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16. 테세우스.
16. 테세우스.
뿌우 뿌우우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종대로 선 검투사들이 천천히 입장했다. 오늘 경기에 참여하는 모든 검투사가 경기장으로 입장했고 그 가운데는 당연히 서후도 있었다.
“와아아아!!”
“정말로 꼬마 아이잖아?”
“이거 뭐 상대가 안 되겠는데?”
그때 진행자가 다시 관중들을 향해 소리쳤다.
“경기에 앞서 소개드릴 두 분이 있습니다. 기부를 통해 폼페이 시민에게 원형경기장을 선사한 카이우스 퀸크티우스 발구스 집정관과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집정관입니다! 두 분이 없었다면 오늘의 경기를 저희가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흙바닥에서? 아니면 바닷가에서?”
그가 잠시 뜸을 들이자 관중들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으하하하하.”
“그것도 나쁘지 않겠구만!”
“맞아. 경기 중 뛰쳐나온 사자가 네 머리를 물어뜯으면 그거야말로 장관이겠군!”
“뭐라? 이 새끼가?”
주먹을 날리며 곧 싸움이 벌어졌지만 말리기는커녕 그 광경에 더욱 즐거워할 뿐이었다.
떠들썩하던 관중의 반응이 조금 잦아들자 진행자가 준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크게 외쳤다.
“그러니 폼페이 시민이여 환호하라! 위대한 폼페이의 집정관들께!”
뿌우 뿌우우
뿔나팔 소리와 함께 관중들은 아우성치며 상층 단상에 선 두 사람을 향해 환호했다. 방금 전까지 싸움을 하던 자들도 싸움을 멈추고 같이 환호했다.
“와아아!”
“최고다! 최고야!”
오늘은 바로 폼페이 시에 원형경기장이 완공된 후 공식적으로 이뤄지는 첫 경기였다.
폼페이 원형경기장은 기원전 80년 진행자가 소개한 두 사람의 기부로 건설되었다. 장축 135m 단축 104m의 2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 폼페이 시민의 숫자가 2만 명가량이었기에 모든 시민을 수용하고도 남았다.
현존하는 로마의 원형경기장 중 가장 오래된 경기장으로 흔히 알고 있는 콜로세움은 기원후 70~80년에 걸쳐 지어진 경기장으로 이 시기엔 존재하지 않았다.
집정관 발구스와 포르키우스가 손을 번쩍 들자 관중들은 환호하는 것을 멈추고 그들의 말에 집중했다. 포르키우스와 눈을 마주친 발구스가 입을 열었다.
“넵투누스께서 흡족하게 오늘의 제물을 받으시고 하늘의 비를 내려주시길! 경기를 시작하라!”
다시 한 번 거센 환호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
모든 검투사는 다시 대기실로 돌아와 경기장으로 나갈 때를 기다라고 있었다. 베스티아리이를 제외한 검투사들은 다소 편안한 모습으로 앉아있었지만 서후 등을 비롯한 베스티아리이는 일어서서 곧 출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심해라. 꼬마야.”
미운 정도 정이라고 드왈드가 경직된 표정 가운데 서후에게 말을 던졌다. 서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드왈드가 다시 말했다.
“쯔.. 네놈 운명도 기구하구만. 이거 하나만 명심해라. 사자도 사자지만.. 특히 표범을 조심하도록. 놈들은 영리하고 또 놀랍도록 잔인한 습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드왈드의 말이 맞았다. 사자에게 습격당한 사람은 간혹 살아남는 경우가 있지만 표범에게 습격당한 사람은 백중백이면 죽었다. 사자는 물고 흔드는 것이 전부지만 표범은 사람의 목덜미를 물고 발톱으로는 가슴을 완전히 헤집어놓는다.
잔혹하고 냉혹한 포식자다. 더욱이 검투대회에 나오는 표범은 훈련을 통해 그 잔혹한 천성을 극대화시킨 놈들이다. 드왈드가 괜히 그렇게 경고하는 것이 아니었다.
서후는 창을 쥔 손에 축축하게 땀에 배어 나왔다. 데면데면한 사이인 드왈드가 왜 자신에게 경고하는지 서후는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단순히 표범이 위험한 맹수라서가 아니었다. 몸집이 작은 서후 입장에선 사자든 맹수든 물리면 어차피 그걸로 끝이니까.
‘무리지어 다니는 초식동물을 사냥할 때 맹수들이 노리는 놈은 건강하고 튼튼한 놈이 아니다. 반드시 약하고 병든 놈을 노린다.’
지금의 경우엔 자신이 될 것이다. 드왈드는 말할 것도 없고 아크토스나 게르드 역시 건장한 몸을 지니고 있었고 다른 검투사들 역시 예비 검투사라 비리비리한 자신의 육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표범이 그토록 영리하고 잔혹하다면 반드시 나부터 노린다. 그래도 단체전이니..’
“캬악 캬악 캬아웅”
표범 특유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베스티아리이들의 표정이 한껏 굳었다. 이 훈련된 표범은 어떤 면에서는 사자보다도 상대하기 까다롭고 위험한 상대였으니까.
