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7화 (17/298)

# 17

17. 테세우스.

17.

판테는 자신이 훈련시킨 표범 중 가장 사납고 가장 영악한 놈이다.

서후와 표범의 싸움을 멀리서 지켜보던 사육사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곧 흩뿌려질 피를 기대했다. 자신의 맹수를 아낄 수 있을뿐더러 부수입도 짭짤하게 얻었으니 그야말로 수지 남는 장사였다. 자신에게 왜 그런 부탁을 했는지 모르지만 어차피 거절할 수도 없는 명령이었고 거절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

“오~ 어서 오게. 데메트리우스.”

집정관 발구스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데메트리우스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발구스 집정관님. 그리고 포르키우스 집정관님.”

집정관은 공화정 최고위 정무직이며 민정과 군사 두 분야 모두 최고권한을 보유했다. 원로원과 협의하여 민회를 주재했는데 두 집정관이 한달씩 교대로 집무하며 상호 협의 하에 업무를 봤다. 이를 통해 권력독점을 막아 균형을 유지했다. 말했지만 독재관은 비상시에 두 집정관 중 한 사람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경우다.

그런 발구스와 달리 포르키우스는 표정을 굳히며 데메트리우스에게 말했다.

“로마의 술라 펠릭스께서 이번에 독재관을 사임하고 집정관제를 복원했다는데 소문이 사실인가?”

“어허 이 사람. 흥미진진한 광경이 곧 벌어지려는데 그런 이야기는 이따 점심을 먹고 목욕이나 같이 하면서 합세. 그래. 내가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저 테세우스라는 소년에게 많은 돈을 걸었다고?”

포르키우스는 현재 집무 중인 발구스가 그리나오자 수긍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데메트리우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집정관님. 도박에서 돈을 따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로마는 원형경기장에서의 내기만 예외로 두고 모든 도박과 내기를 법으로 금지, 어길 시 판돈의 네 배에 해당하는 벌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도박은 로마인들의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지금은 공식적인 도박판이 아닌가? 때문에 발구스는 데메트리우스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오. 그게 뭔가?”

데메트리우스는 진한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적게 잃고 많이 따면 됩니다.”

그러자 발구스가 대소를 터트렸다. 너무나 당연한 소리 아닌가?

“뭐라? 하하하하. 그럼 이번엔 자네가 실수했군. 이건 누가 봐도 표범의 승리야. 저 ‘판테’라는 표범은 훈련받은 놈들 중에서도 가장 사납고 가장 영악한 놈이라더군.”

“집정관님께서는 표범에게 거셨군요?”

“내 자네가 소년에게 많은 돈을 건다고 들었을 때 냉큼 걸었지. 으하하하! 자네도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군.”

“집정관님의 즐거움을 훼손시켜서 송구하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음? 어찌 그런가?”

“소년이 져도 재물로 폼페이의 시민을 즐겁게 한 공로를 산 것이고 이겨도 저는 금전적으로 많은 이익을 남깁니다. 그러니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지요.”

“뭐라? 하하하하. 과연 오늘의 원형경기장을 완공케 한 주역다운 발언일세. 안 그렇소? 포르키우스?”

맞다. 발구스의 말대로 데메트리우스가 아니었다면 공사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해방노예는 언제나 입안의 혀처럼 굴지만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자다. 역시 술라와 연관이 있던 놈이었나? 포르키우스는 그런 데메트리우스의 모습에 더욱 경계심을 높였지만 겉으로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데메트리우스는 진한 웃음을 지으며 막 서후를 향해 달려드는 표범을 바라봤다. 죽어도 이득이고 살아도 이득이다. 너는 내게 어떤 이득을 안겨줄 것이냐? 하지만 데메트리우스는 서후가 죽기를 원했다. 이 모든 상황을 연출한 것이 바로 데메트리우스였고 그래야 여러모로 더 깔끔했기 때문이다.

*

부드러운 털가죽 아래 감춰진 폭발적인 근육이 꿈틀거림과 동시에 놈의 육중한 체구가 사뿐하게 날아올랐다. 고양이과 동물이라 그런지 거대한 체구가 바닥을 박찼음에도 별다른 소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캬아악”

놈이 큰 움직임을 보일 때까지 숨을 고르며 기다리던 서후는 그 즉시 뱃가죽을 꿰뚫어버리겠다는 기세로 강하고 재빠르게 창을 내질렀다. 당연히 그 모습 가운데 두려움이나 망설임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후우웅

그러나 놀랍게도 표범은 공중에서 몸을 말아서 아슬아슬하게 그 공격을 피했다.

‘이걸 피해?’

공중에서 몸을 뒤트는 것도 그렇지만 실로 엄청난 반사신경이었다. 서후는 급히 몸을 옆으로 굴려 육중한 놈의 체중이 자신에게 실리는 것을 방지했다.

바닥을 구르면서 어쩔 수 없이 텁텁한 흙이 입안으로 들어왔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육중한 체구임에도 가뿐하게 바닥에 착지한 표범이 순식간에 서후에게 달려와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서후는 순간적으로 창대로 놈을 후려칠까 싶었지만 부실하기 짝이 없는 창이 버티지 못할 것을 직감했다. 백병전의 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들의 경험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서후였기에 그 느낌은 확신에 가까웠다.

강적이다. 현재 자신의 역량을 완전히 넘어서는 무시무시한 강적 말이다.

