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36. 피티우사 제도.
36.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로마 수비대가 주둔한 폴렌티아를 친다고 마고바르카 전체가 떠들썩하게 움직이더니 이내 곧 수많은 해적들이 배를 타고 마이오리카의 폴렌티아로 향했다.
해적들의 그런 움직임에 해적이 아닌 자들은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특히 노예를 구매하러 메노르카에 상륙했던 로마인들 말이다.
그러나 의외로 해적들은 그들을 구금하지도 않았고 그들을 살해하지도 않았다. 기이한 일이었다. 로마 수비대는 치러 움직이면서 정작 자신들 영역의 로마인들은 그대로 내버려 둔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바다 위 해적들의 배가 서후의 눈에 들어왔다. 모두 같은 곳, 폴렌티아로 향하고 있었다.
서후는 약탈에 동조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에 전투에 같이할 이유가 없었지만 의외로 그는 나디르와 함께하고 있었다. 금세 생각이 바뀌기라도 했단 말인가?
“세르토리우스가 이런 식으로 움직일 줄이야.”
나디르 역시 바다 위의 해적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해적들이 기이한 행동을 보인 이유와 서후가 폴렌티아 점령전에 참가한 이유가 단 하나의 이름으로 정리되었다.
세르토리우스. 그자가 살아 있었다. 살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에부수스의 해적들을 휘하로 받아들여 에부수스와 가까운 팔마를 점령하게 만들었다. 메노르카의 해적들이 폴렌티아를 치는 이 시점에 맞춰 팔마 정벌이 시작될 것이다.
“잔혹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영리함도 지니고 있었던가?”
나디르는 샤파트에 대해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팔마든 폴렌티아든 그곳을 약탈하는 건 피티우사 제도의 해적들이 아니다. 세르토리우스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한 행동이다. 최소한 로마를 전면적으로 적대하는 행위는 아니라는 말이다.
서후도 메노르카의 해적들을 이끄는 자의 노련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석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무는 법이라.. 이들을 이끄는 자가 상당히 노련하군.’
샤파트는 떠들썩하게 해적들을 격동시킨 것과 달리 폴렌티아를 향해 출발하는데 꽤 시간을 두고 움직였다. 말했다시피 저들은 로마인들을 구금하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 수비대와 연관된 인물이 하나도 없었을까?
게다가 함대전에는 취약할지 모르나 약탈에는 특화된 배가 바로 해적들의 배다. 기동력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 또한 메노르카의 마고바르카와 폴렌티아의 항구는 매우 가까운 편이다. 그럼에도 해적들은 아직도 폴렌티아에 도착하지 않았다.
“곰이 아니라 여우였군. 아니면 곁에 꾀주머니를 두고 있거나.”
이러니 피로시르가 비참한 몰골로 샤파트의 뱃전에 못 박힐 수밖에 없었겠지. 나디르는 혀를 내둘렀다.
“전투는 아마 없겠군. 약탈도 적정 수준에서 그칠 테고.”
서후도 흘러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나디르에게 말했다. 나디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후에게 말했다.
“수비대는 이미 배를 타고 도망쳤을 테고 전투가 일어나지도 않을 테니 해적들도 비교적 샤파트의 통제에 잘 따르겠지.”
“세르토리우스. 그자가 이것까지 내다본 것일까?”
서후의 물음에 나디르가 고개를 옆으로 흔들며 말했다.
“그건 알 수 없다. 우연히 벌어진 것인지 그가 계산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지. 애초에 우연이든 아니든 결과가 이러하니 그걸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만약 이것을 계산하고 움직인 것이라면..’
전투에 패배해서 후퇴하는 가운데에서도 쓸데없는 피를 흘리는 것을 자제할 정도로 자제력이 뛰어나다는 소리고 그만큼 냉철하다는 의미기도 했다. 만약 그렇다면 세르토리우스는 확실히 함께 할만한 자다.
피를 보기를 즐기는 자는 반드시 패망한다. 단 한 번도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지만 한 번의 패배로 목숨을 잃고 시신마저 전리품으로 오체분시(五體分屍)하듯 갈가리 찢어진 항우처럼.
‘확실한 건 만나봐야 알겠지. 혹 이 자도 따를 만한 자가 아니라면.. 갈리아 지방이나 브리타니아 지방을 고려해봐야겠다. 이곳 히스파니아도 나쁘진 않겠지만..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모르겠군.’
