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1화 (11/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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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베스티아리이.

11. 베스티아리이(Bestiarii).

페루사니는 라니스타(lanista, 검투사 훈련소 주인, 검투사 관리자)다.

그는 자신이 이끌고 있는 검투사단의 검투사 양성소(Ludus)에 보내 훈련시키고 출전시킨 검투사가 한두 명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황당한 경우는 그 수많은 경험 가운데서도 드물었다.

페루사니는 눈앞의 남자를 성난 눈빛으로 바라봤다.

“다시 말해보슈. 뭐라고?”

“라니스타께서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다. 이 소년을 검투경기에 참가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코락스가 덤덤한 어투로 말을 뱉자 페루사니는 기가 차지도 않다는 듯 그를 노려봤다.

“데메트리우스의 노예라고 했나? 검투경기도 검투경기 나름의 룰이 있는 거야. 대결 상대를 찾을 수도 없는 저딴 애송이를 어디서 신성한 경기에 보내라고 지껄이는 거야?”

“저는 주인님의 전언을 전했을 뿐입니다.”

“전언? 도크토레(Doctore, 검투사 훈련관)에게 보내 장기간 훈련을 거치게 해도 검투경기에서 살아남는 게 쉽지 않아. 행진하는 법은 둘째 치고 누군가를 찔러보지도 않은 애송이를 데려다가 뭐? 검투경기? 누군가를 죽이고 싶으면 사람을 시켜서 직접 죽이라고 해! 게다가 넵투날리아 축제를 기념하는 경기에 출전시키라고? 오늘이 세데킴(sedecim, 16)이니 넵투날리아가 열리는 위긴티 트레스(viginti tres, 23)까지 고작 일주일도 남지 않았어. 그 기간 동안 무슨 훈련을 시키라는 거야? 일이 잘못되면 내 목도 성치 않을 거다. 천금을 줘도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신성한 축제를 기념하는 장소에 초를 뿌리는 행위를 한다면 그 책임자인 자신의 목도 위험할 수 있었다. 고작 돈 때문에 정신 나간 시민 놈의 농간에 놀아날 부분이 아니라는 소리다.

“주인님께서는 베스티아리이(Bestiarii, 맹수와 싸우는 검투사)에 출전시키면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베스티아리이?”

검투사는 싸우는 방식과 모습에 따라 종류가 나눠졌는데 베스티아리이 역시 그 중 하나다. 베스티아리이는 오후에 있을 검투시합의 흥을 돋우는 역할로 검투경기 오전에 이뤄진다. 대개 검투사 양성소의 훈련을 따라가지 못한 낙오자들로 구성되기에 이들은 검투사로 취급되지도 않았다.

페루사니는 솔깃한 표정으로 코락스를 바라봤다. 베스티아리이라면 어차피 유혈사태를 일으켜 관중들을 흥분시키기 위한 떨거지에 불과하다.

페루사니는 까칠까칠하게 솟아오른 자신의 턱수염을 어루만지다가 코락스에게 말했다.

“으흠. 그런 거라면.. 하지만 저 애송이, 노예도 아닌 것 같은데?”

“맞습니다. 노예는 아닙니다. 하지만 주인님께 빚이 있습니다. 주인님께서 세 번의 검투경기를 치르면 그 빚을 모두 탕감해주신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상당한 재물도 약속하셨지요. 더 자세한 사정을 원하십니까?”

“하! 그야말로 상당한 악취미로군. 그 말은 저 애송이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건데.. 어이 애송아. 내가 살길을 열어줄 테니 그 기회를 잡도록 해라. 카이로스는(Caerus, 기회의 신) 앞머리밖에 없어서 놓치면 다시는 잡을 수 없으니 말이야. 너 같은 애송이가 발을 디딜만한 곳이 아니니 괜히 목숨 버리지 말고 꺼져!”

