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35. 피티우사 제도.
35.
개털? 개털이라고? 세르토리우스는 히스파니아의, 보다 정확하게는 바에티카의 총독이었다. 이탈리아 본국에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세르토리우스는 이 근방에서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나디르는 바짐의 말에 짐작되는 것이 있었지만 섣불리 예단하지 않고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보다 자세하게 말해보게.”
“세르토리우스가 킨나의 장군으로 술라와 대적하던 자라는 건 자네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예상했다시피 술라가 토벌군을 보냈고 세르토리우스는 패했지.”
“죽은 건가?”
“그건 아니고. 아니 아니 모르겠군. 죽었는지도. 나도 상세한 것까지는 몰라. 패자에게 더 관심을 둘 필요도 없고. 다만 누가 이 지역의 패권을 쥘지는 알아야 하니 얼추 정황만 파악하고 있을 뿐이야.”
바짐은 말없이 재촉하는 나디르의 눈빛에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로마에서 이곳 히스파니아로 진격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있네.”
“피레네산맥을 말하는 건가?”
“그렇네. 세르토리우스는 술라가 자신을 토벌할 것을 예측하고 율리우스 살리나토르에게 군사 6천 명을 주어 그곳을 경계토록 했다는군. 그리고 얼마 뒤 세르토리우스 그자도 군사 6천을 이끌고 피레네산맥으로 향했고.”
“그런데도 세르토리우스가 패했다?”
총 만 이천이다. 피레네산맥은 험한 곳이기에 그만한 병력을 이끌고 적을 맞이했다면 어지간해선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패했다? 세르토리우스에 대한 소문이 과장된 것이었단 말인가?
“자네 생각이 뭔지 아네. 나도 그랬으니까. 비등한 전력이라면 만반의 준비를 마친 피레네산맥을 뚫기 어려웠을 테지. 하지만 소문을 들어보니 그럴 만도 하더군.”
“소문?”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율리우스 살리나토르가 암살당했다고 하네. 군대는 그 길로 뿔뿔이 흩어졌고 병력의 열세에 처한 세르토리우스는 패할 수밖에 없었겠지. 이게 내가 아는 전부일세. 당연히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세르토리우스가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어. 다만 그게 벌써 꽤 된 일이니..”
나디르는 서후를 슬쩍 바라본 다음 바짐에게 말했다.
“술라가 직접 오지는 않았을 테고. 음.. 잠깐만 그럼 히스파니아는?”
“자네도 알지 않나? 바에티카의 관리들은 애초에 세르토리우스를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걸 말이야. 세르토리우스가 패배한 그 순간, 마음을 돌려먹었겠지. 확인되지 않은 소식이라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히스파니아로 후퇴했는데 거부당하고 바다로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있었어.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일단 죽지는 않은 셈이지. 곧 그리될 것으로 보이지만.”
“로마에서 온 장군의 이름은?”
“카이우스 안니우스. 이미 히스파니아를 장악했고 마이오리카의 수비대도 보강했어. 드러나는 정황을 볼 때 세르토리우스가 바다로 도망친 소문이 사실로 보이긴 하네. 그게 아니라면 굳이 마이오리카의 수비대를 보강할 이유도 없었겠지.”
나디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후에게 말했다.
“그렇다는군.”
세르토리우스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는 안팎으로 적을 두고 있었다. 패배한 채로 도망치고 있으니 그 휘하의 병력도 보잘 것 없을 터, 그가 다시 세를 구축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서후의 표정을 살피던 나디르가 다시 말했다.
“어찌할 셈인가?”
막막한 상황이다. 술라와 원한 관계가 없으니 술라의 장군 카이우스 안니우스에게 몸을 의탁하고 그 휘하에서 공을 세우는 방법도 있지만 애초에 출신도 불분명한 소년을 그가 휘하로 받아줄지부터 의문이다. 더욱이 자신은 돈을 훔친 도둑으로 몰린 상황이다. 자신을 잡아다가 매질하거나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무엇보다 데메트리우스, 그자는 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알다시피 그는 해방노예다. 폼페이의 자치 집정관을 움직일 정도의 재력을 막대한 재력과 영향력을 지닌 해방노예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해방노예가 어떻게 그런 재물을 가질 수 있었을까? 피바람이 부는 이 시기에 해방노예에게 무슨 권력이 있어 그토록 막대한 재산을 또 보존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폼페이의 집정관은 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일까?
