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30. 정의의 대가.
30.
서후는 말없이 허리춤에 찬 두 자루의 단검을 검집에서 뽑았다.
스르릉
그러자 사내들이 서후를 크게 비웃었다.
“하하하. 꼬마야. 다치기 전에 그 칼 집어넣어라.”
저들이 비웃는 가운데 네르마가 말했다.
“일을 길게 끌어서 좋을 게 없다. 우티카에 가봐야 하니 서둘러라.”
도시에 자경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무법천지나 다름없었다. 카르타고는 로마와 달리 군조직을 주로 용병으로 사용했기에 카르타고가 멸망한 뒤에도 무력조직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당시에는 용병이었지만 뿔뿔이 흩어졌던 저들은 카르타고로 돌아와 범죄자가 되었고 결국 카르타고는 범죄자들의 온상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이 일대 아프리카 지역의 수도였다. 때문에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로마는 카르타고 대신 다른 지역을 주요거점으로 삼았는데 그 지역은 바로 로마의 동맹도시국가 우티카(Utica, 카르타고 북부와 히포 디아르흐투스 남쪽에 사이에 위치)였다.
우티카는 카르타고와 경쟁 관계로 있던 도시였으나 그 뿌리는 푸뉘쿠스(punicus, 페니키아)인으로 동일했다. 페니키아(Phœnicia) 문명은 고대 가나안 북쪽(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부근)에 자리 잡은 문명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중해 문명과 연계된 문명이었다. 로마인들이 후에 이쪽 지역을 페니키아라고 규정한 것이라 페니키아인들이 단일민족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티카는 페니키아인들의 북아프리카, 첫 식민지였다. 카르타고보다 먼저 세워졌다는 뜻이다.
그러자 카시안과 대화를 나눴던 우락부락한 사내가 징글징글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으흐흐. 들었냐? 우리 두목이 얼른 끝내란다. 길어져 봐야 너도 좋을 게 없다. 그 어여쁜 칼은 내려놓고 얼른 내 품으로 들어오는 게 어떻겠냐? 크흐흐. 그래. 그래 이리 오련. 이리.. 커걱”
서후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놈이 자신의 팔을 잡아채려고 하는 순간, 서후는 자신의 팔을 잡아채느라 자세가 무너진 놈의 목줄기를 단검으로 가차 없이 베어버렸다.
촤아아악
수많은 피가 사내의 목에 피어올랐고 사내는 피거품을 입에 물고 뭐라 중얼거리려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커.. 커걱. 그르르르”
털썩.
그 모습에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서후와 쓰러진 사내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이.. 핏덩어리 새끼가?”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부류의 반응은 판에 박힌 것만큼이나 동일했다.
서후는 저들과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목을 벤 사내가 미처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바닥에 박차고 카시안이라는 사내에게 쇄도했다.
그러나 카시안은 어느새 검을 뽑아 서후를 향해 휘둘렀다.
슈아아악
실력도 없이 입만 나불거리는 사내는 아닌 모양인지 제법 매서운 공격이었다. 그래도 갑판장쯤 되면 아무나하고 만남을 가질 직위는 아닌데 도케인은 카시안과 자주 만났었다. 사람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사람과 오래, 그리고 자주 만나려 하지 않는다. 그게 일반적이다. 다시 말해 카시안과의 만남이 도케인에게도 이득이 되는 부분이 있었기에 자주 만났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의 공격이 아무리 매섭더라도 서후의 옷자락 하나 벨 수 없었다. 서후는 가볍게 그의 공격을 피해내고 내지른 그의 오른손을 잘라버렸다.
촤아아악
신체 일부분을 단번에 잘라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관절과 관절 사이를 정확하게 가르거나 살과 뼈를 모조리 갈라버릴 수 있는 강한 힘이 필요했다.
그러나 서후는 너무나 수월하게 카시안의 오른손을 잘라버렸다. 소년의 육체지만 이미 어지간한 성인보다 강한 힘을 지녔고 인간을 베는 경험은 수도 없이 행한 일이다. 리처드 1세의 경우엔 두 자루의 덴마크제 도끼로 두개골을 빠개버리는 걸 선호했지만.. 더 말해 무엇하랴?