서후는 자신에게 말을 꺼내는 날카로운 인상의 페루사니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번거로운 일이 발생할까봐 꺼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시 말해 서후가 거부하면 데메트리우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기 위함이지 이건 서후를 위해 한 말이 아니다. 물론 그 의도야 어쨌든 소년을 위한다는 측면이 더 강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피할 수 있었다면 이곳까지 순순히 따라오지도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이곳으로 밀어 넣었을 작자가 데메트리우스였다. 호의를 가장했지만 눈 깊숙한 곳에 번뜩이는 악의를 봤다. 게다가 그는 오히려 자신의 제안을 거부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독한 일이지만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그를 죽이고 도망치는 일? 소년의 육체로 그를 죽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뿐더러 죽인 후가 더 문제다. 무려 로마시민을 살해한 것이 되어버리니까. 결국 그를 죽이려면 목격자 전원을 죽여야 한다. 하지만 칼 한 자루도 주어지지 않은 자신이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보다 빠른 맹수가 나를 추격한다면 맞서 싸우는 것만이 유일하게 생존할 수 있는 길이겠지요.”

“호오. 이놈 봐라?”

페루사니는 이채서린 눈으로 서후를 위아래로 살폈다.

“눈빛도 나쁘지 않고 근골도 괜찮은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너무 어려. 쯧.”

혀를 차던 페루사니는 코락스를 바라봤다.

“그 빚! 내가 갚도록 하지. 이놈 잘 키우면 괜찮은 검투사가 될 것 같아서 말이야.”

코락스는 단호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어렵습니다.”

“자네 주인도 전혀 손해 보는 일이 아닐 거야. 빚에 베스티아리이로 출전하여 얻게 되는 금액까지 얹어주지.”

코락스는 다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안 됩니다. 이 소년은 넵투누스의 화를 입은 소년입니다. 이 소년을 바다에서 건진 것이 저희 주인님이시고 저희 주인님은 다시 이 소년을 넵투누스께 바침으로 혹시 모를 진노를 피하고자하십니다. 그러니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하신다고 하셔도 아마 받아들이지 않으실 겁니다.”

페루사니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그놈의 미신은! 마르스니 헤르쿨레스니 숭배하는 놈들치고 제 명에 사는 놈들 본 적이 없다. 그럴 시간에 검이나 한 번 더 휘두르는 게 목숨을 보전하는 유일한 길인 것을.”

“글쎄요. 그건 모르는 것이지요. 딕타토르(dictator, 독재관) 술라께서도 말씀하신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꿈속에서 신이 가르치는 대로 행동하는 것보다 더 믿을 만한 것은 없다고 말입니다.”

기원전 81년, 로마는 집정관이 모두 공석이었다. 술라는 10만의 병력으로 원로원을 압박해 독재관에 취임했다. 독재관은 로마 건국 초기부터 있었던 직책이나 상설직이 아닌 임시직으로 비상시에 국론일치를 위해 한 사람에게 모든 권한을 맡기어 극복토록 하였다. 두 집정관 중 한 명이 임명했는데 임기는 6개월이었다.

독재관은 술라 이전, 1백 20년 동안 임명된 적이 없는 관직이고 집정관이 없는 상태에서 독재관에 올랐으니 불법을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나 술라는 자신의 불법적인 행동에 책임을 묻지 못하도록 대사령을 발표, 전권을 무기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이 전권에는 건설, 파괴, 영토의 처분, 관리임명권 등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금(當今)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술라의 말이니 페루사니는 입을 다물었다. 술라는 무서운 남자다. 원로원이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독재관에 오르기 전에도 후에도 무참하게 학살을 벌인 잔혹한 자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박한다는 건 술라에게 반발한다는 뜻과 같았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코락스라는 노예가 그것을 노리고 말한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페루사니는 기분이 크게 상했다.

“젠장. 애송아. 네 기회는 이제 영원히 지나갔다. 이리 와서 네 사망계약서나 작성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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