문명이 비교적 체계화된 곳은 말 그대로 체계를 따르지 않고는 어떤 힘을 가지기 어려운 구조 속에 놓여있다. 다시 말해 이방인과 같은 외부인은 그 사회에서 힘을 가지기 어렵다는 소리다.
반면 문명화가 덜 이뤄진 곳이라면 그게 비교적 쉽다. 체계에 따를 필요 없이 강한 힘을 지니면 그게 곧 권력으로 변할 여지가 확률적으로 더 높다는 소리다.
마찬가지로 왕권이 들어선 곳보다는 일치된 지도자가 없는 지역이 훨씬 더 힘을 취하기 쉽다.
‘로마의 체계에 들어설 수 없다면 로마를 전복시키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는 것이.. 하아.’
굳이 로마를 전복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우두머리가 되면 아랫사람들의 흐름을 읽고 그들의 욕망을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분출하게끔 이끌어줘야 할 필요가 있다. 그걸 못한다면 우두머리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 여러모로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서후 자신이 생각한 민족들은 사실상 야만족이다. 도적떼나 다름없다. 그들의 우두머리가 된다면 자신은 도적왕이 되어야만 한다. 교화? 그게 가능할 것이라 보는가? 만약 서후가 그렇게 한다면 언제 암살당할까 물 한 잔 제대로 마시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될 테고 결국 저들은 저들의 입맛에 맞는 우두머리를 서후가 차지한 자리에 올려놓을 것이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말자. 로마의 체계에 속하고 비교적 평탄한 삶을.. 으득.’
어떻게 보면 평탄한 삶은 이미 물 건너간 셈이다. 그러다 보니 서후는 자연히 데메트리우스가 떠올랐다.
‘일단은 넘어가 주지. 일단은..’
*
붉은색 스쿠툼으로 무장한 천여 명의 로마군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갑옷은 헤어져 있었고 그들의 방패, 스쿠툼 위에도 수많은 상흔이 남아 있었다. 지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알려주는 증거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무기와 갑옷은 낡았을지라도 무기를 든 전사들의 눈빛은 살아 있었고 그게 누구라도 당장 베어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살의가 서려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해적들은 자신들의 수가 그들의 배 이상이나 되었지만 감히 그들과 적대할 마음을 품지 못했다. 저들이 진격한다면 자신들은 메뚜기떼처럼 놀라 달아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눈앞에서 본 로마군의 위용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경계 해제.”
척 척
한 남자가 외치자 철옹성 같던 그들의 방패 벽이 옆으로 갈라졌다. 그 가운데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한쪽 눈을 잃어버린 것인지 애꾸눈을 하고 있었는데 눈뿐만 아니라 그의 갑옷에도 수많은 전장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후는 그 모습에 순간적으로 일선에서 지휘하는 지휘관 중 한명인가라고 생각했지만 나디르의 말에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세르토리우스. 저자는 세르토리우스가 분명하다.”
“저자가?”
“세르토리우스는 최고 지휘관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번 전장의 일선에서 병사들과 싸우기로 유명하다. 저 상처는 갈리아에서 입었다는 상처가 분명해.”
해적들도 그에 대한 이야기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한니발의 재림.”
“세르토리우스다.”
“세르토리우스!”
2차 포에니 전쟁의 주역, 한니발도 세르토리우스처럼 애꾸눈이었다. 세르토리우스는 그 때문에 한니발의 재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별명이 붙여질 만큼 뛰어난 장수였다는 소리다.
물론 그 별명은 히스파니아인들이 붙인 별명이지만 어쨌든 세르토리우스는 이 상처를 영광의 훈장이라 여겼고 실제로 많은 로마인들이 그에게 존경심을 표했다. 이 같은 명예는 높은 지위를 가졌거나 명성을 가진 자들도 얻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소문의 주인공을 본 해적들은 혼자의 몸으로 자신들의 무리로 향하는 세르토리우스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그는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적정거리에서 걸음을 멈춘 세르토리우스가 좌중을 휘어잡는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너희도 알겠지만 나는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다. 테우토네스족과 싸웠고 히스파니아의 여러 부족과 싸웠으며 갈리아족과도 싸웠다. 그리고 지금은 로마의 술라와 싸우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 자리에 서 있다.”
