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275화 (완결) (275/275)

275화

소년은 눈을 가늘게 뜨고 테이블 위에 올려진 한 켤레의 신발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마찬가지로 그 신발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가 한 명 있다.

“오스틴, 뭐 알아낸 거 있어?”

“……앰버 누나는?”

그 말에 턱을 쓰다듬으며 신발을 노려보던 앰버가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맞은편에는 30대 정도의 남자가 앉아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뭐가 보이는지 말해보렴.”

남자의 말에 앰버가 곧바로 대답한다.

“신발이요.”

“그렇지. 신발. 또 다른 건?”

그 말에 오스틴이 대답했다.

“오래된 것 같아요.”

“좋아, 얼마나 오래된 것 같지?”

앰버가 그 말에 끄응, 하는 소리를 내고 남자를 바라봤다.

“아빠,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다시 질문하실 생각이죠?”

“영리하구나, 그 영리한 머리를 이 신발을 관찰하는 데 써먹으면 어떨까.”

앰버가 그 말에 푸후, 하고 한숨을 쉰 다음 다시 신발을 바라봤다.

“밑창에 진흙이 엉겨 붙어있네요. 늪 같은 곳에 다녀왔나?”

“바보 누나, 늪에서 엉겨 붙은 진흙이라면 이건 뭔데?”

오스틴은 그런 말과 함께 검지로 밑창에 붙어있던 뭔가를 집어 올렸다. 진흙과 한데 엉켜 굳어있던 지푸라기였다.

“밀짚인데. 그럼 밀밭이구나. 비가 온 다음에 질어진 밭을 밟은 거야.”

“그렇지, 밀밭이지.”

두 아이의 아버지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앰버는 그 말에 테이블 위에 턱을 올려놓고 신발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쿠르스트 변경백령에는 최근에 비가 온 적이 없는데.”

오스틴의 말에 다시 한번 남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니 기쁘구나.”

“놀리는 거 같아요, 아빠.”

오스틴의 말에 그의 아빠는 픽 웃으며 대답했다.

“너희 둘을 놀려먹는 건 언제나 즐겁지만, 이건 너희들이 원해서 하는 놀이였잖아.”

아빠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모르겠어요, 레드우드 영지에 있는 밭인가?”

“맞아.”

휙 하고 던진 앰버의 말에 아빠가 동의하자, 그녀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을 들은 앰버의 표정이 다시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그냥 때려 맞춘 건 의미가 없지. 앰버는 그 버릇을 아직 버리지 못했구나. 이 아비가 납치된 다음 유일하게 남은 증거가 이 신발뿐이어도 그렇게 때려 맞출 생각이니?”

아버지의 말을 들은 앰버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빠를 납치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긴 한가요?”

“그러게 말이다. 그럼 오스틴이 납치되었다고 생각해보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오스틴이 콧잔등을 검지로 비비며 대답했다.

“졸지에 납치되다니 서럽네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신발을 보고 레드우드 영지에 있는 밭을 예상할 수 있는 방법은…….”

오스틴이 불만을 터뜨리며 말을 이어가던 와중, 앰버가 대답했다.

“레드우드 영지의 작물은 로티샤 호수 덕분에 빨리 자라는 편이죠. 다른 영지는 아직 추수에 들어가고 있지 않을 거예요.”

앰버의 말에 그녀의 아버지가 눈을 빛낸다. 곧바로 옆에 있던 오스틴이 아, 하는 소리를 낸다.

“맞아, 지금 밭에 볏짚이 떨어졌다는 건 추수를 하는 중이라는 뜻이고, 그렇다면 레드우드 영지밖에 없어.”

“누나 말에 동의만 하다 끝날 거니?”

아버지의 말에 오스틴이 고개를 저었다.

“신발의 주인은 왼 다리를 절고 있을 거예요.”

“이유는?”

“오른 신발은 밑창이 많이 닳아 있는데 왼 신발은 그렇지 않고, 대신 끌린 흔적이 있어요. 게다가…….”

앰버가 그런 오스틴의 말을 채가듯이 가로챘다.

