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34화 (34/298)

# 34

34. 피티우사 제도.

34. 피티우사 제도.

피티우사 제도는 크게 세 개의 섬으로 이뤄진 곳이다.

중앙의 가장 큰 섬, 마이오리카(Maiorica, 더 큰 섬. 마요르카)와 우측의 섬, 메노르카(Menorca, 더 작은 섬)는 짐네시안(Gymnesian) 섬이라고도 불렀는데 이곳의 원주민들은 슬링(sling, 돌팔매질)을 매우 잘 다뤘다. 돌팔매질이라고 우습게 볼 것이 아닌 것이 슬링을 이용한 돌팔매는 곰과 사자도 일격에 때려죽일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강력하다.

하지만 성품이 조용하고 사납지 않아서 카르타고에 예속되었다가 후에 다시 BC 123년, 당시 집정관 퀸투스 케킬리우스 메틸루스에게 점령당한다.

그 후 메틸루스는 마이오리카의 팔마(Palma)와 폴렌티아(Pollentia)라는 두 곳에 도시를 건설했는데 지금은 술라와 마리우스파의 정치적 대립으로 인한 공백으로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언제 다시 병력을 보강할지 모르기에 해적들은 교역을 할 뿐, 이곳을 약탈하지는 않았다. 그게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은 중앙의 섬이 아니라 그보다 작은 두 개의 섬, 메노르카와 에부수스(Ebusus, 이비자)였다.

“야! 이 새끼야. 조심해. 암초에 잘못 걸리면 어떻게 손도 못 쓴다!”

갑판장 도케인이 부하들에게 일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시안의 일과 그는 연관이 없었다. 다만 그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자신이 아니라 나디르에게 말이다. 카시안과 같이 나디르의 온건책에 불만을 품은 선원들을 규합해 선상 반란을 획책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메노르카의 마고바르카(MagoBarca, 마혼)이다. 천혜의 항구지. 다만 주변 지형이 모두 날카로운 바위로 이뤄져서 조심할 필요는 있다. 길고 널찍한 항구라 어지간해선 암초에 걸리진 않지만 간혹 그런 경우가 왕왕 있으니.”

검을 허리에 차고 다가온 나디르의 말에 도케인에게 주던 시선을 거두었다. 나디르에게 따로 말을 전하지는 않았다. 반란을 획책하고 있는데 왜 전하지 않냐고?

일단 이 사실을 나디르가 모를 것 같지도 않았고 어차피 이들은 해적이다. 힘의 균형이 틀어지면 누가 두목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아마 나디르도 그런 방식으로 대장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무엇보다 도케인이 뭘 하려고 해도 그에게 동조할 선원이 없었다. 나디르는 폼페이와 카르타고에서도 많은 이득을 선원들에게 보장했다.

게다가 자신이 나디르와 한편이었다. 서후도 저들이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모르고 있다면 모를까? 굳이 알고 있는 사실을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

나디르의 말을 들으며 항구의 좌우를 살피자 날렵한 형태의 갤리선들이 사방에 즐비하게 정박되어 있었다.

이들이 전부 해적이었다. 해적이 아닌 자들도 있겠지만 이 시대엔 상인이 해적이, 해적이 상인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 해적이 점령한 항구에서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아예 선단을 이뤄 대규모 약탈을 하는 해적단도 이들 가운데 꽤 많을 것이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나디르가 입을 열자 서후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눈치챘다.

“조심하도록 하지.”

“그래도 한 번 더 당부해야겠다. 네가 말했듯이 모든 배는 정박할 항구가 필요하다. 네 실력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이들을 적으로 돌리면 어떻게 도망도 못 친다.”

약탈과 습격에 특화된 해적들이다. 나디르의 배가 빠르면 이들의 배도 그러하다. 육지에서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나 원한을 가진 저들이 원해에서 배의 충각으로 들이받는다면 물에서 숨을 쉴 수 있지 않은 한 그것으로 끝이다.

나디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서후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당부했다.

“적어도 인신공희는 벌어지지 않을 거다. 그러기엔 재물을 너무 사랑하거든.”

아이를 팔면 팔았지 그런 식으로 희생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이곳이라면 히스파니아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거다. 네가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약속한다면 같이 알아봐 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여기서 관계를 끊는 것이 좋겠다.”

