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4화 (4/298)

# 4

4. 로마라고? 그 로마?

4.

참고로 로마의 이름은 삼명법(tria nomina)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그나이우스는 개인 이름으로 집에서 호명하는 아명에 가깝고 폼페이우스는 씨족이름으로 가문이름이자 대표적으로 쓰이는 이름이며 마그누스는 호칭이나 별명인데 주로 같은 성안에서 가계를 구분하는 이름으로 쓰였다.

모든 로마인이 삼명법의 이름을 가진 것은 아니나 이러한 이름체계는 로마인과 외국인을 구분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간혹 사명법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테면 술라가 자신을 펠릭스(Felix, 행운아)라 불러 달라고 말한 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라 불린 경우다. 술라(Sulla 구릿빛, 붉은 마마) 역시 별명으로 날카로운 눈빛과 희고 붉은 마마자국으로 인한 험상궂은 인상으로 인해 붙여진 경우였다.

폼페이우스의 별칭은 특별했는데 ‘마그누스(Magnus, 위대한 사람)’라는 칭호는 단순히 큰공이나 전공을 세웠다고 주어지는 칭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칭호는 아프리카에서 그의 군대가 불렀던 이름인데 술라 펠릭스가 인정함으로 확정되었고 폼페이우스도 그때부터 정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경황 중이라 정신이 없었음에도 서후는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갑자기 폼페이우스는 왜 거론한단 말인가?

“폼페이우스는 갑자기 왜?”

그러자 드왈드는 씨익 웃음을 지으며 서후에게 말했다.

“내가 널 돕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군. 이 정도 정보면 내 몸값이 아깝지 않을 테니 말이야.”

서후는 드왈드라는 흑인이 뭔가 오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일단 침묵을 지켰다.

“데메트리우스라는 로마인이 자랑하듯이 말을 꺼내더군. 그 폼페이우스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이라고 말이야.”

폼페이우스에 대해 잘 몰랐지만 들어보니 대단한 위세를 자랑하는 장군 같은데 한낱 노예상과 면식이 있다고? 서후는 의아함을 느꼈다.

“노예상과 장군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군요.”

“노예사업은 엄청난 수익이 나는 사업이다. 겉으로는 상업자체를 천하게 여기는 풍토지만 탐욕스런 로마인들이 노예사업인들 손을 안 뻗칠까? 금전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관계라면 면식이 있는 게 이상할 건 없지. 무엇보다 그게 사실이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아. 너 발에 차고 있는 그 쇠고랑이 의미하는 게 뭘지에 대해 생각해봤냐?”

“그게 무슨 뜻입니까?”

“쯔쯔. 이래서 순진한 놈들이란. 내가 예상한 걸 데메트리우스라는 작자가 예상하지 못했을까? 그러니까 네가 좋은 가문의 자제라는 걸 예측했을 텐데도 왜 네게 쇠고랑을 채웠을까?”

서후는 멍한 표정으로 드왈드를 바라봤다.

“너를 겁박해서 네 몸값을 반드시 받겠다는 뜻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겠나? 노예로 팔아버릴 것처럼 겁을 주면 그가 원하는 대로 몸값을 지불하겠다는 계약서를 작성할 테고 그 계약서를 받은 로마인은 그제야 널 풀어주고 대우하는 척 하겠지. 후에 몸값은 계약서를 가지고 네 가문에서 받아낼 테고 말이야. 대충 감이 오나?”

서후는 더욱더 황당한 표정이 되어서 드왈드를 바라봤다. 서후를 웃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드왈드는 서서히 표정이 일그러져갔다.

“서.. 설마? 너 정말로 아스 한 푼 없는? 가문이 없어? 아니. 아니. 그것보다는 조난당했을 때 다 죽은 거냐? 잠깐 잠깐. 그것도 좀 말이 안 되니.. 너 일종의 도망자 신분에 있었던 건가?”

어쩌면 처참한 비극이라 할 수 있는데도 거기에 대해선 일절 말도 꺼내지 않고 위로도 하지 않다가 자신의 계획과 달라지니 그제야 말을 꺼내는 드왈드였다. 심지어 그 말에서도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서후는 그 모습에 자신이 처한 현실을 보다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해적이라더니.. 그나저나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서후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대로라면 정말 노예로 끌려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슨 수로 이 상황을 벗어난단 말인가?

그 순간 항우와 리처드의 믿을 수 없는 전투실력이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자신이 그들은 아니었지만 서후는 그들의 모든 것을 경험했다.

‘싸워야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이런 비리비리한 팔뚝과 다리로 누구와 싸우는 일은 현명한 짓이 아니다. 그보다도..’

살해경험은 많지만 그 경험들은 항우와 리처드의 삶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겪으며 얻은 것들이다. 당연히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결의하는 것도 꺼림칙할뿐더러 그게 딱히 효과적인 수단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작용때문인지 서후는 전투와 살인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했다.

결국 남은 방안은 한 가지였다. 드왈드가 말한대로 몸값을 지불하는 일말이다. 하지만 무슨 수로?

서후의 안색이 어둡게 변하는 것을 본 드왈드는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되는 일이 없군.”

거센 파도가 배를 후려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점점 더 빨라지다가 일정한 진동을 내며 울리는 북소리와 그에 맞춰 움직이는 노젓는 소리는 자신이 처한 현실이 결코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차라리 환상이었으면 좋겠다.’

어디론가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마구 솟아났지만 묵직한 쇠사슬은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걸 잔혹하게 일깨워주고 있었다.

얼마간의 침묵 후 온갖 감정으로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힌 서후가 입을 열었다. 아니 그 전에 드왈드라는 흑인을 유심히 살펴봤다. 잘 단련된 팔과 상체 근육 그리고 몸 곳곳에 남아있는 흉터는 그의 삶을 여실히 대변하고 있었다.

“드왈드.”

서후의 부름에 드왈드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말시키지 마라. 애송이.”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묻지도 않은 것을 상세하게 설명하더니 필요없다고 판단을 내리자 부르지도 말라는 기세를 완연하게 풍기고 있었다. 드왈드의 상반된 모습에 서후는 배알이 살짝 뒤틀렸지만 아쉬운 건 자신이었기에 개의치 않고 다시 말했다.

“해적이라면서 동료들은 어디 갔습니까?”

해적질하다가 잡혔다면 드왈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쇠고랑을 차고 어딘가 처박혀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나 이곳에는 드왈드와 서후 둘 뿐이었다.

드왈드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서후를 바라보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 배가 아니었다.”

“무슨?”

“거참. 말귀 더럽게 못 알아 처먹네. 약탈하던 배는 이 배가 아니었다고. 그러다 잡혔고 노예로 팔린거다. 이 배의 주인에게 말이다. 뭐 일단 사형당하지 않고 노예로 팔린 것으로도 다행이라 여기고 있긴 하다만.. 쯔. 아무튼 재수가 없군.”

드왈드는 말을 하다가 서후를 힐끗 바라보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서후는 그 모습에 기분이 살짝 상했다. 막말로 자신이 드왈드에게 해적질시킨 것도 아니고 자신이 드왈드를 잡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재수는 내가 더 없다. 짜샤. 그나저나 하아..’

진정하려고 해도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죽은 것도 황당한데 그러니까 로마? 정말로 로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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