그러나 모든 부분에서 표범이 우월한 상황이기에 단순히 물러나기만 해서는 사냥감이 되어버릴 뿐이다. 창이 아무리 부실해도 철로 된 창두 부분은 놈의 모든 이빨과 발톱보다 강력하다. 때문에 서후는 급히 뒤로 물러나며 놈이 휘두르는 앞발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훙 후훙 훙

“카아악 캬악”

서후는 놀랍게도 놈의 앞발 공격을 창으로 찔러서 모두 막아냈다. 순식간에 앞발이 피투성이가 된 표범은 화끈한 고통에 화들짝 놀라며 성큼 뒤로 물러섰다.

“와아아아!”

“최고다!”

“꺄아아아 나를 가져요~”

검투사는 이 시대의 연예인이나 다름없었다. 검투사는 소녀들의 짝사랑 대상이 되기도 했고 아이들의 영웅이 되기도 했으며 심지어 귀족부인들조차 이들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봤다.

“뭐하는 거냐? 이 멍청한 표범 놈아!”

“네 덩치에 꼬마 하나 못 죽이냐? 얼른 죽여라!”

“얼른 죽여!!”

표범에게 돈을 건 자들은 당연히 서후가 죽기를 원했기에 표범을 향해 욕설을 뱉고 서후에게는 저주를 퍼부었다. 고작 자신이 건 돈을 위해 작은 소년의 죽음을 바라는 자들을 대체 어떤 눈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다만 그런 자가 지금 이곳에 한두 명이 아니었으니 저들끼리 질책하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서후는 물론 표범 판테 역시 저들의 소란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판테는 전과 달리 경계어린 표정으로 지으며 서후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살기를 풍겼다. 앞발이 피투성이가 되긴 했지만 훈련받은 맹수는 관중의 고함소리는 물론 이 정도 상처 역시 전혀 아랑곳 않는다. 그게 바로 훈련받은 맹수들의 두려운 점이었다.

“크르르르르”

낮게 울부짖으며 자신의 분노를 드러냈지만 서후는 냉정한 눈으로 놈의 숨통을 끊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붕부붕

서후는 가볍게 창을 돌린 뒤 다시 놈을 향해 겨누었다. 그의 태도는 종전보다 훨씬 더 여유로웠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사람들, 특히 전투 경험이 있는 자들은 작게 탄성마저 내뱉었다.

모든 사람들이 표범이 사냥꾼일 것이라 생각했다. 테세우스라는 소년은 운이 좋아도 중상을 면치 못할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포식자는 표범이 아니라 소년이었다. 그렇다고 표범이 약하거나 영악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놈은 분명 사납고 또 강했다. 한데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여름철의 후덥지근한 기운과 더불어 격렬한 움직임으로 인해 땀이 흐르자 서후는 오히려 긴장이 완화되는 것을 느꼈다. 아니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라 서후는 자신의 내면 안에서 생소한 감정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미친놈들 사이에 있으니 결국 나도 미친 건가? 이게 지금.. 즐거워?’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자신은 분명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생사투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극한의 긴장감. 이건 분명 항우와 리처드가 전투에 임할 때 느끼는 감정이었다.

자신에게 살의를 발하는 눈앞에 하찮은 표범의 아가리를 양손으로 잡아 찢어버리고 그 피에 흠뻑 젖고 싶은 음습하고 잔혹한 감정까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올랐다.

항우. 패왕 항우의 감정이다.

‘젠장. 그 미친놈이 느끼던 감정을 지금 내가 동일하게 느끼고 있다고?’

서후는 급히 그 감정을 털어냈다. 이건 좋지 않다. 표범의 아가리를 찢을 힘이 현재 있지도 않을뿐더러 그건 오직 잔혹한 살육을 위한 불필요한 행동이다.

항우는 살육의 희열을 맛보기 위해 걸핏하면 사람을 죽였다. 그 항우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끝없는 전쟁 속에 어느새 살육만이 삶의 의미가 되어버렸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역한 피비린내로 모든 것이 피폐해졌거늘 그런 삶을 자신에게 가져온다고?

‘그럴 수는 없다.’

서후는 새파랗게 눈을 빛내며 어슬렁거리며 자신의 주위를 배회하는 표범을 바라봤다. 놈의 사나운 눈빛에는 극도의 경계심이 완연하게 드러났다. 경계심? 아니다. 그 깊숙한 곳에는 서후,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두렵지 않다면 경계심을 가질 이유도 없으니까.

부부붕

서후는 창을 현란하게 돌리자 표범 판테는 그때마다 미약하게 움찔거렸다. 서후는 단순하게 창으로 묘기를 부린 것이 아니라 그 형태와 위치를 바꿔가며 판테의 급소를 노렸기 때문이다. 그런 서후의 창술이 범상치 않음은 일반 관중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때문에 악을 쓰던 관중들마저 입을 다물고 서후에게 집중했다.

“카아악 크르르”

그르렁거리며 위협적인 소리를 뱉던 판테는 서후의 주위를 돌면서 기회를 엿봤다. 한번이다. 놈을 물어뜯던 할퀴던 단 한 번만 공격에 성공하면 자신을 고생시킨 야들야들한 놈의 내장과 살점을 마음껏 뜯어먹을 수 있다. 그런 판테의 입가엔 걸쭉한 침이 늘어졌다.

부우웅

그때 자신을 위협적으로 위협하던 창이 자신이 아닌 허공을 찔러 들어갔다.

제 아무리 현란한 것도 언젠가는 멈추기 마련. 그걸 계산한 건 아니지만 노련한 포식자인 판테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당연히 절호의 기회를 놓칠 판테가 아니었다. 판테는 몸의 모든 힘을 폭발적으로 분출하며 서후를 향해 달려들었다. 판테의 입은 서후를 뼈째로 씹어 먹겠다는 듯 한껏 벌어져 있었다.

“캬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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