관계를 끊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이곳에서만큼은 카르타고처럼 일이 벌어지면 곤란하다. 이곳은 해적들이 암묵적으로 평화를 약속한 지역이고 이런 지역에서 분쟁을 일으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약속하지. 목숨을 위협하지 않는 한, 침묵하기로.”

“네 목숨이 위험할 일도 없을 거고 네 마음을 격동시킬만한 극악한 일도 없을 거다. 네가 일부러 찾지만 않으면 말이야.”

물론 난잡하기는 할 테다. 극악한 일도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버젓이 그것이 통용되지는 않았다. 이곳이 해적의 소굴이기는 하나 로마인들도 간혹 찾아온다. 자신들이 로마 수비대가 주둔한 팔마와 폴렌티아를 찾아가듯이 말이다.

그 로마인들이 지속적으로 위협을 당하거나 살해를 당해 토벌지역으로 낙인찍히면 자신들은 항구를 잃는다. 지중해를 장악한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로마와 싸워서 이길 해적은 그 어디도 없다. 바로 불문율은 이런 상황들로 인해 정해진 해적 나름의 보호책이었다.

그때 도케인의 성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조심해! 새끼들아! 속도 줄이고!! 그래! 좋아 그렇게! 단단히 결박시켜! 너희는 가서 돌이나 가져와라. 그래 새끼야. 가장 크고 무거운 걸로! 뭘 아는 걸 자꾸 처묻고 지랄이야. 다른 놈들이 쓰고 건져놓은 게 있을 테니 멍청하게 헤매지 말고 그거 가져와. 줄에 묶어서 배 밑으로 던져 놓고!”

닻 대용으로 보였다. 닻이 없지는 않았지만 오래 정박할 요량인지 그와 별개로 부가적인 조치를 하는 모양이었다.

배가 완전히 정박하자 나디르가 부하들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당분간 항해는 없다. 그러니 배 터지게 먹고 마시고 즐겨라.”

“와아아아아.”

“와아아”

나디르의 말에 해적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워했다. 같이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지만 도케인의 표정은 어딘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있던 불만도 쏙 들어가는 것이 이치다. 욕망에 충실한 해적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바로 그래서였다.

나디르는 차분한 표정으로 주변의 반응을 살피다가 서후에게 말했다.

“그 약속, 믿겠다. 정세를 알아보는 건 내 입장에서도 미룰 일은 아니니 그것부터 해결하지.”

*

“천 세스테르티우스 나왔습니다.”

“천 이백 세스테르티우스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키가 작고 얼굴에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뚱뚱한 사내가 단상 위에서 거칠게 우람한 사내를 잡아채면서 외쳤다.

“천 오백 세스테르티우스. 낙찰되었습니다.”

노예시장이었다.

노예는 해적들의 주요상품 중 하나였기에 당연히 이곳엔 거대한 노예시장이 서 있었다. 이곳을 방문하는 로마인들의 주요 목적 중 하나였다. 일반적인 노예시장보다 훨씬 값싼 가격에 품질 좋은 노예를 확보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로마인뿐만 아니라 여러 인종의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을 활보하고 있었다.

그건 전시되고 있는 노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자, 여자, 아이를 망라해 온갖 인종들이 이곳에서 거래되고 있었다. 노예들은 하나같이 헐벗은 상태로 결박된 채 단상 위에 서 있었고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자세를 바꿔가며 자신의 몸 상태를 검사받고 있었다.

노예 상인은 거침없이 노예의 몸을 잡아채며 이 노예가 얼마나 품질이 좋은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노예를 구매하고자 하는 이들의 목소리로 도떼기시장은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그에 반해 로마인들은 거래를 전담하는 자신의 노예에게 말없이 무언가 수신호를 보냈는데 그에 따라 노예들이 목소리로 외치거나 마찬가지로 수신호를 경매인에게 표시했다. 로마인들은 오른손과 왼손을 모두 사용하면 일만 개의 숫자를 표현할 수 있었다. 고로 저들의 수신호는 바로 숫자를 나타내는 수신호였다.

노예의 목에는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 어떤 특성을 지녔는지 등을 설명한 표지판이 하나씩 걸려있었는데 노련한 구매자는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리 없었다. 모름지기 상인이란 존재는 물품을 파는 것에 목적이 있을 뿐이니까.

