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18. 테세우스.
18.
푸우우욱
둔탁한 소음과 함께 삐죽한 창두가 판테의 입을 그대로 통과해 피와 뇌수가 묻은 자신의 몸을 다시 밖으로 드러냈다.
“커커걱 크르륵.”
쿵
판테는 피 가래 끊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통제를 잃은 육중한 체구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자유낙하 하자 그 충격으로 강한 진동이 지면을 울렸다.
그러나 그 광경은 단순히 땅만 울린 게 아니었다. 판테의 몸이 바닥에 떨어져 형편없이 나뒹구는 순간 관중들의 심장은 흥분으로 터질 것처럼 약동했다.
“우... 우와아아아아!”
“와아아아!”
“마.. 말도 안돼! 저 거대한 표범을 저리도 간단하게? 저.. 저놈 이름이 뭐라고?”
이름을 물을 것도 없었다. 이미 여기저기서 서후의 이름이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테세우스!”
“테세우스!”
여기저기서 관중들이 열광하며 테세우스를 외쳤다.
*
서후는 사후경직으로 인해 간헐적으로 몸을 떨고 있는 거대한 몸집의 표범을 바라봤다. 자신의 피와 뇌수로 인해 처참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세상이다. 죽이지 않았다면 지금도 피를 꾸역꾸역 뱉어내고 있는 놈의 아가리에 처참하게 씹혀 결국 한 끼 식사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러니 서후의 시선에 동정심이라곤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다.
‘아슬아슬했다.’
서후는 방금 전에 일어난 전투를 차근히 상기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더 시간을 끌었다면 자신의 체력이 받쳐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실수하는 척하며 놈에게 약점을 내보였다.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월등했다. 체력과 힘, 날카로운 발톱, 검투장의 경험까지. 사람의 공격을 많이 겪어본 놈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첫 공격을 그렇게 간단하게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땅을 오롯이 밟고 서 있는 자는 상대적 약자였던 자신이다.
‘생존하려면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생존법칙 제1의 법칙, 결코 오만해선 안 된다. 강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반드시 고꾸라진다. 강자는 강하기에 준비하지 않고 강하기에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약자의 시선으로 언제든지 놈처럼 뒈질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서후가 이리 되뇌는 것은 살육의 희열감이 자신을 덮으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지만 서후는 마치 그것이 항우의 망령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와아아아아”
우레같은 함성이 자신에게 쏟아졌지만 서후는 그 사실이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표범 한 마리를 죽이고 살아남았을 뿐이다. 저들이 주는 환호와 저들이 주는 영예는 역겨운 피로 만든 왕관일 뿐이다.
하지만 서후는 지금 자신이 취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어떤 행동이 자신에게 더 이득인지 말이다.
서후는 머리를 뚫고 나온 창두 부분을 발로 차서 부러뜨렸다.
콰직
그런 뒤 창자루와 분리된 창두를 다시 표범의 목에 가져가 사정없이 박아넣었다.
푹 푸푹 푹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지만 서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표범의 모가지에 창두를 찔러넣었다. 당연히 판테의 목은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졌다. 서후의 그런 광기 어린 모습에 관중들은 환호성을 지르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콰득 콰득
잠시 뒤 서후는 표범의 머리와 몸통을 완전히 분리했다. 그런 뒤 저 멀리 단상의 로마 관료들 방향으로 휙 하니 집어던졌다.
‘광기를 원한다면 광기를 주마.’
관중들은 온몸이 피로 완전히 물든 서후에게 오싹함을 느꼈지만 그건 더 큰 자극으로 다가왔다. 때문에 서후가 판테의 머리통을 바닥에 던진 순간, 다시 온 경기장이 떠나갈 것처럼 열광했다.
“와아아아 최고다!”
“비록 돈을 잃긴 했지만 그래도 넌 최고다.”
“꺄아아아아. 너무 멋져! 정말 그리스 신화에서 튀어나온 영웅 같아.”
“꺄아아. 심지어 이름도 테세우스야~ 어쩜 어쩜 좋아.”
“테세우스! 테세우스!”
“테세우스! 테세우스!!”
서후는 자신을 환호하는 관중을 향해 담담한 표정으로 양팔을 번쩍 들었다.
“와아아아!”
그러자 다시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
로마인은 주로 아침과 저녁을 든든하게 먹고 점심은 가볍게 먹는 편이었다. 달걀, 올리브 열매, 무화과, 치즈 등을 먹는 편인데 데메트리우스는 무화과 몇 조각을 먹은 것도 소화가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뿌연 연기 속에서 집정관 발구스가 입을 열었다. 발구스와 데메트리우스는 폼페이 시가 자랑하는 스타비안 목욕탕에 있는 칼리다리움(온탕)에 자리하고 있었다.