“크아아악”
카시안은 피가 치솟는 오른 손목을 왼손으로 붙잡으며 고통에 울부짖었다. 그러나 서후는 냉정한 표정으로 이번에는 그의 두 발목을 끊어놓았다.
싹둑.
“크허헉. 크아아아악!”
발목 하나는 완전히 날아갔고 하나는 반쯤 잘린 채로 너덜거렸다. 잔혹한 광경이었다. 두 발목에서 피가 연신 흘러나와 금세 바닥을 흥건하게 만들었다. 지탱할 발이 없는 카시안은 더욱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이 새끼! 이 새끼!! 죽여버릴꺼야! 죽여버릴꺼야! 이 새끼 죽여! 죽이라고!”
악독에 찬 말을 연신 뱉었지만 두 발과 팔이 잘린 카시안이 서후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 수 있을까? 그건 그의 육신이 온전할 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서후는 차가운 시선으로 남은 사내들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네르마가 식은땀을 흘리며 서후에게 말했다.
“어.. 어이. 우린 이대로 물러나지. 더 이상 너와 싸울 마음이 없다.”
“싸우고 안 싸우고는 내가 정한다.”
“우.. 우린 카르타고의 그림자회 소속이다. 일이 이 이상 커지면 너도 좋을 게 없어!”
네르마가 서둘러 서후를 처리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암흑가 연합회에 이 일이 알려지면 번외소득을 바쳐야 했기 때문이다. 소득도 소득이지만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의뢰를 받았음에도 알리지 않았으니 징계가 내려올 수도 있기에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자 했다.
그러나 피가 튀고 죽은 사람이 발생한 이상, 저들의 눈을 피하기는 글렀다. 물론 네르마가 지금 염려하는 건 연합회에서 내려올 징계 따위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피리릭
푸욱
“커어억!”
서후는 들고 있던 검을 던져 주춤거리고 서 있던 한 사내의 가슴에 검을 박아넣었다. 사내는 단말마와 함께 그대로 절명했다. 하필 박힌 곳이 심장이었기 때문이다. 네르마는 놀란 표정으로 죽은 자신의 수하를 바라봤지만 서후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네놈들 같은 쓰레기들이라면 수십 트럭이 몰려와도 두렵지 않다. 살인기술로 단련된 정예병들도 무 베어 넘기듯 쓸어버리고 다니던 자가 항우고 리처드다. 뒷골목 깡패들? 군기도 없고 의리도 없다. 압도적인 힘과 공포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자들에 불과하다. 서후가 꺼리는 적들은 신념 앞에 자신의 목숨도 초개처럼 버리는 자들이지, 자신의 탐욕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다.
그런 서후의 태도에 네르마는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그림자회의 이름이 먹히지 않는다면 둘 중 하나다. 그들이 누군지 모르거나 그들조차 염두에 두지 않는 자. 지금 상황에선 둘 다 자신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 그 끝은 결국 모두 자신의 죽음으로 귀결될 테니까.
“자.. 잠깐! 지.. 진정하고. 무.. 뭘 원하지? 돈? 여자? 너도 그런 걸 원하고 카르타고에 상륙한 것 아닌가? 내.. 내가 제공하지. 너와 원한 맺은 카시안은 네 손안에 있고 네게 무례하게 대한 수하들도 이미 네 손에 죽지 않았나? 나는 이 이상 너와 연관되고 싶지 않다. 더욱이 넌 나디르와 연관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러니 이 일은 이쯤에서 덮자! 어.. 어때?”
“네.. 네르마 이 새끼야! 저 새끼를 죽여! 죽이라고!”
그러자 카시안이 통한에 찬 표정으로 네르마에게 소리쳤다.
“병신새끼! 적이 어떤 사람인지는 파악하고 일을 벌였어야지. 카시안! 저 소년이 널 죽이지 않으면 내가 널 잘근잘근 씹어먹을 거다.”