한 사람으로 귀결되지 않는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말이다.
‘카이우스 안니우스라는 자에게 가느니 이대로 해적생활 하는 게 훨씬 더 낫다. 하지만 해적질이라..’
살려면 별 수 없다. 생존하려면 별 수 없다. 해적질이라도 해야지. 도적질이라도 해야지. 살인과 약탈과 강도도 밥 먹듯이 해야지. 질척한 피로 점철된 침상에 누워 피를 먹고 마시며 즐기며 그렇게 살아야겠지.
하지만 그런 삶을 자신이 원하는가? 항우와 리처드의 삶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로 보던 자신이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며 잔혹한 생활에 얽매인다면 그야말로 자기모순 아닌가?
항우와 리처드의 삶을 그들이 된 것처럼 겪기는 했지만 선택의 순간, 자신의 의지는 그곳에 개입되지 않았다. 그들의 선택을 삼자로서 지켜봤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과 자신을 분리할 수 있었고 그들의 선택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항우와 리처드의 기억과 경험이 영향을 미칠지언정 선택은 오롯이 서후, 자신의 것이고 그 책임도 역시 자신의 것이다. 그런데 이제와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약탈하는 삶에 동의한다면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그렇게 된다면 항우와 리처드의 선택에 분노하던 그 분노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고 카르타고의 인신공희에 분노하던 그 분노는 대체 무엇을 위한 분노였나?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삶이었지만, 비겁하고 어리석은 삶이었지만 그래도 삶의 마지막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와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내가 원하지도 않는 삶을 살라고? 어리석은 놈이라 또다시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하겠지만 적어도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선택을 하고 싶지는 않다. 최소한 내가 자각하고 있는 동안만이라도.’
왁자지껄한 소리가 서후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음란한 소리, 고함치는 소리, 온갖 소음과 온갖 형태의 삶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해적도 나쁘진 않겠지.”
그러나 나디르는 그게 거절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현실을 모르는 애송이 같지는 않은데 하긴 뭐..”
수백 명의 적을 뚫고 그들의 대장 히밀코를 죽여버린 사람이 서후 아닌가? 수백 명을 상대했다고 그들 전부를 벤 것은 아니고 그들 중 반수 이상은 두려움에 도망쳤지만 말이다.
바짐은 서후와 나디르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나디르에게 물었다.
“이 친구는 누구야?”
“아까 자네가 궁금해하던 히밀코를 죽인 장본인.”
“그래. 히밀코를.. 음? 히밀코를 죽여? 그게 무슨? 하하. 농담하지 말고.”
바짐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할 때 선술집과 거리 곳곳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각 배의 선장들은 긴급회의에 참석하라는 소집령이 떨어졌다.”
“각 배의 선장들은 빠짐없이 회의에 참석하라.”
“모든 선장들은 대회의장으로 이동하라. 긴급소집령이다.”
나디르가 바짐을 바라보며 물었다.
“메노르카에는 별다른 일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었지. 그런데 일이 생겼나 보군.”
*
나디르 등이 회의장에 들어서자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맞아. 뭐 메노르카에 적이 쳐들어오기라도 한 건가?”
“모두 조용.”
근육질의 거구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자 이곳에 모인 선장들이 반감 어린 눈빛을 가지면서도 그에게 집중했다.
그의 이름은 샤파트. 메노르카 지역을 거점으로 하고 있는 해적 가운데 가장 큰 세를 지닌 해적의 이름이었다. 휘하 부하 선장만 10명이 넘었다. 휘하 해적의 수가 족히 천 명은 넘으니 감히 그의 발언에 제동을 걸 해적은 없었다.
아까보다 확연히 소란이 줄기는 했지만 웅성거리는 소리는 남아 있었다. 그 가운데 나디르가 바짐에게 말했다. 바짐도 엄연히 배를 가진 선주였기에 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다만 서후는 선장이 아닌지라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샤파트.. 여전하군.”
그의 몸에 새겨진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수많은 상처들이 나디르의 눈에 들어왔다. 샤파트는 흉폭하고 또한 그만큼 강력한 사내였다.
“이곳 메노르카에서 샤파트를 거스를 수 있는 해적은 이제 없네.”
“피로시르가 당했나 보군.”
