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4화 (14/298)

# 14

14. 베스티아리이.

14.

부우웅

옆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허공에 창을 내지르는 그리스인이 눈에 들어왔다. 아크토스라고 했던가? 창을 든 채로 그를 바라보던 서후는 문득 자신의 발언 중 맹점이 하나 있음을 알아차렸다.

다행히 라틴어는 모든 부분에서 거의 완벽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인이라 자신을 밝힌 사람이 정작 그리스 말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졸지에 5개 국어를 하는 셈이로군.’

한국어, 고대 라틴어, 고대 중국어, 불어, 그리고 기초영어. 물론 그중 이 시대에 사용이 가능한 건 라틴어, 중국어, 불어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지금 시대의 영어는 자신이 알던 영어가 아닐뿐더러 한국어 역시 마찬가지. 이곳이 로마제국인 이상 중국어도 쓸 일이 없다.

‘비단이 언제부터 전해졌는지는 모르지만 중국과 교역할 일이 있다면 유용할지도.. 지금은 한나라려나? 거리가 너무 멀어 그들과 직접 만날 확률은 희박하겠지만 말이야. 이 시대 중계무역을 주도했던 게 페르시아? 아니 파르티아였나?’

로마는 유목민인 파르티안족이 세운 파르티아로부터 비단을 수입했고 한나라 역시 파르티아를 통해 로마의 교역품을 거래했다.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보고 있는 파르티아가 로마와 한나라의 직접무역을 방해했기에 직접적인 교류가 이뤄진 적은 없다.

참고로 페르시아는 이란 지역 파르사(Pārsa)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발흥했던 옛 왕조를 통틀어 가리키는 단어로서 그리스인들이 페르세스(Perses), 페르시아라고 사용한 것이 그대로 이 지역의 나라들을 통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고로 파르티아 역시 페르시아라 볼 수 있지만 엄연히 말해 완전히 다른 나라다.

그렇게 교역에 대해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순순히 금을 내놓으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던지..

‘그 유명한 운명하셨습니다를 즐기긴 했지만.. 제길.. 정말로 운명했군.’

종종 즐겨 했던 문명이란 게임이 떠오르자 쓸데없는 잡생각도 덩달아 떠올랐다. 서후는 잡생각을 털어버리고 훈련에 열중하는 검투사들을 바라봤다. 그 분위기에 휩쓸렸기 때문인지 훈련관 쿠리오가 딱히 어떻게 하라고 가르친 적도 없건만 드왈드까지 창을 내지르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서후는 차분한 눈으로 전방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전장을 바람처럼 질타하며 호령하던 항우가 되었다.

훙 부르르르

서후가 내지른 창은 허공을 순식간에 가르며 창대를 파르르 떨어 울렸다.

*

아밀은 두려운 눈으로 단단한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은 두 남자를 바라봤다. 그들은 투구를 쓰고 있었고 그 위에 역시 두꺼운 가죽으로 된 두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잡은 두 사람의 악력이 어찌나 센지 몸을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아밀은 눈물을 글썽이며 두 사람을 바라봤지만 그들은 무정한 표정으로 그를 더욱 세게 붙잡았다. 사형집행을 감당하고 있는 노예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형수가 언제 가장 위험한 행동을 벌이는지 말이다.

아밀은 앞으로 벌어질 광경에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끔찍한 두려움을 느꼈다. 아니 이대로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작 7 세스테르티우스를 얻고자 로마시민을 살해한 자신의 행동을 저주했다. 7 세스테르티우스로는 튜니카 한 벌도 살 수 없었다. 이렇게 붙잡힌 자신의 멍청함을 다시 한번 탓했지만 이제 와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드르르릉 철컹

철창문이 열리자 두 명의 사형집행인은 그를 거세게 밖으로 내던졌다.

쿠당탕탕

“아.. 안돼!”

흙바닥에 엎드러진 아밀은 급히 뒤를 돌아봤지만 이미 철창문은 굳게 닫혔다. 두 팔이 뒤로 묶여있어서 흙바닥에서 일어나기도 쉽지 않았다.

“크아아앙”

그때 모골이 송연해지는 지옥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바로 사자의 울음소리였다.

