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세자가 상당한 신뢰가 담긴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틴 레드우드. 네 나이를 고려해보면 너는 나만을 왕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내가 일선에서 물러났을 때, 내 아들의 치세까지 보필하게 될 가능성이 높겠지.”
나는 그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가 되면 저도 많이 늙어있을 겁니다.”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내 나라를 위해 해주었던 것 이상으로 더 많은 것들을 해줄 것이라 믿는다.”
나는 세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겠습니다. 함께 늙어가시지요.”
“그러지. 이제 돌아가 보도록.”
나는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돌아온 나는 클로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변경백이라니. 거기에 더해 백작위까지 받으신다니.”
클로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나를 바라봤다.
“구체적으로 좀 말해봐. 어떤 거야?”
국경에 접한 영지를 다스리는 백작이라는 것 정도는 대충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권한과 의무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변경백과 다를 수도 있으니까.
“일단, 변경백이라는 작위 하나만 가지고도 어지간한 후작들과는 동급의 예우와 의전을 받아요. 거기에 더해 백작위까지 있으면…….”
클로에는 잠깐 고민하나 싶더니 나를 바라봤다.
“사실상, 왕족이 아닌 귀족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 중 하나인 것 같은데요.”
공작위가 있기는 하지만, 파이크 왕국의 관습상 공작위는 세자가 아닌 다른 왕자들이 가지게 되는 작위이다. 게다가, 왕이 되지 못한 왕족은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왕이 철저히 관리하기 때문에 사실상 단순한 명예 작위라고 봐야 한다. 내가 아버지를 여생을 편히 보내게 해드리겠다며 레드우드 영지의 구석탱이에 박아버리는 것과 비슷한 거지.
클로에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변경백은 자신의 영지에 의무적으로 왕국의 기사단 중 하나를 주둔시킬 수 있고, 자체적으로 두 개의 기사단을 더 보유할 수 있어요. 세 개의 기사단 모두 왕명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변경백의 지시에 따라야 하죠.”
세 개의 기사단을 가질 수 있다. 원래 왕국의 군대는 국왕 및 왕도 주변에 머무르는 다섯 기사단의 지휘를 따르지만, 변경백의 영지에 주둔하는 왕국의 기사단만큼은 예외다.
“또한, 영지의 병사들에게 지급할 수 있는 병기의 종류 제한이 완전히 풀리고…… 국왕에게 먼저 허락을 구해, 그 허락을 받는다면 보유할 수 있는 사병의 제한이 없어요.”
국경에 접해, 전쟁을 대비해야 하는 영지로서 가지게 되는 특혜다.
“보유한 군대와 주둔하는 기사단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된 비용은 전부 국가에 세금을 낸 것으로 간주하죠. 물론, 주기적으로 왕도에서 감사가 오기는 하지만.”
즉, 내가 이번에 내야 하는 세금이 5000론도인데, 군대 유지비로 3000론도를 사용했다고 하면 나는 올해 2000론도만 내면 되는 거다. 물론, 그렇다 해도 군대 유지비로 6000론도를 썼다고 나라에서 1000론도를 환급해주지는 않는다.
“거기에 더해 본래 영주들의 사병이 받는 훈련은 정규 왕국군의 훈련보다 실전성이 떨어지는 것만 허락되지만 변경백의 군대는 정규 왕국군과 같은 수준, 또는 그 이상의 훈련을 받아도 문제 삼지 않아요.”
이제 와서 들어보니, 한 영지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영주라고 해도 이런저런 제한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하긴, 미치지 않고서야 한 나라의 왕이 휘하 귀족들을 통제하지 않을 리가 없지.
“그 모든 특권을 가지는 대신 부여되는 의무는 하나죠.”
“국경수호.”
내 대답을 들은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든 것이 허락되는 이유는 딱 하나다. 전쟁이 나면 변경백의 군대는 적국의 공세를 가장 먼저 받아내는 방파제가 되어야 한다. 그 의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군에 대한 제한을 확 풀어준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국경수호라고 하는 의무가 이 모든 특권을 허락해 줘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의무라는 뜻이기도 하다.
