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27. 금화를 든 소년.
27.
“으.. 어디 하수도라도 헤치고 나온 거요?”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가 코를 틀어막으며 나디르에게 말했다.
“맞아.”
“음? 야경꾼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더니 설마? 걸린 거요?”
“그건 아니고. 뭐 비슷할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오늘부터 우리 동료가 될 사람이다. 이름은 테세우스고 한 사람 몫은 충분히 하고도 남을 거다.”
도케인은 서후를 위아래로 살피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 대장이 어련히 알아서 판단했겠냐만 이렇게 어려서야 노잡이도 못 합니다. 무엇보다 믿을 수는 있는 놈입니까?”
“야경꾼들이 야밤에 설치는 이유가 바로 이 소년 때문이다.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출항할 준비해.”
“지금은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입니다. 육지와 가까운 근해라 암초도 많을 테고요. 아시지 않습니까?”
“기다렸다가 새벽에 출항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항구가 봉쇄될 우려가 있다. 비단 이 소년 때문이 아니라 항구가 봉쇄되고 배를 수색하기 시작하면 우리로서도 좋을 것이 없어.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나디르의 말에 도케인은 다시 서후를 바라봤다. 피와 오물로 뒤덮여 있는 모습 가운데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가서 애들 깨워. 출항이다.”
도케인은 옆에 선 수하에게 적당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
해적들의 갤리선이 빠른 속도로 지중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있었기에 노잡이나 전투 병력 모두 편안한 자세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말했지만 이 시대 노잡이는 매우 중요한 전략자원이었기에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고 전투병력이든 노잡이든 동등한 지위를 구가하고 있었다. 교대가 가능하다는 점에도 해적 실정상 모두가 노잡이이자 전투병력이기도 했다. 물론 각 분야를 전담하고 있는 인원도 있었지만 그것까지 신경쓰기엔 서후의 심신이 너무 지쳐있었다.
“먹어라.”
나디르가 꿀을 바른 포카치아와 치즈, 제법 신선한 고기를 가져왔다. 서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고마움을 표하고 정신없이 그것을 먹었다. 포카치아(focaccia)는 밀가루와 누룩을 넣고 납작하게 구운 빵이었다. 반죽에 올리브유와 소금을 첨가하기도 했는데 너무 시장했기에 맛을 음미하며 먹을 정신은 없었고 당연히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으적 으적
서후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디르가 입을 열었다.
“천천히 먹어라. 부족하면 더 이야기하고.”
보급품을 채운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서후를 받아들이며 많은 금화도 얻었기에 이 정도 호의는 얼마든지 보일 수 있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나디르는 지난밤의 전투를 떠올렸다. 자신이 본 테세우스라는 소년은 그야말로 마르스가 따로 없었다. 표범, 사자를 잡았다고? 이젠 믿지 못할 것도 없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어린 나이에 그만한 전투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동료로 삼기 위해서라면 지금보다 더한 호의를 보일 용의도 있었다.
“갈 곳은 있나?”
‘갈 곳이라.. 그런 게 있을 리가. 그나저나 맛있군.’
시장이 반찬이라더니.. 정말 별 것 아닌 음식들인데 서후는 나디르가 건넨 음식이 상당히 맛있었다.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기와 치즈를 베어 물고 우물거리던 서후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어 의사를 표시했다. 그 모습에 나디르가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서후에게 입을 열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 근방의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데냐 모두 로마의 속주다. 카르타고 역시 마찬가지. 어떤 일로 야경꾼들이 널 쫓는지는 모르겠지만..”
“백 아우레우스를 훔쳤다는 누명을 썼다. 하지만 그건 정당한 거래였다.”
“정당한 거래라. 증명할 수 없다면 그건 누명이라 할 수 없다. 로마의 수많은 노예들도 자국에선 자유롭게 삶을 살아가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노예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 로마시민이었던 자들도 있을지 모르지. 그래서 뭐?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면 노예는 노예일 뿐이다.”
“증명. 증명이라..”
서후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슨 수로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데메트리우스는 로마시민이고 폼페이의 집정관을 움직일 정도로 재물이 많은 자다. 또한 모든 정황이 자신에게 불리하다. 루디스를 얻은 이상, 검투사 계약은 별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백 아우레우스는 검투사에서 막 풀려난 소년이 지니기엔 너무 큰 액수다.
시민이 아닌 이상 법정에 자신을 세우지도 않겠지만 법정에 선다고 해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소리다.
“결국 너는 백 아우레우스를 훔친 도둑으로 기록될 테고 그것이 로마가 너를 바라보는 전부가 될 것이다.”
나디르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자신에게 왜 꺼내는 것이란 말인가?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우리와 함께하자.”
