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9화 (19/298)

# 19

19. 테세우스.

19.

그 많던 베스티아리이 중 살아남은 사람은 단 두 명에 불과했다. 물론 그들을 상대하던 맹수도 많이 죽었다.

하지만 그 두 명 중 한 명마저 안색이 파리하게 변한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팔이 맹수에게 뜯긴 모양인지 너덜너덜한 상처가 매우 심각했는데 의사는커녕 어린 소년만 덩그러니 그 앞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쿨럭 쿨럭

격하게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해낸 드왈드는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후에게 말을 꺼냈다.

“제길. 누가 누구에게 충고를 한 건지..”

드왈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서후를 바라봤다.

“그래도 고맙다. 홀로 쓸쓸하게 내버려두지 않아서.. 이렇게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허망하군.”

드왈드는 그간 자신이 살아온 삶과 자신의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 끝에 남는 건 지독한 허무와 후회였다.

“그간 쌓은 죄과(罪過)를 이렇게 받는 모양이야.. 그럼에도 홀로 쓸쓸히 죽지 않는 건 네게 보인 일말의 호의 때문이었나? 쓸데없는 오지랖이었지만 큭큭큭.”

드왈드는 파리한 안색으로 서후를 힘없이 바라봤다.

“너는.. 테세우스 너는 분명 영웅이 될 거다. 이래 봐도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쿨럭 쿨럭..”

드왈드는 다시 다량의 피를 입 밖으로 쏟아냈다.

“염치없지만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플루토(Pluto, 하데스)가 다스리는 세계의 아케론강을 건너려면 카론에게 뱃삯을 지불해야 한다고 하더군.”

첫 번째 동전은 아케론강에 던지고 두 번째 동전은 카론에게 지불한다는 그 신화말인가? 두 개의 동전을 지니고 저승 문턱에 다다르지만 결국엔 빈손으로 들어간다는 뜻을 내포한 신화가 아닌가 싶었다. 저승 문턱까지 두 개의 동전이라도 가지고 간다는 점이 아이러니지만 어차피 신화 아닌가?

그러나 서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화를 믿어서가 아니라 드왈드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드왈드는 다소 안심한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다행히 아케론강을 건널 수는 있겠구만.. 그게 사실이라면 말이야..”

드왈드는 그 말과 함께 미약하게 내뱉던 숨을 거두었다.

드왈드가 숨을 멎는 이 순간에도 경기장에서는 검투사들의 전투가 한창이었고 관중들은 검투사의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열광했다. 서후는 그들이 마치 꼭두각시 인형 같다는 생각을 했다.

‘치료만 잘했다면.. 최소한 지혈이라도 제대로 했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팔이 떨어져 나간 검투사를 어디에 쓴단 말인가? 도리어 치료비가 더 들 것 같으니 구석에 방치한 것이리라. 살아나면 어떻게든 사용하면 되고 죽으면 그냥 폐기 처분하면 되고. 그게 이 시대 노예의 현실이었다.

저벅 저벅.

그때 저 멀리서 한 사내가 서후에게 다가왔다. 도크트레 쿠리오였다.

“따라와라. 널 뵙고자 하는 분이 계신다.”

서후의 몸에는 미처 닦아내지 못한 피가 잔뜩 얼룩져 있었다. 당연히 대충 닦아낸 피가 찝찝했지만 샤워를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도 아니고 그런 신분도 아니었다.

*

도크트레 쿠리오는 어디서 그런 무예를 배웠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자신의 용건은 후에 풀어도 될 일이다. 때문에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서후를 안내하고 석상처럼 서 있었다.

“축하하네! 실로 놀랍더군. 아니 폼페이의 모든 시민이 자네로 인해 놀랐을 거야.”

데메트리우스가 활짝 웃으면서 서후에게 말했다.

‘이 자가 내가 살아남은 것을 축하해주려고 괜한 발걸음을 옮겼을 리는 없고..’

데메트리우스의 성품을 익히 알고 있는 서후는 고개 하나 까닥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데메트리우스는 역시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되도록 원한을 맺지 않는 것이 상책이고 원한을 맺었으면 서둘러 풀거나 원흉을 제거하는 것이 차선이다.

“그렇게 매서운 눈으로 바라볼 것 없네. 나는 제안을 했을 뿐이고 선택은 그대가 한 것이야.”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세 번의 검투시합. 그것으로 이 자와 사실상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자신을 찾아왔단 말인가?

서후의 질문에 데메트리우스가 자신의 노예 코락스에게 눈짓하자 그가 작은 점토판을 가져왔다.

“자네 계약일세. 세 번의 검투시합 후 모든 계약이 종결된다는 그 계약 말일세. 이제 두 번 남았군.”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계약판을 가져왔단 말인가? 서후가 차분하게 데메트리우스를 바라보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시합에 한 번 더 출전하면 두 번의 시합으로 한 것으로 여기고 또한 약속한 재물을 자네에게 지급하지. 어떤가?”

‘한 번 더 시합에 출전해라?’

하지만 서후는 미간을 좁혔을 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섣불리 감정을 드러내는 건 현명한 태도가 아니었다. 더욱이 철저한 을의 입장이 아닌가?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을이 아니라 병이나 정의 입장에 가까웠다. 오히려 그 말에 반응한 것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도크트레 쿠리오였다.

