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15. 베스티아리이.
15.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주인님께 기별을 전하고 오겠습니다.”
바르비누스는 노예의 말을 흘려들으며 감탄한 눈빛으로 저택을 바라봤다. 전통적인 고대양식으로 집안 곳곳이 장식되어 있었고 온갖 화려한 색으로 칠해진 조각품들이 그 고풍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확실히 도무스(domus, 거대저택)는 도무스로군. 인술라(insula, 공동주택)에 비할 바가 아니야.”
바르비누스는 자신의 집과 괜히 비교가 되며 이 모든 행운을 누리고 있는 데메트리우스가 부러워졌다. 노예에 불과했던 자가 어찌 이리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단 말인가?
인술라는 로마의 복합상가주택으로 거대한 인술라는 7층 건물에 가까운 높이를 자랑한다. 한마디로 아파트다. 하지만 현대와 다르게 고층으로 갈수록 집값이 저렴해지며 거주환경이 매우 열악해진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일단 엘리베이터가 없고 위로 갈수록 붕괴 및 화재 등의 온갖 위험에 취약하다.
때문에 도시의 모든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고층에 자리 잡고 있는 건 일용직 노동자들과 같은 빈민층이며 위로 가면 갈수록 오물투성이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다.
1층은 출입이 용이하다는 이점 때문에 대부분 상인들이 임대하여 사용한다. 따라서 여유는 있지만 도무스 같은 호화주택에 거주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층수는 대개 2층으로 바르비누스 역시 2층에 자신의 집을 가지고 있었다.
듣기로 데메트리우스는 로마에도 도무스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심지어 로마의 집값은 다른 지역보다 최소 4배는 더 비쌌다. 그가 그렇게 감탄을 터트리며 부러워하고 있을 때 안으로 들어갔던 노예가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주인님께서 기침하셨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노예를 따라 복도로 걸음을 조금 옮기자 곧 널찍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택 중앙의 아트리움(atrium, 중정)이었다. 그는 화려한 홀을 장식하고 있는 프레스코 장식과 모자이크를 힐끔거리며 살폈다. 자연스레 자신의 집안을 장식하고 있는 흑백 모자이크와 비교되며 어떤 부분에선 자괴감까지 느껴졌다. 나름 자랑스러워하던 장식이었는데 말이다.
색감 넘치는 중정의 조형물들 위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고인 수조 위에는 꽃잎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간밤에 연회가 있었던 모양이다.
본래는 빗물을 모아 사용하는 용도지만 일주일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그러니 이 물은 시에서 개별적으로 끌어온 물이다. 도시의 물을 개인 집에 공급하게 하는 건 불법이다.
더욱이 지금은 물이 귀한 여름철이다. 이 시기에 넵투날리아 축제가 열리는 이유가 뭔가? 넵투누스를 기쁘게 해서 물을 가져오게 하려는 것 아닌가? 그 모습에 바르비누스는 전임 조영관과 거래가 있었음을 짐작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노예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비우자 바르비누스는 데메트리우스의 집무실을 구경하느라 정신없었다. 대형탁자와 상아와 청동으로 장식된 의자. 그리고 그 위에 값비싼 은제품들까지.. 그가 부유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집무실 밖에는 정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가장 먼저 그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작은 분수대였다. 심지어 개인용 분수라니.. 황당할 따름이었다. 정원에서 자라는 식물들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눈에 들어온 것만 은매화, 월계수, 담쟁이 덩쿨, 수선화, 백합 등이 자라고 있었다. 무슨 식물인지 알지 못하는 것도 수두룩했다.
이 모든 광경은 화려한 저택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폼페이의 아이딜레스 플레비(Aediles plebi, 평민 조영관)께서 이른 아침부터 누추한 곳을 어쩐 일로 다 찾아오셨습니까?”
조영관 바르비누스는 크림색 토가를 아무렇게 걸치고 나온 데메트리우스를 떨떠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누.. 누추한 곳이라니요.”
“아이딜레스께서는 로마의 영광을 머금은 관청에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그런 곳에 계시던 분께서 노예 출신의 집에 발을 디디셨으니 누추한 곳이 맞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언뜻 듣기엔 자신을 높여주는 것 같았지만 데메트리우스의 울분과 날카로움이 담긴 발언이었다. 바르비누스는 헛기침을 하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흠. 흐음. 그런 말씀 마십시오. 데메트리우스님이 아니었다면 이번 제전의 제물을 공수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을 겁니다. 로마의 영광을 위해 일하시는 분의 집을 어찌 누추하다고 폄훼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말씀만이라도 감사하군요. 일단 아침을 준비하라 명했으니 식사부터 하시지요.”