“도둑으로 몰렸으니 정말 도둑이 되라? 도둑이 아니겠군. 강도겠어.”
“우리가 강도라면 모두가 강도다. 그중에서도 로마인들이 가장 큰 도적놈들이지. 점령하고 죽이고 약탈하고 노예로 삼고. 뭐가 다르지? 우리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
고대 해양민족은 약탈경제를 기반으로 했다. 따라서 해적은 그전에도 암약했지만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막강한 세력으로 변모한다. 그것엔 두 가지 이유가 존재했다. 당시 바다를 장악했던 셀레우코스 제국의 몰락과 로마에서 라티푼디아(latifundia, 대규모 농장)를 운영하기 위해 많은 노예를 필요로 했다는 점이다.
해적질을 비공식적으로 허가했다는 소리다. 실례로 기원전 104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지휘를 받은 해군이 해적을 토벌하러 출병했지만 실제로 토벌하지는 않았다.
해적들은 주로 느린 무역선을 습격해 승무원들을 노예로 삼았으며 이집트에서 로마로 운송되는 곡물선을 가장 선호했다. 포로는 대개 노예무역의 중심인 델로스(Delos, 에게해에 위치) 섬으로 데려왔으며 하루에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팔려나가기도 했다. 예상했다시피 주요고객은 로마인이었다.
나디르는 바로 이 점을 말하는 것이었다.
해적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상황에 인간의 도리와 도덕 따위를 운운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서후는 이 상황이 매우 씁쓸했다.
“생각해보지.”
“뭐 생각할 시간은 많을 테니.. 강요하지는 않아. 원한다면 카르타고에라도 내려주지. 어차피 보급하기 위해서 잠시 들릴 필요도 있고.”
서후는 문득 이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해졌다.
“이 배는 어디로 향하는 거지?”
“우리들이야 어디든 돌아다니지만 크게 융성한 지역은 두 지역이다. 크레타(Crete)와 피티우사 제도(현 발레아레스 제도) 말이다. 크레타 쪽엔 껄끄러운 놈들이 많아서 우리는 주로 피티우사에서 활동하는 편이다. 히스파니아(Hispania, 스페인 등을 포함한 이베리아반도) 부근이라고 하면 알겠나? 물론 히스파니아의 바에티카(Baetica, 안달루시아)는 로마의 속주지만 지금 이곳의 총독이 술라의 적이라 사실상 반군인 셈이지. 덕분에 활동하기도 훨씬 편하고 말이야.”
‘반군?’
서후는 반군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콱 박혔다.
“그 총독의 이름이?”
나디르는 서후를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허튼 생각은 않는 게 좋아. 내전의 승리자는 누가 뭐래도 술라야. 갈리아의 암브로네스 족과 테우토네스 족 10만을 단 천명의 사상자만 내고 무참히 도륙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도 결국 술라의 행운을 막지 못했어. 로마시민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도 술라와 싸우려다 일리리아(Illyria, 발칸반도 서부)에서 폭동으로 사망했지.”
당시 로마를 향해 진격한 만행과 독단적인 법안에 로마시민은 술라에 대해 분노했고 그로 인해 마리우스의 지지자이자 민중파였던 킨나가 집정관에 당선될 수 있었다.
서후는 나디르에게 말했다.
“로마에 대해서 잘 아는군.”
“많은 걸 알 필요는 없지만 누가 권력을 잡았는지 그 권력자가 누구와 적인지 정도는 파악하고 있는 게 신상에 이로워. 그뿐이다.”
서후는 갤리선이 바다를 가로지르며 일으키는 포말을 쳐다봤다. 돛은 바람을 받아 팽팽하게 펼쳐져 있었고 배는 그것을 추진력 삼아 미끄러지듯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그런가? 나디르. 하나만 질문하지. 이 배가 언제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무슨 뜻이지?”
“모든 배는 항구가 필요해. 영원히 항해할 수 있는 배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아무 곳에나 정박할 수는 없지. 확인해봐야지. 그곳이 안전한지 아닌지 정박할 수 있는지 없는지 말이야. 그래서 알아본 것 아닌가?”
황당한 일이다.
“허.. 허. 놀랍군. 그래서 지금 반군에 가담하겠다?”
“정해진 건 없다. 하지만 망망대해를 정처 없어 떠도는 삶보다는 명확하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나디르 당신이 그런 것들을 알아볼 필요도 없었겠지.”
방금의 말로 나디르는 확신했다. 그가 어리다고 해서 자신의 손안에 넣고 굴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따라서 궁금해졌다. 서후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말이다.
“그자의 이름은 세르토리우스. 현재 히스파니아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