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264화 (264/275)

264화

나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레온의 말을 부인했다.

“이전에 베로나 제국과의 전쟁 중의 행적이나, 최근 교단의 선동에 마음이 흔들리셨던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이전까지의 명석함이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한 모습이 보여 가슴이 아픕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데이먼이 안색을 하얗게 바꾼 채 나를 향해 말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냐?”

자기 밥그릇이 위협받고 있다는 걸 확신한 데이먼이 마침내 침묵을 깨고 입을 연다. 나는 그런 데이먼을 보고 웃었다.

“레드우드 영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형님. 저를 믿으세요.”

“이…… 자식이!”

데이먼이 나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한심한 친구가 휘두른 주먹이 내 몸에 닿는 일은 없었다.

“세자 저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지는 제가 잘 관리하겠습니다. 레드우드 영지 외곽에 머무르실 곳을 마련해 드릴 테니, 여생은 저를 믿고 편안히 보내시면 됩니다.”

레드우드 영지는 내가 먹겠다. 당연히, 이제 서른 중후반 정도의 나이인 레온에게는 문자 그대로 모욕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현대 한국으로 치면 회사에서 과장 정도를 할 나이인데, 갑자기 명예퇴직을 하게 생긴 상황이니까.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내가 레온을 위해 레드우드 외곽에 근사한 저택을 마련해 줄 리는 없다.

“네가…… 네가, 지금 패륜을 저지르려고 하는 것이냐. 정녕 내가 네 말을 제대로 들은 게 맞느냐?”

“패륜을 저지르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제 말을 제대로 들으신 게 맞습니다.”

구석에 박혀서 죽은 듯이 살아. 아버지를 죽인 자식이라는 타이틀은 제아무리 내가 이전까지 세운 공적과 명성으로도 수습할 수 없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내 선에서 정리할 수 있거든.

“마틴, 마틴. 그래도 시간이 충분히 지나면…….”

옆에 있는 데이먼이 급하게 말을 꺼낸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형님은 언제나 아버지의 마음을 잘 헤아리셨죠. 아마, 아버지도 형님이 옆에 있어 준다면 훨씬 더 편안한 마음으로 여생을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너도 가야지, 시간이 충분히 지나긴 뭘 지나 인마. 나는 시선을 돌려 레온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언제나 둘째 부인인 제인 레드우드를 총애하셨고, 둘째 부인께서도 아버지께 아내로서 언제나 좋은 모습을 보여주셨지요. 당연히 함께 생활하시는 편이 기쁘실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사려 깊게 살펴 동행하도록 준비할 테니, 아버지는 염려를 놓으셔도 괜찮습니다.”

말을 굉장히 길게 했지만, 줄이면 간단하다. 내 꺼니까 니들은 다 꺼져.

“그럼 이제 다시 레드우드 영지로 모시겠습니다. 건강히, 오래 사세요 아버지. 간만에 대화 나눠서 즐거웠습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레온이 어금니를 문 채 대답한다.

“지옥불에 떨어져 불타라. 감히 아비를 이리 취급하다니. 네가 무사할 성싶으냐. 악마가 네 녀석의 목을 거둘 것이다.”

나는 그 말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악마라. 한 마리 잡아봤는데 별거 없더군요. 온다면 또 내쫓지요 뭐.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에게 어찌 그런 험한 말을 하십니까? 변하겠다고 하신 분이 찻물이 식기도 전에 그런 말을 하시니, 정말로 많이 노쇠하신 모양입니다.”

설마 그 나이에 치매가 생긴 거니?

“닥쳐라! 네가…….”

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밖을 향해 말했다.

“아버지와 형님이 다시 영지로 돌아가실 예정이다! 준비해라!”

말을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데이먼과 레온을 슥 훑어봤다.

“그럼, 저는 일이 바빠서. 제가 말씀드린 아버지에 대한 배려는 조만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두 사람을 남겨놓고 문을 나갔다.

“괜찮으세요?”

문을 나서자마자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클로에가 다가와 말을 건다. 나는 그녀와 함께 복도를 걸으며 대답했다.

“어떤 의미야?”

내 말에 클로에가 어…… 하며 말꼬리를 잡아 늘이나 싶더니 이윽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두 가지네요. 첫 번째로, 어쨌든 아버지잖아요? 두 번째로, 그 정도 조치로 충분할까요?”

“모순되는 걱정이네.”

아버지를 한창 열심히 일한 나이에 은퇴시켜버리는데 마음이 편하냐와, 조금 더 조져놓는 편이 좋지 않겠냐라고 하는 질문이 함께 들어오다니. 내가 도대체 무슨 대답을 하는 게 적절한 건지 모르겠다.

“그러네요.”

클로에가 순순히 동의하고 나서 여전히 내 눈치를 본다.

“나는 괜찮아. 그리고, 조치는 저 정도로 충분해.”