“변경백은, 폐하께서 가장 신뢰하는 귀족이 아니라면 내리지 않아요. 심지어, 영지가 국경에 맞닿아 있어도 폐하께서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변경백의 지위를 내리는 대신, 인근에 기사단을 몇 주둔시켜 두는 식으로 국경을 방비하죠.”
당연한 일이다. 그 정도의 권한을 쥐여준 녀석이 대뜸 왕에게 칼날을 들이밀게 되면 그 규모와 질을 달리하는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왕가를 갈아치우고 싶은 게 아니라면 아무에게나 줄 수 없는 작위다. 어쩌면, 왕궁 기사단 이상으로 세자가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기대에 부응시켜 드리는 건 어렵지 않지.”
“하지만, 변경백의 지위를 오래 유지하는 데 성공한 가문은 드물어요.”
그만한 신뢰가 있어야 줄 수 있는 작위다. 당연히, 국왕을 실망시키거나 왕이 바뀌었을 때 새로운 왕에게 변경백을 유지시켜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신뢰를 주지 못한다면 잃을 수밖에 없다. 나는 그 말에 차분하게 대답했다.
“우리 아이들이 내가 가진 작위를 유지할 능력이 없으면, 잃는 게 당연한 거야.”
능력이 없으면 자리에서 물러나는 건 당연한 순리다. 오히려, 그걸 강제로 붙들어두려고 기를 쓰는 게 웃긴 거다.
간신이 변경백과 국왕 사이를 이간질한다고? 그걸 미리 파악해서 싹을 자를 능력이나, 일이 발생한 다음 사태를 수습할 능력이 없으면 변경백의 지위는 잃는 게 당연하다. 그것도 다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의 일부다.
“그건…… 그렇겠죠. 맞아요.”
클로에가 내 대답을 듣고 잠시 뒤 편한 표정으로 수긍한다.
“그나저나,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 아이들이라고 말하시네요.”
“표현이 마음에 안 드나 봐? 바람이라도 피라는 건가?”
“그럴 리가요. 그냥, 갑자기 듣게 되니 몸이 좀 간지러워서.”
뭘 이런 걸 가지고.
“어쨌든, 아직 정해진 건 아니니까. 너무 좋아할 필요는 없어.”
세자의 입에서 나온 이상 확정된 사실이라고 해도 괜찮지만, 확실히 내가 사람들 앞에서 절차에 따라 작위를 받기 전까지는 좋아할 필요 없다. 지금 너무 좋아해버리면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었을 때 크게 실망하게 될 테니까.
사람들은 좋은 일이 일어나면 앞으로 펼쳐질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며 계획하기 마련이다. 당장 내일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주제에 다가올 미래의 일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내는 건 낭비다.
미래가 현재라는 이름으로 확실히 다가오기 전까지는, 지금은 눈앞에 있는 일들을 계속해야 한다.
“마차는 준비했어?”
“네, 조금 있으면 특별집행부가 쓰는 건물 앞으로 올 거예요.”
그리고, 내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귀족이 모인 자리에 가서 결혼식에 쓸 비용을 충당하는 일이다.
“가서 너무 많이 먹으면 탈 날지도 몰라요.”
“술을 말하는 거야, 돈을 말하는 거야?”
내 말에 클로에가 내 쪽으로 코트를 건네주며 대답했다.
“둘 다요. 뒤돌아주세요.”
내가 뒤를 돌자, 클로에가 코트를 나에게 입혀준다.
“뭘 이렇게까지 하고 그래.”
“안 해줄 이유는 또 뭘까요. 잘 다녀오세요. 그동안 저는 차가운 방에 쑤셔박혀서 서류나 보고 있을 테니까.”
“그래, 니가 차가운 방에 쑤셔박혀서 서류나 보는 동안 나는 맛있는 거 먹고 좋은 술 마시고 돈 벌어 올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클로에가 내 등짝을 한 번 때렸다. 나는 손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귀족들이라.”
사실, 그 친구들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귀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본 적도 없고, 사실 지금까지는 로델린 덕분에 그쪽 방면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괜찮았으니까.
“마틴 레드우드 님, 도착했습니다.”
신나게 굴러가던 마차가 멈춘 곳은 왕도 인근에 자리 잡은 한 저택이었다. 바란 켄웨이 자작의 소유다. 평수로 계산하면 약 2만 3000평 정도가 나오는 말도 안 나오는 규모의 대저택이다.