“제가 너무 이른 시간에 찾아왔군요. 다만 오늘 오전부터 제전을 기념하는 행사가 벌어지는 지라..”
“개의치 마십시오. 안 그래도 금일 오전 행사는 저도 기대하는 광경이 있어서 일찍 나가보려고 했습니다.”
“아 그랬습니까?”
“아무튼 가시지요.”
데메트리우스가 사람 좋은 미소를 띠우며 손을 펼치자 바르비누스 역시 웃음을 지으며 식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당에는 이미 풍성한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포카치아, 코르넷토, 꿀을 넣은 스프, 치즈와 과일, 포도주에 고기까지 결코 두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많은 양의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시장할 텐데 드시지요.”
데메트리우스가 손짓하자 바르비누스는 고마움을 표한 뒤 가볍게 식사를 했다. 식사를 어느 정도 마친 바르비누스는 입을 천으로 닦아낸 다음 데메트리우스에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이번 축제를 기획한 것이 저였습니다만 데메트리우스님의 도움으로 성과를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말 마십시오. 조영관께서는 쿠르수스 호노룸(cursus honorum, 명예로운 경로)을 밟고 계신 분이 아니십니까? 후에 저를 괄시하지만 말아주십시오.”
원로원 계급의 로마인들은 재무관(Quaestor, 30세), 조영관(Aedilis, 36세), 법무관(Praetor, 39세),집정관(Consul, 40세), 감찰관(Censor) 순으로 올라가는 것을 명예롭게 여겼다. 그걸 쿠르수스 호노룸이라고 했다. 본래 나이 제한은 없었지만 야심가가 나타나 공화국을 위협하게 될 것을 염려한 술라가 제정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는다.
폼페이도 다른 로마 자치도시와 마찬가지로 수도 로마의 행정조직을 본떠 2명의 도시 집정관, 4명의 조영관(귀족2, 평민2), 2명의 호민관, 그리고 도시 원로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원로원을 제외하고 임기는 1년 제한이며 투표를 통해 선출되었다.
나머지 관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넘어가고 조영관은 일반행정, 식량공급, 축제조직 및 운영 같은 일을 담당하고 있는데 성과에 따라 다음 관직에 대한 당하락이 결정되기 쉬웠다. 아니 그 전에 로마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이런 게 없기 때문에 선거운동 시 뇌물은 필수였고 평판을 떠나 돈이 없으면 당선은 꿈도 못 꾼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데메트리우스가 해방노예라는 사실은 이미 머릿속에서 떠나간 지 오래다. 그의 도움을 받는다면 집정관은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고 더욱이 그는 명성이 자자한 장군, 폼페이우스와도 아는 사이였다.
“지금쯤 공개처형이 이루어지고 있겠군요.”
“아. 그럴 겁니다. 관심이 있으십니까?”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데려온 맹수들이 얼마나 사나운지는 확인해보고 싶군요.”
“그럼 보셔야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굽신거리는 바르비누스의 태도에 데메트리우스는 진한 웃음을 지었다. 여러모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긴 했지만 그렇다고 테세우스라는 별미를 놓칠 수야 없지 않은가?
*
검투장의 입장료는 무료다. 단 뼈로 만든 출입증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 데메트리우스와 바르비누스가 입장하자 단상 위에 선 한 남자가 검투장을 가득 메운 관중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폼페이의 시민 여러분! 즐거우셨습니까?”
퉁퉁퉁퉁
“와아아아아”
한껏 화려하게 차려입은 진행자로 보이는 사내가 우렁차게 소리치자 관중들이 발을 구르며 환호했다.
“본 경기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니 상상하신 적 있으십니까? 강력한 이빨을 가진 맹수와 맞닥뜨린 그 광경을 말입니다. 사자, 표범, 곰, 이리떼, 악어 등등 각양각색의 다양한 맹수들이 살과 뼈를 부수고 피를 탐하는 그 광경을 말입니다.”
진행자는 팔을 과장되게 휘두르며 소리쳤다.
“자! 여기 창 한 자루를 든 용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리스 영웅, 테세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10살 소년도 있습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아. 아. 기대되신다고요?”
“와아아아!”
“베스티아리이가 검투사는 무슨 검투사냐? 얼른 시작해라!”
“이 새끼! 계속 지껄일거면 네가 나가서 싸워라!”
욕설, 조소, 비방, 환호까지 모든 것이 뒤섞인 반응이 관중에게서 흘러나왔다. 진행자는 우스꽝스런 몸짓과 함께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자! 이제 시작합니다! 그 위대한 전투의 서막을!”
“와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