기세를 타면 히스파니아에서 로마까지 진격하고도 남을 수 있는 인물이 세르토리우스다. 반드시 이곳, 피티우사 제도에서 몰락시켜야 한다.”

“송구합니다. 장군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레구르스가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청하자 안니우스가 그를 형형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세르토리우스. 그자가 극도로 위험한 인물이라 그런 것일 뿐, 자네가 잘못 판단한 건 아니야. 그러니! 반드시 죽이거나 몰락시켜야 한다. 알겠나?”

카이우스 안니우스는 이미 그를 몰락시킬 필승의 전략을 수립해두었다. 칼푸르니우스의 때와 마찬가지로 내부에서부터 무너지리라.

“명심하겠습니다. 장군!”

*

서둘러 움직였건만 세르토리우스는 늦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의 계획대로 착착 이루어졌다면 이미 마이오리카를 떠나고도 남았어야 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러하듯 계획을 세운다고 꼭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며 특히 사람을 다루는 일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해적들이 자신을 따르고 있기는 하나 모두 겉으로만 자신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이런 자들을 데리고 정규병과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그런 그의 눈에 짐네시안 용병들과 함께 서 있는 서후가 눈에 들어왔다. 짐네시안 부족도 놀랄 정도로 빨리 슬링을 습득했다고 했던가? 그래 봐야 투석병이고 일개 소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믿을만한 자가 한 명 더 늘었다는 사실은 그의 마음을 그나마 든든하게 만들었다.

땡 땡 땡 땡

그때 요란한 경고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한 병사가 헐레벌떡 세르토리우스에게 달려왔다. 세르토리우스는 병사의 보고를 받기 전에 이미 무슨 보고를 할지 짐작하고 있었다.

“저 멀리 해상에 카이우스 안니우스의 군대가 나타났습니다.”

역시나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었다.

“폴렌티아의 샤파트는 아직인가?”

“그렇습니다. 장군.”

세르토리우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상황이 이렇다지만 해적 따위에게 뒤통수를 얻어맞다니. 자연히 덩치가 우락부락한 샤파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곰인 줄 알았더니 실로 뱀과 같이 간교한 자가 아닌가? 자신의 이름으로 이득은 취하고 다시 배신으로 위험은 피한다라.. 이 모욕은 후에 갚아주리라.

폴렌티아의 해적들이 합류하길 기다렸건만 더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렇군.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 서둘러 출항한다!”

“출항하라!”

“출항하라!!”

복명복창이 이뤄지며 세르토리우스와 그에게 합류한 해적들이 배들이 일제히 팔마를 떠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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