“무슨 뜻입니까? 설마 테세우스더러 오늘 당장 검투사와 경기를 치르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삼자는 빠지게. 나는 계약당사자와 이야기 중이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삼자라니요? 테세우스는 저희 검투단과 계약을 맺은 검투사입니다. 그의 일은 곧 저희의 일입니다.”

전과는 180도로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 이유는 서후에게서 엄청난 재능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10살 소년이 이 정도라면 조금 더 단련시키고 몸집을 키우면 폼페이, 카푸아, 네아폴리스, 로마 등을 비롯한 이탈리아 본국 전체를 아우르는 검투사로서 명성을 날릴 수 있다. 당연히 그 영광은 그가 속해 있는 검투단은 물론 그를 훈련한 자신에게도 주어진다.

“그가 노예신분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그는 자유민이다. 그러니 다시 한번 더 말하지. 삼자는 끼어들지 말게. 더 말하고 싶다면 자네 라니스타에게 가서 말하도록.”

쿠리오는 서늘한 데메트리우스의 눈빛에 살의가 숨어있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라니스타 페루사니와 이미 이야기가 끝난 것이라면 자신이 반발한다고 무마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못마땅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들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서후는 데메트리우스의 제안을 다각도로 검토했다.

검투사. 검투사를 어떤 로망이 있는 직업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검투사의 일생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로마 사회에 신분상승의 기회가 있기는 하나 검투사나 해방노예 등을 천대하는 풍토 역시 사회 깊숙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검투사로서 영광과 명예를 얻는다고 해도 결국 검투사 나부랭이에 불과하고 신분의 격차를 뛰어넘을 수도 없다.’

굳이 피의 굴레를 뒤집어써야 한다면 군인이라면 모를까? 일단 검투사는 아니다. 한계가 너무나 명확하고 넘어야 할 장벽도 너무나 많다. 그 장벽은 로마사회가 완전히 무너져야만 부술 수 있는 장벽에 가깝다.

‘물론 군인이 되고 싶지도 않지만.. 어쨌든 최대한 빨리 검투사란 굴레를 벗어던질 필요가 있다.’

승산이 없다면 자살행위에 불과하지만 검투사와의 대결은 맹수와 싸우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다. 저들이 노련하다고 하나 항우와 리처드의 전투기술에 비할 바랴? 사람을 죽이는 것이 꺼림칙할 수는 있지만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측면에서 표범을 죽이나 검투사를 죽이나 그 의미가 별로 달라질 것도 없다.

쿠리오가 데메트리우스의 제안을 반대했다고 해서 자신을 위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세 번이라는 항목 안에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기에 검투장에 머무는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다. 능력을 봤으니 어떻게든 그것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다.

데메트리우스 이 자의 제안에 화가 치민 것은 사실이나 달리 생각하면 좋은 기회나 다름없었다.

‘왜 나를 죽이려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이용해주마.’

“좋습니다. 단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서후의 대답에 쿠리오의 표정이 구겨졌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반면 데메트리우스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말해보게.”

“승리하면 재물을 준다고 했는데 그중 2 아스만 먼저 얻을 수 있겠습니까?”

“2 아스를? 어려울 것도 없지.”

데메트리우스는 의아해하면서도 코락스에게 눈짓해 서후에게 2 아스를 주게 했다. 2 아스를 받은 서후는 쿠리오에게 그것을 건네주며 간단하게 말했다.

“드왈드 뱃삯.”

‘약속은 지켰다. 드왈드.’

쿠리오가 묘한 눈빛으로 서후를 바라봤으나 서후는 다시 데메트리우스에게 말했다.

“마찬가지로 나머지 받을 돈 전부 제게 걸어주십시오. 그게 제 조건입니다.”

데메트리우스 입장에선 잃을 것이 없다. 아주 흥미로운 경기를 다시 주관하게 되었으니 승패와 관련 없이 이득일뿐더러 자신은 그가 죽는다는 쪽에 더 많은 돈을 걸면 된다. 따라서 데메트리우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허허허. 좋아. 그리하지. 그건 어려울 것이 없네. 조건은 그게 전부인가?”

그러자 도크트레 쿠리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이건 너무 과합니다. 표범에게 살아남은 소년을 다시 검투사와 싸우게 하다니요? 테세우스 너도 다시 생각해봐라. 이건 자살..”

그러자 데메트리우스가 진한 미소를 지으며 무슨 소리냐는 듯 반문했다.

“검투사? 무슨 소리인가? 관중들은 표범을 무찌른 테세우스가 수사자를 상대로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해하고 있거늘.”

검투사가 아니라 사자라고? 그것도 수사자? 쿠리오는 더욱 황당한 표정으로 데메트리우스를 바라보다가 서후에게 말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챙그랑

그러나 서후는 무심한 눈으로 계약이 적힌 점토판을 바닥에 던져서 깨뜨렸다. 데메트리우스는 진한 웃음을 지으며 그런 서후를 바라볼 뿐이었다. 제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수사자를 상대로 살아남을 수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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