한바탕 카시안에게 분노를 퍼부은 뒤 네르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봐. 네게는 원한이 없다. 있다면 저 멍청한 새끼한테 있을 뿐이지.”
서후는 네르마의 말에 수긍되는 부분이 있었다. 살심을 품게 만들었던 놈들은 이미 죽거나 죽을 운명에 놓였다. 어차피 저런 부류를 쓸어버려 봐야 결국엔 비슷한 놈들이 또 튀어나온다.
‘내가 이곳을 다스릴 것도 아니고.. 이 이상 일을 크게 벌리면 나디르에게도 좋지 않겠지.’
속에서는 모조리 죽이라는 감정이 들끓었지만 서후는 냉정하게 그 감정을 억눌렀다. 하지만 그전에 확인할 것이 하나 있었다.
“제물. 제물로 바친다고 했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그.. 그건?”
서후의 눈에 다시 진한 살의가 감도는 것을 느낀 네르마는 더 머뭇거리지 않고 서후에게 대답했다.
“바알(Baal, 고대가나안의 풍요와 폭풍우의 남성신)과 타니트(Tanit, 카르타고 최고신, 달의 여신)에게 바치는 제.. 제물을 말한 거다.”
‘······. 역시 인신공양인가?’
인신공희(人身供犧)는 신에게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을 뜻한다. 이들은 서후를 욕보인 것으로도 모자라 제물로 바쳐 죽이려고 한 것이다.
서후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필요를 못 느꼈다. 차가운 표정의 서후가 네르마에게 걸어가자 네르마가 뒷걸음치며 소리쳤다. 살아남은 세 명의 수하들도 함께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어린아이를 상대로 성인 남자 네 명이 도망치는 모습이라니 이 얼마나 우스운가? 그러나 뒷걸음치는 당사자들은 결코 웃을 수 없었다. 그 어린아이의 손에 자신들의 목숨이 달려있다는 걸 절절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 카르타고인들이 하던 제사다! 우.. 우린 카.. 카르타고인의 망령과 이 땅의 신들을 노하지 않게 하려고..”
“우리?”
서후가 반문하자 네르마가 소리쳤다.
“그.. 그래 우리! 그림자회 말이다.”
서후는 차가워지다 못해 얼음장 같아진 얼굴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더 듣고 있으면 귀가 썩을 것 같군.”
하지만 그 소리는 네르마 등에게 천둥보다 크게 들렸다.
“이익.. 이.. 이 새끼가 진짜! 뭐해? 새끼들아. 죽여!”
“으아아!”
“죽어라!”
그러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던 사내들이 돌변하여 괴성을 지르며 서후에게 달려들었다.
전투할 때 육체가 작다는 건 확실히 단점이지만 장점이 없진 않다. 적이 노릴 만한 타격 부위가 그만큼 좁다는 뜻이니까. 일반적이라면 그런 이점이 전투에서 활용되기 어렵지만 서후는 그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고도 남을 만한 경험을 지녔다.
더욱이 사자의 앞발 공격도 근거리에서 모조리 피한 서후거늘, 깡패들의 눈먼 칼 따위에 맞을 리가 없었다.
서후는 이리저리 저들의 공격을 피하며 저들의 육체를 무참하게 갈라버렸다. 육체가 갈라질 때마다 저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지만 죽이기로 마음먹은 자들의 비명이 서후의 마음을 어지럽힐 수는 없었다.
“사.. 살려줘. 제.. 제발.”
자신의 피가 잔뜩 묻은 손으로 서후의 팔을 힘없이 붙잡은 네르마를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그의 목구멍에 차가운 단검을 밀어 넣었다.
크르르륵
그리곤 다량의 피를 쏟아 죽어가는 카시안을 바라봤다. 카시안은 피를 너무 많이 쏟아 정신이 혼미한 중에서도 서후의 맹렬한 살의를 느끼고 두려움에 떨었다.
“네놈한테는 물을 게 많다. 그러니 묻는 대로 대답해라.”
카시안은 침을 꼴깍 삼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자신이 죽음의 사신을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미련하게도 죽을 때가 돼서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