“아.. 안돼! 사.. 살려!”

저 멀리 굶주린 사자 한 마리가 짙은 밤색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밀은 젖 먹던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 뒤 사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도망쳤다.

“우하하하하하”

“카하하하하”

그것을 지켜본 관중들은 먹고 있던 빵이나 올리브 열매를 집어 던지며 요란스럽게 떠들어대며 즐거워했다.

“죽여라! 로마인을 죽인 저놈을 죽여 버려!”

“와아아아!”

두 팔이 뒤로 단단히 묶인 자가 뛰어봐야 얼마나 뛸 수 있을까? 아밀은 달리다가 금세 균형을 잃고 흙바닥에 쓰러졌다. 둔탁한 소음과 함께 숨이 턱턱 막히는 충격이 그의 내장 전체에 전달되었지만 그 아픔을 느끼고 있을 정신이 없었다.

부드럽지만 육중한 무언가가 바닥을 박차는 진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밀은 소스라치게 놀라 꿈틀거리며 급히 몸을 뒤틀었다.

“크와아아앙”

콰직

그러나 풍성한 갈귀를 가진 굶주린 사자가 일어나려는 아밀의 위를 덮침과 동시에 그의 머리를 베어 물었다. 아밀의 코뼈와 머리뼈가 사자의 강력한 이빨 아래 무참하게 으스러졌다.

“끄어어어.”

더 끔찍한 사실은 방금의 공격으로 아밀의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밀은 끔찍한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 앞에 마지막 비명을 지르자 관중들은 더 크게 환호하며 즐거워했다. 사자는 더 들어줄 것도 없다는 듯 그의 목을 물고 이리저리 흔들며 땅바닥에 메쳤다.

가련한 아밀의 숨이 끊어지자 거대한 사자는 그대로 그의 따끈한 내장부터 파먹기 시작했다.

콰득콰득. 우걱우걱.

아밀의 시체가 사자의 이빨에 의해 간헐적으로 들썩거리며 피를 흙바닥 위에 낭자하게 흩뿌렸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관중들은 미친 듯이 환호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로마 특유의 공개처형이다. 사실 로마만 특별히 잔인했던 건 아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인간제물을 바쳤고 갈리아족 등은 적의 머리를 트로피 삼아 집의 대들보에 걸어두는 관습도 있었다. 중세시대조차 단두대, 교수대등 수많은 공개처형이 이뤄졌고 죽을 때까지 관자놀이를 망치질해 죽이기도 했다. 공개처형은 심지어 현대에서도 일어났다.

하지만 로마처럼 공개처형을 공연식으로 집행한 경우는 드물었다. 로마인들은 이 처형식을 신화의 한 장면이나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꾸몄다. 지금 일어난 아밀의 처형식은 시작일 뿐이었다.

외바퀴 손수레에 죄수를 고정시켜 수레에 매달아 맹수에게 밀어버리거나 이카루스랍시고 죄수를 기묘하게 분장시켜 허공에서 밀어서 낙사시켰다. 죄수들의 피로 경기장이 붉어지는 건 순식간이었고 관중들은 그럴수록 더욱 크게 열광했다.

*

“크아아아아”

“와하하하하”

비명소리와 환호 소리가 대조를 이루는 잔인한 현실 앞에 서후는 작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미친..”

매캐한 연기와 함께 고기타는 냄새가 진하게 사방에 퍼졌다. 춤추는 불 인간이라는 진행자의 소개가 있은 후 일어난 일이다. 죄수들은 불에 타기 쉬운 물질로 흠뻑 젖은 옷을 입고 불에 타죽었다. 옷을 입힌 이유는 그래야 불이 붙었을 때 죄수들이 꿈틀거리며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니까.

더 황당한 건 이들 관중은 어떤 권력자의 위협 앞에 환호를 지르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죄수가 오히려 맹수를 피해 달아나 빨리 피를 보지 못하면 관중들은 야유를 보내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럴 때면 배치된 궁수가 죄수에게 화살을 쏴 더는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렇게 피를 보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열광했다.

‘미친.. 실로 미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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