수사자는 독립적인 개체라 서로 협력하지 않지만 이 훈련받은 표범은 영악하기 그지없다. 표범 역시 독립적인 개체임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성체로 자란 사자는 본능적으로 표범을 물어 죽이려는 습성을 지니고 있기에 두 종류의 맹수를 한꺼번에 푸는 경우는 드물다는 점이었다.
그때 도크트레 쿠리오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서후 앞으로 다가왔다.
“헤르쿨레스의 가호가 네게 있기를. 출전이다.”
서후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담담한 눈빛으로 쿠리오를 바라봤다.
“단체전.. 아니었습니까?”
“관중들이 네 전투를 제일 먼저, 무엇보다 자세하게 보고 싶어 한다는군. 다만 표범과 너의 1대1 싸움이 될 것이다.”
‘관중들이라..’
어째서 서후는 데메트리우스의 진한 웃음이 떠오르는 걸까?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지만 어차피 피할 수 없다. 때문에 서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스렸다.
쿠리오는 그런 서후의 모습에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크게 감탄했다. 주변을 둘러보라. 이 10살 소년보다 훨씬 더 건장한 체격의 성인들도 그 두려움을 참지 못해 몸을 덜덜 떨고 있는데 이 조막만한 소년은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음에도 눈빛 하나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쿠리오 외에도 그 모습을 눈여겨 본 한 사내가 있었다. 아까부터 서후를 유심히 살펴봤기에 서후와도 눈이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사내였다.
“작은 몸 안에 강철거인이 자리하고 있군.”
그 사내야말로 강철 같은 육체를 자랑하고 있었다. 붉은 머리칼에 파란 눈, 날렵한 체구를 가진 사내였다. 몸에 남아있는 다양한 상흔으로 봐선 그 역시 검투사로 보였다.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조금도 떨지 않더군. 네 이름을 알고 싶다. 검투사.”
그는 서후를 소년이나 꼬마로 부르지 않고 검투사로 칭했다. 어투는 투박했을지언정 나름 예우를 갖춘 정중한 표현이었다. 서후는 그를 힐끗 바라본 뒤 간단하게 대답했다.
“테세우스.”
그 말에 말을 건넨 남자가 진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나? 표범 소리가 아까부터 영 거슬리는군.”
표범을 죽이고 살아 돌아오라는 표현이었다. 서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다시 말했다.
“내 이름은 오이노마우스다.”
그러자 주변의 검투사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봤다. 그의 이름에 대해 들어본 자들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바티아투스 가문의 그 오이노마우스?”
“카푸아의 챔피언!”
서후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오이노마우스는 모르지만 바티아투스라는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다. 노예반란을 일어나게 만든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와 동시에 강렬하게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스파르타쿠스!’
뿌우우우웅
그때 출전을 알리는 뿔나팔 소리가 울렸다. 서후는 그 즉시 모든 생각을 비워내고 경기장으로 향하는 통로를 걸어 들어갔다. 당연히 그 발걸음 가운데 어떤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저벅 저벅
*
“와아아아아!”
서후가 모습을 드러내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 일제히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니 담이 약하거나 경험이 없는 자는 그 소리에 짓눌려버릴 지경이었다. 누군가를 환호하는 함성이 아니라 누구든 어서 죽기를 바라는 악의서린 함성이었으니까 말이다.
서후는 저들이 소리를 치거나 말거나 창자루를 쥔 손아귀를 폈다 접었다하며 긴장을 풀었다. 다행히 자신이 어지간한 성인보다도 강한 힘을 소유했다는 건 확인했다. 육체가 다 성장한 후에는 얼마나 더 강력한 힘을 보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게 지금은 아니다.
게다가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표범이다. 인간의 4배 이상 되는 근력과 강력한 치악력은 서후의 연약한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도 남는다.
‘그러니 실수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싸늘한 긴장감이 온 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사는 게 씨발 쉽지 않네.’
그렇게 속으로 욕설을 뱉을 때 철창이 열리며 커다란 표범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아악. 카웅”
거대 고양이과 중 가장 영악하고 위험한 맹수가 표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놈은 유연한 다리를 재빠르게 놀려 서후 주변에 다가와 어슬렁거렸다.
얼굴의 작은 점과 매화꽃 문양의 점이 놈이 움직일 때마다 서후의 눈을 현혹시켰다. 놈의 사나운 눈빛이 서후의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카아악!”
표범이 급히 공격태세를 전환하며 방향을 전환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재빠른지 전광석화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서후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차분하게 창끝으로 놈을 가리키고 있었다.
‘와라. 네가 오는 순간이 네 멱이 따이는 순간이다.’
서후는 서늘한 눈빛으로 표범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세심하게 살피고 또 살폈다. 그런 서후의 눈에 놈의 뒷다리 쪽 근육이 응축되는 것이 들어왔다. 도약이다. 놈이 자신을 덮치고자 도약하려는 준비동작이었다.
서후 역시 몸의 근육을 팽팽하게 당기며 놈이 달려들 그 순간을 노렸다. 맹수와 어린 소년의 팽팽한 대결에 검투장의 모든 사람들도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