‘눈이 두 개인 토끼가 눈이 하나만 존재하는 토끼 왕국에서는 도리어 비정상이 된다더니..’

이 광경 역시 충격이라면 충격이었지만 노예제도는 근세를 넘어서도 존재하던 제도다. 인간이 얼마나 악한지는 노예제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누군가 일은 해야 한다. 하지만 그걸 자신이 하기는 싫다. 그럼 굶어야 한다. 그러니 대신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 마음껏 부려먹을 수 있는, 죽여버려도 아무 문제도 안 생기는 그런 존재 말이다. 이런 욕망이 노예제도를 만들었고 그런 범용적인 필요가 노예제도를 정당한 것처럼 만들었다.

노예제도는 분명 악이다. 하지만 시대 자체가 노예제도를 원한다. 심지어 노예제도가 사라진 현대에서조차.

이걸 자신이 막을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사회적 동의가 이뤄져도 극도로 지난하고 위험한 일이다. 노예제도를 종식 시켰기 때문이라 콕 집어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 링컨도 결국은 암살당했다.

인신공희와 같은 극악한 일은 타협할 수 없지만 이 문제는 타협할 수밖에 없다. 비겁하다면 비겁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이 무슨 정의의 화신은 아니지 않은가? 열 받으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나디르는 미간을 찌푸릴 뿐 별말 하지 않는 서후를 보며 안심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천지 분간하지 못하고 날뛰는 자는 아니라는 소리였다.

항구에서 노예시장이 가깝긴 하지만 이곳을 거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나디르는 일부러 노예시장으로 데려와 그의 반응을 살폈다. 서후가 미쳐 날뛰면 어떻게 막을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으니 자신의 안위를 위해선 중요한 일이었다.

서후도 나디르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믿지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피를 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이미 너와 약속했다.”

“그런가? 테세우스. 이것 하나만 기억해라. 네가 어떤 기준을 지녔든 누구나 타협을 하며 살아간다. 누구나.”

“그럴지도. 하지만 타협할 수 없는 부분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단순히 목숨을 지키는 게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서.”

역시 위험한 놈이다. 세상을 삼키는 폭풍이 되거나 어디 길바닥에서 단명하겠지. 뭐 하긴 모든 인생이 그럴지도.

나디르는 말없이 고개를 흔들며 걸음을 재촉했다.

*

“으하하하하.”

“이 상처 보여? 수십 명을 상대로 싸우고 얻은 훈장이지.”

“크크. 개소리 좀 작작 해라! 네가? 술 먹고 비틀대다가 어디 넘어져서 찔렸겠지.”

“크하하하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선술집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으슥한 쪽에서는 선술집에서 일하는 여종업원과 사내들의 성교가 한창이었다.

그런 시대였다. 선술집에서 일하는 여종업원은 음식과 술은 물론 자신의 몸도 서비스로 팔았다. 비단 선술집이 아니라 일반음식점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응 으응.”

신음소리와 그것을 지켜보는 사내들의 음담패설 가운데 한 사내가 화색을 띠며 사람들을 헤치고 나타났다.

“나디르! 나디르! 이 친구야.”

“바짐!”

나디르도 그 사내의 얼굴을 보더니 활짝 웃음을 지었다. 바짐이라 불린 사내와 나디르는 팔과 팔을 맞잡으며 서로를 반가워했다. 보아하니 바짐이라는 사내도 나디르처럼 킬리키아인으로 보였다.

“소식 들었네. 이번 항해에서 재물 좀 얻었다면서?”

“뭐. 그렇게 되었네.”

“자네 부하들 말로는 카르타고의 히밀코가 죽었다는데..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아니 그 전에 그게 사실인가?”

“사실이네.”

“뭐? 누가?”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요즘 이쪽 소식은 어때?”

“메노르카회의 일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로마쪽?”

“연합회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그건 아니고. 아하. 보아하니 히스파니아 상황을 알고 싶은 모양이군. 이상하군. 그쪽은 관심 끊은 지 제법 되지 않았나?”

“그럴 일이 있어서 말이야.”

“으흠. 뭐. 그런데 이 친구는 누구야?”

바짐은 서후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이따가 한꺼번에 말해줄 테니 일단 히스파니아부터 말해봐.”

“누구 정보를 듣고 싶은 건지 모르겠는데 혹 세르토리우스 그자를 말하는 거라면 뭐 개털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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