새하얀 대리석 바닥에 둥근 아치형의 천장 주변으로는 신화 속 장면이나 에로틱한 장면을 묘사한 다양한 색상의 무늬와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그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토가를 벗은 채 알몸으로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적게 잃고 많이 딴다라.. 자네 대체 어떻게 알았나? 테세우스라는 소년이 이길 줄 말이야. 게다가 그런 강렬한 느낌을 주는 검투사는 정말 오랜만이로군. 그 소년의 경기를 보고 나니 몸이 달아서 그런지 오후에 열리는 주경기, 카푸아의 챔피언 오이노마우스와 네아폴리스의 챔피언 에우메네스의 경기가 매우 기대돼. 아무튼 이번 제전은 여러모로 성공이로군.”
촤아악
발구스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온탕의 물을 퍼서 듬성듬성 빠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데메트리우스는 서후의 서늘한 눈빛이 떠올랐다. 어찌 알았냐고? 그걸 어찌 알겠는가? 데메트리우스는 서후를 죽이기 위해 손을 쓴 장본인이다. 그런 데메트리우스가 서후에게 막대한 돈을 건 것은 재물로 폼페이 시민들의 마음을 사기 위함이었지 서후가 살아남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제가 테세우스라는 소년에게 돈을 건 것은..”
“아아. 아네. 너무 뻔한 결과라 판을 키우려고 막대한 금액을 투척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더욱 많은 재물을 얻었다라. 펠릭스라더니.. 독재관.. 아차차 이제 집정관인가? 어쨌든 술라의 행운이 자네에게도 옮겨온 것 아닌가?”
“그분의 행운에 제 작은 행운을 비할 수나 있겠습니까?”
“아. 여기들 계셨군요.”
토가를 수건처럼 대충 걸치고 나타난 이들은 조영관 바르비누스와 집정관 포르키우스였다. 그들은 노예를 시켜 모래로 땀과 기름을 닦아내고 향유를 부어 마사지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오늘 보니 아주 성공적이더군. 자네가 수고가 많았어.”
발구스가 바르비누스에게 말하자 바르비누스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두 집정관님들의 원대한 계획 때문이지요. 저는 그저 손발이 되어드렸을 뿐입니다.”
“하하하. 좋아.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데메트리우스.”
“예. 집정관님.”
“대체 어떻게 된 건가?”
발구스의 차가운 눈빛에 데메트리우스는 그가 뭘 묻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임기를 무기한으로 늘렸던 독재관 술라가 왜 갑자기 집정관제를 회복시켰냐는 뜻이리라. 보다 정확하게는 술라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에둘러 묻는 것이었다.
“제 주제에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다만 이번에 술라님과 함께 집정관에 오른 분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입니다.”
“으음.”
데메트리우스의 대답에 포르키우스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침음을 뱉었다. 메텔루스 피우스라면 동맹시 전쟁 때부터 술라의 부관으로 활약하던 그의 충실한 부하다. 그와 함께 집정관 위에 올랐다면 정적으로 인한 실각이 아니라 술라 스스로 독재관에서 물러났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말인데 그 사실이 못내 이해되지 않았다.
반면 발구스는 데메트리우스의 대답에 굳은 표정을 풀면서 말했다.
“그럼 별로 문제 될 것이 없군. 이번 제전이 끝난 후에 자네는 다시 로마로 갈 텐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럼 로마로 가기 전에 내 집에 한 번 들리게나.”
“알겠습니다. 집정관님.”
“칼리다리움에 계속 있었더니 조금 덥군. 프리지다리움(냉탕)으로 옮길 생각인데 같이할 텐가?”
“그야 이를 말씀이십니까? 저는 언제 이동하시나 내심 걱정했습니다.”
“하하하하. 조금만 더 늦었으면 이거 미움받을 뻔했군. 지금 들어왔으니 자네들은 같이 하지 않을 테지?"
발구스는 다시 포르키우스와 바르비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마사지를 받았더니 더 있으려고 하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게나.”
발구스와 데메트리우스가 온탕을 떠나가자 조영관 바르비누스가 포르키우스에게 물었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하지만 술라가 무엇을 노리는지 알 수 없는 한 섣불리 움직이는 건 곤란해.”
“발구스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는 자신의 안위만 관심 있는 사람이야. 흐름을 바꾸길 원하는 사람은 아니지. 데메트리우스더러 집에 들리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또 그 말을 우리 앞에서 한 이유 역시 말이야.”
바르비누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오늘 아침에 본 데메트리우스의 도무스(호화저택)를 떠올렸다. 그 광경이 떠오르자 불현듯 집정관 발구스의 처세가 포르키우스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