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7화 (7/298)

# 7

7. 화산.

7.

데메트리우스는 엔초비가 얹어진 빵을 한입 베어 물은 다음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사실 난 엔초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짭조름한 맛이 일품이긴 하지만 내게 익숙한 맛은 아니거든. 그런데 자주 먹는 편이야. 정말로 필요한 게 아니더라도 정말로 원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절실히 필요하고 원하게 되는 때가 있지. 그게 언제인 줄 아나?”

“······.”

서후가 침묵을 지키자 데메트리우스는 빵을 노예에게 건네 준 다음 말했다.

“부러울 때. 나는 굶고 있는데 호화스런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낭비하고 있는 로마인을 바라볼 때 생각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로마인이 되고 말겠다. 그러면서 남은 음식을 슬쩍 훔쳐 먹은 것이 바로 엔초비 찌끄래기였어. 익숙하지 않지만 맛있더군. 또 다시 아니 계속해서 맛보고 싶을 정도로. 아마 자네는 굶주려 본 기억이 없을 거야. 아 기억을 잃었다고 했나? 하긴 기억이 있었어도 굶주림에 대해선 알지 못할 테지. 테세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그리스인이 바다에 표류 중이었으니 자네는 아마도 귀족이었을 테고 기억을 못할 뿐, 로마시민권자일수도 있는 노릇이니 말이야.”

자유민은 물론 외국인도 로마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이 시민권제도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를 열게 만든 즉 로마제국의 근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서후가 머뭇거리고 있자 데메트리우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억을 잃었다니 얼마나 편리한가? 도망자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증명할 필요도 없고 노예 신분으로 떨어졌어도 얼마든지 감출 수 있으니 말이야.”

“저는 노예가!”

“아 아! 자네 말을 믿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야. 사실 자네가 어떤 사람이든 이제 그런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아. 자네가 내게 빚을 졌다는 사실이 중요할 따름이지. 무슨 빚이라고 했나? 나로서는 조금 황당한 질문이지만 경황이 없을 거라 생각해서 이번 한 번만은 차근히 설명해주지. 다만 내 입장에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건 인지하고 있는 게 좋을 거야.”

서후는 데메트리우스의 말에서 데메트리우스가 해방노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원래 노예였던 자들이 높은 신분을 지니게 되면 얼마나 더 악랄해지는지에 대한 글귀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서후 자신이 본 것인지 아니면 리처드가 역사에 대해 공부할 때 알게 된 것인지 판가름하기 어려웠다. 굵직한 기억이 아닌 것들은 서후, 항우, 리처드의 모든 기억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기에 눈앞의 남자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 배의 주인은 바로 이 남자 데메트리우스였으니까.

서후가 잠잠히 침묵을 지키고 있자 데메트리우스가 말을 이었다.

“첫째.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네를 바다에서 건져냈다. 내 명이 없었다면 어차피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을 테니 별 상관없는 말이기는 하나 이 위험은 단순히 바다에 뛰어드는 수고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야. 자네를 구한 그 일이 내게는 큰 화가 될수도 있다는 말이지. 바다의 신 넵투누스(Neptunus)의 화를 입어 바다에 표류하고 있던 자라면 더더욱 그렇지.”

“······.”

서후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바다의 신을 운운하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하지만 일단 구했다. 구할 수 있는 자를 외면한다면 그것 역시 화가 될 테니 말이야. 그 후에 어찌할지 결정해도 될 일이고. 아무튼 베루스는 자네가 마르스와 헤르쿨레스의 주시를 받는 특별한 운명을 타고난 자라고 하더군. 바로 이런 점이 위협이라는 소리다. 신들의 주시를 받는 자는 어쨌든 그 주변을 풍파로 몰아넣기 쉬운 인물들이니 말이야. 나는 나의 행운이 그 폭풍속에 휘말려 사라질 것을 감수하고 자네를 구한 셈이야. 이게 자네가 내게 진 가장 큰 빚이야. 하지만 나는 이 빚을 받을 생각은 없다. 딱히 내가 너그러운 사람이라 그런 건 아니야. 이런 일에는 이윤을 남기기보다 손을 터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을 뿐이지.”

데메트리우스는 포도주로 입을 가신 뒤 바닥에 뱉어내며 노예가 가져온 천으로 입을 닦았다. 그런 다음 다시 서후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 배에 거하는 비용과 앞으로 먹고 마실 것들에 대한 비용은 지불해줬으면 좋겠군. 아. 기억을 잃었다고 했나? 그러니 차용증을 좀 써줘야겠어. 그게 싫다면 잃었던 기억을 다시 되살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데메트리우스의 말에 그가 자신의 말을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서후가 가진 진실은 거짓보다 더 거짓 같은 진실이다. 오히려 이상한 취급을 당할 것이 분명하니 차라리 말을 않는 것이 도리어 나았다.

“저는 기억을 잃은 게 맞습니다.”

“기억을 잃었는지 아닌지 그걸 내가 어찌 확인할 수 있겠나? 단 기억을 잃지 않았는데 기억을 잃었다 주장하는 거면 나는 더 이상 자네를 꺼릴 이유가 없다. 그건 곧 자네가 도망자 신분에 있다는 걸 증명하는 꼴이니까.”

잠시 말을 멈추고 서후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데메트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베루스는 자네를 전장으로 보내라더군. 그리하면 마르스와 헤르쿨레스가 나를 전장에서 멀리할 것이라고 말일세.”

“저.. 전장이라니요?”

“나도 의아해. 많이 쳐줘야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소년에게 대체 군신과 투신이라는 신들이 왜 이렇게 관심을 보이는가 싶어서 말이야. 뭐 이건 내 사정이니 더 밝힐 필요는 없고 자네는 한 가지만 기억하게. 내게 뱃삯과 음식 값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걸 빌미로 얼마든지 자네를 노예로 팔아버릴 거야. 자네가 로마시민이든 아니든 기억을 잃은 자네는 그걸 증명할 수단이 없으니 나로선 상관이 없고. 기억을 잃지 않았더라도 방금의 태도에서 테세우스라는 자가 처한 현실을 내게 알려준 셈이지. 그러니 역시 거리낄 것이 없다.”

서후는 데메트리우스의 담담한 말에 담긴 진심을 읽었다. 눈앞의 이 남자는 공갈 협박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일어날 사실에 대해 나열하고 있었다. 때문에 서후는 마른침을 삼키며 데메트리우스라는 로마인을 바라봤다.

“뭘 원하시는 겁니까?”

“원하는 것이라.. 딱히 그런 건 없었다. 애초에 자네를 구한 것도 소년이 망망대해를 표류 중이니 호기심에 노예들을 시켜 시체라도 건져 올리라 한 것이었고. 그런데 살아있더군. 아무튼 자네에게 원하는 것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베루스 이 친구의 말을 듣고 보니 바라는 것이 생기더군.”

서후는 데메트리우스의 발언에 한 단어가 강하게 떠올랐다.

“전장. 자네를 전장으로 보내면 나는 전장에서 멀어진다. 나 같은 소시민에게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나? 더욱이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일이지. 하지만 군인으로 보내기엔 너무 어려. 또한 군인이라고 해서 모두 전장에서 서는 것도, 바로 전장에 투입되는 것도 아니지. 그럼 그게 내게 화가 될 수도 있단 말이야. 그러니 남은 선택지는 몇 가지 안 된다.”

참담한 심정이 된 서후는 그 말에 예상되는 단어가 또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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