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1화 (21/298)

# 21

21. 전설의 시작.

21.

“크허허헝”

수사자는 자신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울부짖었다. 원초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섬뜩한 소음이었다.

수사자는 자신의 공격을 피한 서후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기회를 노렸다.

“크르르르”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놈이 잔뜩 성이 났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극도로 위험한 상황이다. 사자의 공격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반사신경을 지녔다는 것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위험한 상황이다. 한 번이라도 공격을 허용한다면 그 즉시 뼈째로 놈의 이빨과 발톱에 으스러져 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서후는 이 극한의 위기 앞에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희열을 다시금 느꼈다. 두려워해야 정상인데 이 사실이 오히려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때문에 긴박한 생사의 간극 앞에 서후는 웃었다. 서후의 무장은 여전히 천으로 덧댄 각반이 전부였기에 그런 서후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던 관중들은 그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

많은 경기를 봐왔지만 승리를 거두지도 않은 상황에서, 더욱이 압도적인 적을 앞에 두고 웃음을 터트리는 검투사는 없었다. 누구도 저 상황에서 웃음을 짓지 못하리라.

하지만 저건 분명 전투를 즐기는 자의 모습이었다.

“우.. 웃어? 내가 잘못 본 건가? 미.. 미쳤다. 저놈은.”

“헤.. 헤르쿨레스의 재래(再來)..”

그 모습에 놀란 관중들이 웅성웅성거렸다. 데메트리우스도 그런 서후의 모습을 봤다. 데메트리우스는 등골이 서늘했다. 저런 상황에서 미소를 짓는다고? 둘 중 하나다. 극한의 상황에 놈이 미쳤거나 지금의 상황을 즐기고 있거나.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미친 자가 보이는 행동양상은 거의 정해져 있다. 저건 실성한 자가 보이는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맹수가 먹잇감을 대하는 포식자의 눈빛이다.

자신이 과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데메트리우스는 그런 서후의 모습에 술라가 정적들을 무참히 살해하며 지었던 표정이 떠올랐다. 지금 서후의 표정은 모든 적을 정복하며 미소지었던 술라의 그것과 비슷해 보였다.

자연히 손에는 땀이 차고 등에서도 식은땀이 흘렀다. 죽여라. 놈을 죽여라. 데메트리우스는 땅을 박차고 서후를 향해 짓쳐 드는 수사자를 향해 강하게 염원했다.

*

퉁 퉁 퉁

수사자의 육중한 체중이 땅의 진동을 타고 서후에게 전해졌다.

맞바람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기와 물결치듯 꿈틀거리는 수사자의 근육이 서후의 눈에 들어왔다.

그건 마치 거대한 산이 자신을 덮치는 것 같았다. 그 거대한 산을 낡은 철검 한 자루로 가르려고 하는 것이 바로 서후 자신의 모습이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우공이라. 하지만 결국 그 우직한 늙은이는 자신이 옮길 수 없는 산을 옮겼다. 보다 정확하게는 그 우직함에 산이 두려워서 도망쳤다.

하물며 자신은 늙은 노인도 아니며 눈앞에 달려오는 사자가 거대한 산도 아니다.

서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글라디우스를 고쳐 잡았다.

맞다. 수사자와 달리 자신에겐 놈을 일격에 죽일 만한 능력이 없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은 놈이 될 것이며 두려움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놈의 것이다.

“크허헝”

다시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수사자의 공격에 서후는 급히 몸을 옆으로 틀어 피했다. 몸을 피하자마자 이어지는 수사자의 앞발 공격에 서후는 모골이 송연했지만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다시 몸을 숙여 아슬아슬하게 앞발 공격을 피해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지금껏 누가 사자 앞에서 저런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었던가? 사자와의 대결은 대부분은 한순간에 결정되었다. 운이 좋아 사자의 목에나 머리에 창이 박혀서 살아남는 경우, 하지만 대부분은 사자의 이빨이나 발톱에 온몸이 찢겨나갈 뿐이었다.

“와아아아아”

“와아아”

“테세우스! 테세우스!”

성난 파도가 치듯 관중들의 함성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뻔한 스토리를 좋아하는 관중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예상과 벗어나는 일이 발생했을 때 관객들은 환호한다. 검투장에 모인 관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서후가 이토록 선전할 것이라 예상한 자가 없었다. 게다가 이런 광경이라니.. 서후에게 돈을 걸지 않은 관중들도 미친 듯이 서후의 이름을 외쳤다.

그들의 환호와 별개로 사자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수사자는 다시 서후에게 성큼 다가서며 앞발을 거세게 휘둘렀다.

붕 부붕

앞발에 실린 힘이 얼마나 매서운지를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이 전해줬다. 그러나 서후는 눈 하나 깜작하지 않고 그 모든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실로 미친 움직임이었다.

‘민첩함이나 반사신경이 놈에게 뒤처지지 않는다고 해서 체력마저 놈과 비등한 것은 아니다.’

여름철 뜨거운 뙤약볕 아래 거칠게 움직이고 있으니 자신은 물론 수사자도 체력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나보다 놈의 체력이 더 빠르게 소모되고 있지만..’

무엇이든 거저 주어지는 건 없다. 거대한 체구를 지닌 만큼 수사자의 체력이 상대적으로 서후보다 빨리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체력 자체가 달랐다. 놈의 체력이 다 하기 전에 서후의 체력이 고갈되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다.

‘설혹 놈의 체력이 모두 고갈된다 해도 여전히 수사자는 수사자다.’

