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32. 정의의 대가.
32.
히밀코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서후에게 대답했다.
“이 찢어 죽일 놈의 새끼가 말하는 본새하고는? 그래. 이 핏덩어리 새끼야. 카르타고의 실질적인 주인 나 히밀코가 책임자다. 머리가 여물지 않아서 지금 상황파악이 안 되나 본데..”
그때 히밀코가 보낸 수하가 그에게 다가와 귓가에 뭐라고 작게 속삭였다. 히밀코는 수하의 말을 듣고 더욱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없어? 그럼 정말 이 짓을 저놈 혼자 한 거라고? 하. 물건은 물건일세.”
그렇게 중얼거리던 히밀코는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중얼거렸다.
“아까워. 아까워. 그냥 죽여버리기 아까운데.”
수백의 적을 앞에 두고도 흔들림 없는 저 눈빛, 피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차 없이 베어버리는 냉정함, 수십 명에 달하던 수하들까지도 모조리 도륙한 놀라운 실력, 아울러 어린 나이까지. 모두 히밀코의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살려둘 수는 없지.”
적당히 일을 벌였으면 덮어버리고 회유했겠지만 과해도 너무 과했다. 히밀코는 큰 목소리로 서후에게 말했다.
“어이 핏덩어리. 너 이름이 뭐냐?”
서후는 담담한 어조로 그에게 대답했다.
“테세우스.”
“그리스인인가? 어디 보자. 어린 나이에 뛰어난 실력을 보유했고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면 오늘처럼 미친 짓을 할 수도 있겠지.”
“두목. 설마?”
히밀코는 반발하려는 수하를 가볍게 손을 들어 막은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과해도 너무 과했어. 다만 네 미색이 제법 곱군. 오늘 하루만 모두의 노리개가 된다면 목숨을 살려주고 내 휘하에서 활약할 수 있는 영광을 네게 주지.”
“크크큭”
“하하하하”
“엉덩이를 흔들어봐라! 꼬마야!”
“크크큭! 살려면 열심히 흔들어야 할 거야!”
“으하하하하”
그러자 히밀코의 수하들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서후를 조롱했다.
서후는 말없이 무심한 눈빛으로 그들의 행태를 바라보다가 제단 옆에 타버린 시체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서는 일순간 번개가 쳤다.
서후는 피를 보길 원하지 않는다. 심지어 폼페이에서 누명을 썼을 때조차 조용히 물러섰다.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야경꾼들은 범죄자들과 다르게 자신의 임무에 충실할 뿐이다. 죽이는 것보다 피하는 것이 여러모로 자신에게 이로웠다.
둘째, 보다 현실적인 이유로 현 상황에서 로마를 적으로 삼으면 살아남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탈주 노예나 도둑을 잡고자 추격자를 보내진 않는다.
하지만 로마의 적이라고 규정되면 로마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사람을 보낼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데메트리우스에게 살의를 느끼면서도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나 이곳 카르타고는 다르다.
카르타고가 로마의 속주이기는 하나 이 시기 로마는 이곳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고 우티카를 주요도시로 삼았다. 따라서 로마는 카르타고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조금도 관심이 없다. 자신들이 멸망시켜버린 도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조금이라도 신경 쓸 까닭이 있을까?
게다가 로마 역시 정의를 지키는 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득을 안겨주는 자를 원한다. 패권을 잡은 히밀코는 적절한 뇌물을 통해 이곳을 향한 미약한 관심조차 완전히 끊어지게 만들었다.
자세한 정황까지는 몰라도 폐허로 변한 도시에서 도적떼가 주인 노릇을 하는데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할 서후가 아니다. 모조리 쓸어버려도 로마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냥 도적떼가 죽었을 뿐이고 그런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서후가 움직인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건 부가적인 이유일 뿐이다.
폭탄에 의해 온몸이 갈가리 찢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서후를 사로잡았다면 생면부지의 아이를 구하기 위해 테러리스트를 덮칠 수 있었을까?
아니다. 그 생각보다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온몸을 사로잡았기에 서후는 몸을 던질 수 있었다. 제 목숨을 구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면 그도 도망쳤을 것이다.
어리석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생면부지의 아이가 불에 타죽었을 뿐이다. 그냥 무시하고 내 갈 길 가면 삶이 훨씬 더 평탄하다. 쓸데없이 많은 피를 볼 필요도 없고 지금처럼 수백 명의 적들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가정(假定)도 불에 탄 어린아이의 유해를 보는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 저들이 뭐라 지껄이는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헛짓거리를 하는지 안 하는 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냥 모조리 죽일 뿐이다. 수백 명? 이런 놈들이라면 지금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죽던가. 아니면 네놈들이 죽던가. 둘 중 하나겠지.”
서후는 가볍게 중얼거린 다음 제단을 박차고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리곤 표범처럼 빠르게 히밀코를 향해 질주했다.
‘금적금왕(擒賊擒王)!’
적의 우두머리 히밀코부터 죽인다.
*
끔찍한 비명이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나디르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수도에 본 서후의 맹렬한 신위를 떠올렸다.
설마? 하지만 설마가 아니었다.