“왼 신발끈을 꽉 조이지 않았네요. 왼 다리가 불편하니 그렇게 한 거겠죠.”

“아, 누나! 내가 말하려고 했는데.”

“그러게, 빨리 말했어야지.”

“그래? 그럼 누나가 몰래 장롱에 숨겨놓았던 과자도 빨리 먹었어야지.”

“야!”

두 아이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남자는 손뼉을 한 번 쳤다.

“자,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내 기억이 맞다면, 둘 다 이제 해야 할 일이 있잖아. 나도 해야 할 일이 있고.”

아버지의 말을 들은 두 아이가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 목록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래, 둘 다 고생하렴.”

두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남자가 웃는다.

“클로에.”

“마틴, 애들은 어디 갔나 봐요?”

클로에의 말에 마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앰버는 검술, 오스틴은 역사.”

클로에가 그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앰버가 기사가 되고 싶어 할 줄은 몰랐어요.”

“엄마 피를 이어받아서 그런 거 아닐까?”

마틴의 말에 클로에가 어머, 하는 소리를 냈다. 클로에는 지금도 꾸준히 검을 수련하는 중이고, 여전히 과거 왕도 기사단장이었던 모리스 핀들턴 정도의 실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사단장이라. 제 딸이라 그렇게 보이는 걸지 모르겠지만, 두 아이 모두 재능이 있어요.”

클로에의 말에 마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리 머지않은 시간이 지나면 두 아이 모두 구심점에 마력을 모을 수 있게 될 거다. 그 어린 나이에 거기까지 도달했으면 누가 뭐라고 해도 굉장히 빠른 편이다. 계속해서 노력하다 보면…… 어쩌면 2차 성징이 오기 전에 발현점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두 아이가 사이가 좋아서 다행이에요.”

“글쎄, 사춘기가 되면 서로 으르렁거릴걸. 지금도 낌새가 보이던데.”

오누이가 안 싸우면서 자랄 수는 없다. 그 말에 곧바로 클로에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사춘기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마틴은 그런 클로에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겪어야 하는 일이야. 아직까지는 두 아이에게 우리가 완벽해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죠. 저도 알아요.”

독립심이 생기는 과정이다. 두 아이의 눈에 서서히 우리의 부족한 점이 보이기 시작할 거다. 그게 진짜 우리에게 부족한 뭔가인지, 아니면 그 아이들의 단순한 착각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부모가 완벽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서 스스로 행동할 수 있게 되는 거다.

“나는 아이들의 사춘기가 빨리 왔으면 좋겠어.”

“서럽지 않을까요? 분명히 우리를 멀리하는 상황이 올 텐데.”

뭐, 자기 방의 문을 잠그기 시작할 테고 나를 마주치면 시선을 홱홱 돌리고 우리 몰래 일탈을 해보기도 하고 그러겠지.

“어린애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야. 아이들이 나를 외면한다고 슬퍼할 게 아니라, 아이들이 커가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지. 그리고, 두 아이가 우리를 멀리하면 뭐 어때. 우리끼리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거잖아.”

마틴이 클로에의 손을 잡자, 클로에가 의자를 마틴 쪽으로 당겨 앉았다.

“국왕 폐하께서 앰버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에요.”

마틴은 그 말에 움찔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국왕 폐하께 그런 성벽은 없어. 게다가 결혼까지 해서 후계까지 보셨잖아. 우리 주례까지 봐주신 분인데 험담을 하면 쓰나.”

마틴의 말에 클로에가 웃으면서 그의 허벅지를 손으로 탁 친다.

“하여튼, 그런 소리가 아니에요. 이전에, 왕도 행사에 참석했었잖아요? 모임에서 앰버와 세자 저하가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눴었죠.”

그래, 이야기를 들어보니 거의 다섯 시간 동안 화장실 한 번 안 가고 수다를 떤 모양이던데. 마틴이 그 말을 듣고는 클로에의 이마에 입을 살짝 맞추고 대답했다.

“어머니를 닮아 매력이 넘쳐서 그런 거지.”