그런 뒤 세르토리우스는 좌중을 훑어보며 일갈했다.
“나는 패배했다. 나의 장군 율리우스 살리나토르는 쥐새끼 같은 칼푸르니우스에게 암살당했고 피레네산맥은 결국 카이우스 안니우스에 빼앗겼다. 마우레타니아에서는 그곳의 원주민들에게 수많은 병사들을 잃었고 심지어 히스파니아로부터도 버림받고 바다를 떠도는 신세에 처한 것이 나의 현실이다.”
그가 패배했다고는 하나 누구도 그를 비웃을 수 없었다. 세르토리우스는 형형한 눈빛으로 해적들을 바라보며 다시 외쳤다.
“그러나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살아 있고 나는 다시 히스파니아를 차지할 것이고 나는 다시 로마의 품에 안길 것이다. 저 간악한 술라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로마를 해방시키고 말 것이다. 또한 언제나 그랬듯 나 세르토리우스는 나와 함께하는 자와 영예를 나눌 것이다!”
‘로마의 품에 안긴다라..’
서후는 세르토리우스의 발언을 유의해서 들었다. 로마인들도 아닌 해적들 앞이건만 로마를 정복한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확실히 신중한 자다.
‘더 확인해봐야겠지만 이자와 함께하는 것이 내게 이로워 보인다.’
말을 다시 멈춘 그는 샤파트와 또 한 명의 해적을 가리켰다.
“샤파트, 후사인! 나와 함께 할 것인가?”
후사인은 에부수스 섬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해적의 이름이었다.
“따르겠습니다.”
“이미 따르기로 정했습니다.”
샤파트에 이어 후사인의 대답이 즉각적으로 터져 나오자 세르토리우스는 다시 좌중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외쳤다.
“좋다. 너희는 어찌할 것이냐? 내게 대적할 것이냐? 아니면 나를 따를 것이냐?”
“따르겠습니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세르토리우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샤파트와 후사인에게 말했다.
“샤파트! 너는 지금 즉시 폴렌티아로 돌아가 전쟁물자를 징수하고 항해할 모든 준비를 마쳐라. 후사인 너 역시 마찬가지다.”
그 말에 샤파트가 의아한 표정으로 세르토리우스에게 질문했다.
“설마 기껏 장악한 이곳 마이오리카를 버리는 것입니까?”
세르토리우스는 샤파트를 냉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제멋대로 서 있는 해적들을 바라봤다. 실로 형편없기 그지없었다.
지휘관의 말이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제멋대로 입을 열며 움직인단 말인가? 대체 이런 자들을 데리고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세르토리우스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게 자신의 현실이리라. 씁쓸한 감정이 세르토리우스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는 금세 마음을 바로잡았다. 이들을 데리고 다시 시작하리라. 난관이 닥치면 극복하면 될 뿐이다.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어조는 냉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너희는 오합지졸이다. 내가 비록 많은 병사를 잃었지만 너희 정도는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 있다.”
해적들은 자존심이 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실제로 저 단단한 로마군을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너희들을 데리고 카이우스 안니우스의 정예군단과 싸운다?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세르토리우스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해적을 바라봤다.
“해상이라면 조금 다르겠지.”
샤파트는 세르토리우스의 생각을 지레짐작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해전이라면 자신 있습니다. 맡겨주십시오.”
“저 후사인도 해전이라면 뒤처지지 않습니다.”
“믿어보지. 일단 만반의 준비부터 갖추도록.”
“알겠습니다.”
“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해전? 해전이라면 다르다고? 헛소리에 불과하다.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은 카르타고를 물리친 게 대체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란 말인가?
시간과 물자를 얻기 위해서 마이오리카를 점령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적과 싸워야 할 때가 아니다.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했다. 세르토리우스는 약해지려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 후퇴하여 적의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이 오합지졸 같은 놈들도 사람 노릇 할 수 있게끔 훈련 시켜야 한다. 그래도 전투에 익숙한 놈들일 테니 솜털이 뽀송뽀송한 애송이들보다는 낫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해적들을 훑어보는 와중 세르토리우스의 눈에 소년이 보였다. 예상했다시피 그는 바로 서후였다.
“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