나디르가 토페트에 다다르자 서후는 양 떼 속에 풀어놓은 한 마리 늑대처럼 그림자회에 속한 도적들을 무참히 도륙하고 있었다. 서후에게 도륙을 당하는 자들은 수많은 전쟁 끝에 이권을 잡은 자들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이는 매우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저 기기묘묘한 몸놀림. 밝은 곳에서 보니 감탄이 절로 흘러나올 뿐이다. 나디르와 함께 온 해적들은 기가 질린 표정으로 서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 미친.”
“마.. 마르스.”
“두.. 두목.. 저 자는 마르스의 아들입니까?”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는가? 나디르는 눈살을 찌푸리고 반문하는 수하를 바라봤다.
*
히밀코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수백에 달하는 수하들로도 저놈 한 놈을 막지 못했다. 아니 저 살인귀의 손에 수십 가량이 이렇다 할 대응도 하지 못하고 무참히 살육당하자 두려움은 거센 파도처럼 모두의 가슴속에 파고들었다.
마르스가 현현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놈은 지치지도 않고 두 자루의 검을 전장의 사신처럼 휘둘렀다. 그가 검을 휘두르면 반드시 그 궤적을 따라 피가 흩뿌려졌고 든든하던 자신의 수하들은 파리떼 마냥 흩어졌다.
심지어 그 많던 수하들을 뚫고 자신 앞에 도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히밀코는 서후가 무심한 표정으로 바닥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모습을 바라봤다. 겁에 질린 수하들이 검을 내질렀지만 어린 놈의 새끼가 무슨 힘이 그리도 강력한지 툭 치면 검의 궤적이 그대로 바뀌었다.
챙
촤아악
짧은 소음 끝에는 어김없이 피륙을 가르는 섬뜩한 소음이 뒤따랐다.
털썩.
목숨을 빼앗긴 수하가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쓰러졌지만 그것을 바라볼 정신도 없었다. 사신같은 놈이 맹렬한 기세로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놈이 그리는 검의 궤적은 그야말로 신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체 어디를 막아야 할지 분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챙
그러나 헛으로 이 자리에 오른 건 아닌지 히밀코는 서후의 검을 막아냈다. 그러나 히밀코는 알지 못했다. 그게 바로 서후의 노림수였다는 것을 말이다.
*
촤아악
서후는 그대로 히밀코의 두 허벅지를 베어냈다.
“크아아악”
놈이 울부짖으며 자신의 검을 휘두르자 서후는 가볍게 피해내고 내지른 놈의 오른팔을 그대로 잘라버렸다.
“으아아아악!”
히밀코가 울부짖자 토페트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아니 모두가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서후를 바라봤다.
“저.. 저리가! 아.. 아니 살려줘. 살려주면 내가 모.. 모든 걸.”
히밀코는 비척거리며 서후로부터 도망치면서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후우웅
서후는 두 자루의 바닥으로 검을 교차하며 휘둘러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리곤 무심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네가 책임자라고?”
“그.. 그래! 여기서 내. 내 말이라면 무.. 무엇이라도!”
촤아악
서후는 그대로 달려들어 남은 그의 왼팔을 마저 베어냈다.
“크아아아악!”
히밀코가 고통에 울부짖었지만 서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오금을 걷어차서 무릎을 굽히게 만들고 그의 머리카락을 뒤에서 움켜쥐고 어디론가 질질 끌고 이동했다.
“으아아악!”
당연히 그 고통에 히밀코는 연신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서후의 앞을 막아설 자는 아무도 없었다.
“테세우스.”
그때 수하들을 이끌고 나타난 나디르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서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나디르에게 말했다.
“비켜.”
서후의 냉정한 발언에 나디르는 옆으로 비켜설 수밖에 없었다.
서후는 고통에 울부짖는 히밀코를 제단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여전히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히밀코는 서후가 자신을 어떻게 죽이려는지 직감하고 애원하다가 나중에는 저주를 퍼부었다.
“그 저주.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신들에게 가서 제발 좀 이뤄달라고 지껄여봐라. 직접 모습을 드러내면 더 좋고. 혹시 아나? 이 모든 일을 주관한 네가 직접 가면 들어줄지도 모르지.”
서후는 그 말과 함께 히밀코를 번쩍 들어서 불길 가운데 집어 던졌다.
“크아아악!”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지자 그 모습을 지켜본 모두가 두려운 표정으로 서후를 바라봤다.
서후의 뒤를 따르던 나디르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다시 그에게 말했다.
“설마.. 모두를 그렇게 죽일 셈인가?”
나디르의 말에 서후는 무심한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보며 일갈했다.
“왜 아주 거한 제물을 바치지 않았나? 다시 하하호호 웃으면서 난교질이라도 하지. 뭘 그렇게 두려워하지?”
“테세우스. 지금도 충분히 위험한 상황이다. 로마는 이 일에 관여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너는 바알과 타니트를 섬기는 자들 전부를 적으로 돌린 것이나 다름없다. 그걸 정녕 모르겠나?”
“내가 죽든 그들이 죽든 둘 중 하나겠지.”
“테세우스!”
‘미친 세상. 미친 세상이다. 제길. 덩달아 나도 미친 건가.’
서후는 얼굴에 튄 피를 오른손으로 훔쳐내며 나디르에게 말했다.
“배로 돌아가겠다. 이 일로 무슨 이득을 취하든 내 알 바 아니니 남은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
카르타고에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기회이니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도 없었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정말로 모두를 불에 태워 죽일 기세였다. 그래선 여러모로 곤란했다. 여러모로 말이다. 나디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에게 대답했다.
“그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