“그러게 말이에요. 어쨌든, 국왕 폐하께서는 그 모습이 썩 보기 좋으셨나 봐요.”

마틴이 그 말에 살짝 코웃음을 쳤다.

“국왕 폐하께서는 결혼이 늦은 편이셨지. 세자 저하는 좀 빨리 결혼하셨으면 하는 모양인가 봐?”

마틴의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남녀의 감정보다는 친구의 감정일 거야. 나중에 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밝혀지겠지.”

그 둘이 가지고 있는 감정이 단순한 우정인지, 아니면 거기에서 더 나아간 남녀의 사랑인지.

“우리도 그랬잖아? 처음에는 단순한 상사와 부하 관계였지만. 나중에 그게 아닌 걸로 밝혀졌지.”

마틴의 말에 클로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당신 말이 맞지만, 그거 아세요?”

“세자 저하와 앰버가 서로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려는 거야? 이미 알고 있어.”

마틴의 말에 클로에가 어머,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눈썰미는 여전하네요.”

“이게 어디 늙는다고 사라지나. 그리고, 그런 문제는 알아도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게 나을 때도 있지.”

이제 막 열 살 된 아이가 초등학교에서 연애한다고 부모가 나서서 커플링을 맞춰 주는 건 좀 웃기잖아.

“그렇겠죠. 하지만, 앰버가 단지 세자비라는 자리에 올라보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마틴이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글쎄…… 그런 자리를 탐내는 아이가 나와 함께 영지 시찰을 다니며 쟁기를 들고 땅을 파고 다니나?”

앰버는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몰래 영주성을 나와 이것저것 해보고 다닐 가능성이 100%라고 마틴은 확신했다. 활달하고, 심심하면 뭔가 해본 적 없는 일을 하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아이다.

그에 비해 오스틴은 이것저것 들쑤시고 다니기보다는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그걸 골수까지 쫙 뽑아먹고 나서야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는 성격이다.

“지금은 그렇지만…….”

“클로에, 당신은 역시 세심한 편이야. 하지만 괜찮을 거야.”

말을 마친 마틴이 클로에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아이를 키우고 있어.”

“하지만, 그 최선이 부족하면?”

“그럼 그로 인해 찾아오는 고통도 함께 견뎌야겠지.”

클로에는 안겨 있다가 손을 뻗어 마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우리 조금 있으면 저녁 먹어야 하는데.”

마틴의 말에 클로에가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꽉 주며 대답했다.

“그럼 서둘러야겠네요. 싫어요?”

“싫다고? 그럴 리가 있나. 앰버랑 오스틴이 태어날 때 당신이 내 머리를 쥐어뜯어 급성 탈모로 만들려고 할 때 얼마나 즐거웠는데. 다시 한번 경험하고 싶어.”

고통을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소리가 개소리라는 걸 마틴은 그날 온 두피로 느낄 수 있었다. 클로에가 크으, 하는 소리를 냈다.

“그땐 눈에 보이는 게 없었어요. 당신은 머리카락이 다 뽑히는 기분이었겠지만, 저는 천천히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기분이었다고요.”

“왜 미안해하는 거야? 즐거운 기억이었다니까.”

말을 마친 마틴이 클로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간다.

그렇게 두 사람의 저녁 식사는 한참 뒤로 미뤄졌다. 나름대로 정찬 형식을 갖추고 있던 메뉴도 샌드위치와 음료수로 바꿨다.

일을 마치고, 나란히 침대에 기댄 채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클로에가 마틴의 잔에 음료수를 채워준다.

“앞으로도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당신, 그 말이 이제는 입버릇이 된 것 같아.”

마틴의 말에 클로에가 그와 팔짱을 끼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그럼, 이제 당신도 입버릇이 된 대답을 들려줄 때가 된 것 같아요.”

마틴이 그 말에 웃음을 흘리다가 들고 있던 음료수 잔을 내려놓고 클로에의 뺨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여태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렇게 만들자.”

지금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니까. 깊어가는 밤중에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나와 클로에는 불을 줄이고 침대에 누웠다

《레드우드》, 완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