체력이 고갈되었다고 해서 수사자의 이빨과 발톱이 어디로 사라지겠는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대로 피하기만 해서는 답이 없다. 이렇게 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크와아아앙”

글라디우스로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는지라 수사자는 섣불리 자신의 머리를 서후에게 들이밀지 않았다. 자신의 왼눈을 잃은 수사자는 이 작은 인간이 가진 발톱이 얼마나 매서운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아주 사납고 매섭게 공격하고 있었기에 누구도 수사자가 서후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서후는 알았다. 놈이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말하지 않았던가? 우공이 산을 옮긴 것이 아니다. 두려움에 휩싸인 산이 우공에게서 도망친 것이다.

‘위험하지만 그나마 체력이 더 남아있을 때 시도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자는 사족보행 동물이다. 앞발을 들어 공격하는 건 사자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고 앞발을 계속 휘둘렀다고 해서 곰처럼 두 발로 일어선 채로 앞발을 휘두른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앞발을 휘두르고 다시 땅을 딛고 방향을 바꾸는 일이 지속적으로 벌어졌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사자가 휘두르는 앞발의 궤적을 서후가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기묘하게 피해내자 수사자는 다시 바닥에 앞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다시 서후를 공격하려고 했다. 수사자가 더욱 경계할 수밖에 없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수사자는 마치 허공에 발을 휘두르는 느낌이었다.

놀라기는 관중들이 더했다. 어떻게 초근접전에서 사자가 휘두르는 앞발을 단 한 번도 맞지 않고 모조리 피해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들이 더욱 경악할만한 일이 막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서후는 공중에 뜬 수사자의 앞발이 지면에서 떨어지자마자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어어엉”

그러자 수사자가 화들짝 놀라며 서후를 물어뜯었다. 실로 맹수다운 반응이었지만 모든 것을 계산하고 움직이는 서후가 수사자의 뻔한 공격에 당할 리 만무했다. 그런 수사자의 행동조차도 서후가 이끌어낸 반응이었다.

서후는 모든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단 한 번이다. 결국 그 단 한 번에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된다. 모든 훈련과 모든 계획은 그 단 한 번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셈이다.

콰드드득

놈의 무시무시한 아가리가 코앞에서 닫혔다. 섬뜩한 순간이다.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자신의 머리는 잘 으스러진 호두알처럼 변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코앞이다. 놈의 뜨거운 숨결과 악취가 강하게 코를 찔렀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이 서후가 바라던 그 순간이었다.

서후는 들고 있던 글라디우스를 그대로 놈의 오른쪽 눈에 박아넣었다.

콰직

“크허허허헝!”

“크흑!”

수사자는 고통에 풀쩍 뛰면서 앞발을 거세게 휘둘렀고 서후가 급히 피한다고 피했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해 가슴에 발톱 자국을 선명히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서후의 가슴팍이 너덜너덜해졌다. 스쳤는데도 이 정도였으니 조금만 더 깊었다면 즉사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소년의 연약한 육체도 한몫했다.

“뭐.. 뭐?”

“와.. 와아아아아아”

“죽여라! 죽여라!”

“사자를 죽여라!”

“미.. 미친. 저런 상황에 사자의 눈에 글라디우스를 박아 넣었다고?”

“테.. 테세우스!!”

“꺄아아악! 사랑해요!!”

자신의 젖가슴을 드러내거나 욕설을 뱉는 등 과격한 표현으로 자신의 놀라움을 드러내는 관중도 상당히 많았다. 그만큼 서후가 보여준 광경이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두 눈을 잃기는 했지만 수사자는 수사자다. 아직 놈에게는 발톱과 이빨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더욱이 두 눈을 빼앗은 대가로 서후 역시 가슴에 꽤 깊은 상처를 입었다.

계속해서 싸운다면 승리의 여신이 어느 쪽에 손을 들어줄지 예상할 수 없는 상황, 그러나 두 눈을 잃은 수사자는 이미 커다란 두려움에 질렸다.

그것으로 승부는 끝났다.

절그럭.

서후가 가슴에서 흘러내린 피와 수사자에게 튄 피 등으로 피투성이가 된 팔로 글라디우스를 주워들었다.

“이 가련하고 비참한 전투를 이제는 끝내자.”

그러나 수사자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모양인지 꼴사납게 뒤를 보이고 도망치지는 않았다.

“크허허허헝”

죽어도 서후를 죽이고 죽겠다는 듯 모든 신경을 서후가 움직이는 소리에 집중했다.

탁 탁 탁 탁

이윽고 자신을 이 모양으로 만든 작은 인간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수사자는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촤아아아악

그리고 그 순간, 사방으로 엄청난 피가 비산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연약한 뱃가죽을 뚫고 내부장기가 흙바닥에 형편없이 나뒹굴었다.

쿠우우웅

수사자가 소리에 반응해 몸을 날리는 순간, 서후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숙여 사자의 뱃가죽을 글라디우스로 갈라버린 뒤 몸을 굴려 피했다. 그 결과 수사자는 배가 갈라진 채 그대로 흙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크르르르. 크르.”

서후는 끔찍한 고통에 거칠게 숨을 내쉬는 수사자에게 다가갔다.

사방에서는 환호와 고함소리가 미친 듯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서후는 고요한 눈으로 수사자를 내려다보다가 수사자의 목에 있는 힘껏 글라디우스를 박아넣었다.

푸우우욱.

검이 박힌 자리에서 다시 피가 몽글몽글 솟아났고 수사자는 자신의 거대한 몸을 움찔거린 뒤 그대로 길고 긴 숨을 마지막으로 뱉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