“당했지. 들리는 소문으로는 샤파트 저자가 피로시르의 머리와 척추를 뽑아서 자신의 뱃머리에 전시했다는데 그걸 확인할 엄두는 나지 않더군.”
나디르 자신이 이곳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메노르카는 두 해적단이 비등한 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샤파트 저자와 피로시르가 이끄는 해적단 말이다. 둘 다 카르타고인이었다. 카르타고인 답게 재빠르고 튼튼한 배를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인원수도 가장 많았기에 당시에도 그들을 거스를 수 있는 해적은 없었다.
“피로시르가 이기길 원했건만.. 다시 말하지만 메노르카에 별일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게 별일이 아닌 건가?”
나디르가 불신하는 어조로 바짐을 바라보자 바짐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나디르에게 변했다.
“2인 체제에서 1인 체제로 변했을 뿐, 달라진 건 없지 않은가? 샤파트 저자가 잔인하기는 해도 밑의 사람들을 어떻게 부려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이야. 사실 우리 입장에서 샤파트나 피로시르나 차이가 없긴 매한가지 아닌가?”
“하긴.”
그들이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샤파트가 좌중을 돌아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얼마 전 마이오리카에 안니우스라는 로마놈이 수비대를 보강한 사실은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건 별문제가 되지 않지. 수비대가 보강된 이유가 우리 때문은 아니었으니까.”
“맞소. 설마 그것 때문에 우리를 불러 모은 것이오?”
“대장이 말하는 중이다! 죽고 싶은가?”
한 선장이 외치자 샤파트의 수하가 버럭 성질을 내며 위협했다. 곧 살육이 벌어질 것을 직감했기 때문인지 웅성거리는 소리마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샤파트 역시 그자를 노려보다가 부하를 자제시키는 제스처를 취한 뒤 조용해진 좌중을 다시 훑어봤다. 그리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가 말하는데 끼어들지 마라. 다시 끼어들면 피로시르처럼 만들어주지.”
사색이 된 선장이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자 샤파트는 시선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최근 놈이 팔마와 폴렌티아에서의 교역을 금했다.”
“뭐?”
“교역을 금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새끼들이! 우리를 적으로 만들고 싶은 건가?”
“놈들을 죽이자!”
“죽이자!”
“팔마와 폴렌티아의 로마놈들을 몰아내고 우리의 도시로 만들자!”
샤파트의 말에 해적들이 저마다 분개하며 소리쳤다. 그런 가운데 나디르가 미간을 좁히며 바짐에게 말했다.
“어떻게 보나?”
“두 가지 이유가 있겠지.”
바짐의 말을 나디르가 받았다.
“당연히 첫 번째 이유는 세르토리우스 때문일 것이고.”
“두 번째는 우리를 길들이려는 속셈이겠지. 뇌물도 좀 받아 챙기고. 아무리 분노해도 카이우스 안니우스의 뜻대로 될 거다.”
“확실히 로마에 전면적으로 대적한다는 건 자살행위일 테지.”
샤파트가 아무리 사나워도 일개 해적에 불과하다.
살인기술을 수시로 단련하고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 군대가 바로 로마군이다. 게다가 그들은 군단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한다. 실로 무시무시한 자들이다. 그런 자들을 대적해서 살아남은 해적은 어디에도 없다. 운이 좋아 한두 번 승리를 거둘지라도 결국은 모조리 말살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저들이 아무리 분노하더라도 카이우스 안니우스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샤파트 역시 그걸 모를 사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은 나디르나 바짐이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으하하하하하.”
샤파트가 대회의장 전체를 울릴 정도로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내 생각도 너희와 동일하다. 이 로마 애송이 놈이 감히! 나 샤파트를 어떻게 보고 이런 수작질을!! 이 시간부로 우리 메노르카의 해적들은 폴렌티아를 칠 것이다! 거기에 쌓여있는 재물을 얻고 싶은 자는 나를 따르라! 또한 우리와 동조하지 않는 자들은 로마놈의 개새끼들이라고 여기고 모조리 척결할 것이야!”
“우아아아아아!”
“로마놈들을 죽이자!”
“모조리 죽이고 약탈하자!”
“우아아아아.”
샤파트의 발언에 순식간에 대회의장은 광란의 도가니로 변했다. 나디르는 물론 바짐 역시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결국 바짐이 황당함을 이기지 못하고 띄엄띄엄 말을 뱉었다.
“미.. 미친. 포.. 폴렌티아를 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