“뭐, 돈은 많은 친구다 그거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차에서 내렸다. 곧바로, 집사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다.
“켄웨이 저택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마틴 레드우드 님.”
“이런 근사한 저택을 관리하려면 보통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니겠군요.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내 말에 집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부족한 점이 있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자, 켄웨이 자작님께서 한참 전부터 만나 뵙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바로 안내해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네, 그래 주시지요.”
집사의 안내를 받아 방 안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앉아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틴 레드우드,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보게 되는 건 처음이군.”
얼굴에 한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나에게 손을 내민다. 나도 마찬가지로 웃는 표정으로 그 손을 잡았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켄웨이 자작님. 어머니로부터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내 말에 그가 아아, 하는 소리를 내고 짐짓 어두운 표정을 짓는다.
“이거 참, 레드우드 부인께서도 꼭 참석하셨으면 했네만.”
“아무래도, 요 근래 있었던 교단과의 오해로 인해 겪으신 고초 때문에 피로가 쌓이신 모양입니다.”
이전에 로델린이 나에게 말해주었던 귀족들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들에 대해서는 이미 숙지하고 있다. 나는 켄웨이 자작과 만나본 적이 없으니, 원칙대로라면 켄웨이 자작을 알고 있는 누군가의 소개를 받아 이 자리에 참석해야 한다.
때문에, 소위 말하는 ‘귀족의 격식’이라는 걸 차리기 위해 켄웨이 자작은 어머니에게 모자가 꼭 함께 참석해 주셨으면 한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거기에서 로델린은 구금 생활로 인한 피로로 참석이 힘들 것 같다는 핑계를 대고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다음, 나만 켄웨이 저택으로 향한 거다.
쓸데없는 허례허식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의 암묵적인 관습은 어지간해서는 지켜주는 편이 좋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방 안을 슥 둘러본 나는 입을 열었다.
“수석을 모으시는 취미가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내 말에 켄웨이가 응? 하는 소리를 낸 다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 먹기 전에는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저런 아이들이 왜 그리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어.”
수석. 신기하게 생긴 돌들을 일컫는 총칭이다. 한국에서도 귀한 것들은 억 단위를 넘어가는 것들도 있는 문자 그대로 돈을 때려 박아 즐기는 취미의 대표주자 중 하나다. 내가 방 안에 놓여있는 돌들을 바라보는 기색을 비치자, 곧바로 켄웨이가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오늘 귀한 손님이 올 예정이라고 해서, 선물로 따로 빼놓은 것들이 좀 있다네.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들 중에서도 빼어난 녀석들이야.”
나는 그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귀한 것은 그 값을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내 말에 그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제아무리 수석의 가격이 귀하다지만, 어찌 사람과 사람의 좋은 만남에 비하겠는가.”
말을 마친 그는 근처에 놓여있던 수석 중 하나를 가리켰다. 소위 산수경석이라고 부르는 물건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저런 건 가격이 얼마나 할까. 취미로 수석을 모으는 사람도 당연히 있지만, 다른 목적으로 수석을 모으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예술이 좋아서 미술품을 모으는 사람이 있고, 뭔가 써먹을 곳이 있어서 미술품을 모으는 사람도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쉽게 말해, 이 친구가 수석을 모으는 이유는 뇌물로 써먹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한 3년 전에 만오천 론도를 주고 구한 물건이네.”
“같은 무게의 금보다 더 비싼 가격이군요. 대단합니다.”
내 말에 그가 그렇지? 라는 말과 함께 한 번 미소를 지어준다.
“자네에게 주고 싶네만.”
뇌물에도 등급이 있는 법이다. 뇌물의 등급을 따지는 기준은 간단하다. 노골적일수록 수준이 낮은 뇌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돈이나 금괴를 주는 건 하급이다. 이렇게 환금성이 높은 예술품 및 수집품을 건네주는 쪽이 더 급이 높다. 만오천 론도라. 도착하자마자 올린 수익치고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본격적으로 다른 귀족들까지 도착한 다음에 그들이 내놓은 물건에 대해 조금 기대해봐도 괜찮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