레온이 머무르게 될 장소는 내 통제하에 있을 거다. 고용되는 사람도 내가 정할 테고, 그들의 봉급도 내가 줄 것이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이 보인다 싶으면 바로 가서 경고를 날릴 테니까. 애초에, 나에게는 레온을 죽인다는 선택지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최대한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리고, 서른 중반에 갑자기 한 영지를 통치하는 영주에서 동네 백수가 되어버리는 삶은 어쩌면 죽는 것보다 더 비극적일 수도 있다. 물론, 그걸 노리고 한 건 아니지만, 원래 이런 건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떻게 느끼느냐가 중요한 거라지.

“오늘 저녁에 참석하기로 했었지? 명단을 부탁한 것 같은데. 한쪽 손에 들고 있는 서류가 거기에 관련된 내용이었으면 참 좋겠어.”

이전에 세자와 수정구를 통해 대화한 다음 참석해도 괜찮을 것 같은 귀족들의 모임을 몇 개 추려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오늘 열린다. 이미 참석하겠다는 답장은 보내놓은 상황이다.

내 말에 클로에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밀며 대답했다.

“확보한 참석자 명단이에요. 열다섯 명이 참석 예정인데.”

“처음에는 열 명 정도라고 하더니만.”

서류로 시선을 가져간 나는 명단을 체크했다. 원래 오기로 한 열 명에 더불어 추가된 다섯 명은 세자가 건네준 명단에 포함되어 있던 놈들이다.

“나를 굉장히 보고 싶었던 모양이네.”

어떻게든 인맥과 그동안 주고받은 관계를 활용해서 내가 참석하기로 한 모임 자리에 자신들도 참석하도록 한 모양이다. 눈물이 날 지경이군. 역시 사람은 자기 인생이 박살날 위기에 처하면 필사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니까.

“결혼식 비용은 어느 정도 충당할 수 있겠지.”

내 말에 클로에가 입을 헤 벌리고 나를 보다가 한마디 한다.

“세상에, 제가 입을 웨딩드레스의 씨실과 날실이 귀족들이 가져다 바친 뇌물로 만들어질 예정이라니.”

“별로 마음에 안 들어?”

내 말에 클로에가 다시 표정을 바꾸고 대답했다.

“전혀요. 돈을 주는 사람들의 목적이 사악한 거지, 돈이 사악한 건 아니잖아요.”

그래, 세상에는 부도덕적인 식당 사장이 있을 뿐이지, 부도덕적인 식당이 있는 건 아니다. 돈이 무슨 잘못을 했어. 준 사람이 뭔가 꿍꿍이가 있을 뿐이지.

“가기 전에 잠시 세자 저하께 찾아갈 생각이야.”

어차피 내 가문 일이긴 하지만, 내가 두 개의 영지를 홀랑 집어먹는 것에 대해 세자가 부정적인 의사를 표시할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그런 눈치가 보이면 사이가 틀어지기 전에 잘 기름칠을 해놓아야겠지. 당연히, 그를 위해서는 먼저 이 이야기를 전했을 때 세자의 반응을 확인해야만 한다.

“네, 지금 바로 사람을 시켜 세자 저하께 허락을 받을게요.”

클로에와 헤어진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세자가 보낸 사람이 도착했다.

“내궁 안으로 모시라는 세자 저하의 분부가 있었습니다.”

알현실이 아니라 내궁이라. 그래 뭐, 우리가 서로 공유하고 있는 비밀들이 이제는 알현실로는 감당되지 않을 정도로 많아지긴 했지. 안내를 받아 내궁의 정원에 도착한 나는 클럽을 들고 바닥의 공을 치고 있는 세자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내 말을 들은 세자가 툭, 하고 클럽으로 공을 굴려 보낸 다음 들고 있던 클럽을 옆에 기대놓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래, 무슨 일이지?”

바로 본론이라. 나야 좋지.

“레드우드 영지를 제가 좀 가지고 싶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어허허, 하는 소리를 냈다.

“그건 내가 아니라 자네의 아버지와 상담해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자네가 계승권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나는 그 말에 살짝 인상을 썼다.

“저와 아버지 사이의 관계를 세자 저하께서 모르실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내 말에 세자가 키들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계승권이 있다 해도 자네와 레드우드 백작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레드우드 영지의 주인은 자네가 아니라 데이먼 레드우드가 될 가능성이 높지.”

“그렇습니다.”

세자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공을 치며 놀던 정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레드우드 백작령과 쿠르스트 산맥의 영지라.”

그렇게 중얼거린 세자가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기색을 보인다.

“제 아버지와 데이먼 레드우드는 이미 세자 저하에게 반기를 들어 올렸습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레드우드 영지를 가지고 있느니, 차라리 저에게 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레드우드 영지와 쿠르스트 산맥은 상당히 거리가 멀어. 인근에 붙어있는 두 개의 영지라면야 나도 흔쾌히 허락하겠지만…… 그 정도로 멀리 떨어진 두 개의 영지를 관리할 자신이 있는가?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레드우드 영지를 놓칠 수도 있어.”

레드우드 영지의 백성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면, 근처에 있는 다른 영주들이 살짝 그들을 부추키고, 더 나아가 세자에게 백성들이 이러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명분과 함께 나에게서 레드우드 영지를 뜯어 가려는 작업을 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없으면 달라고 하지도 않았어. 나는 미리 생각하고 있던 대답을 돌려주었다.

“저에게 주어진 영지인 쿠르스트 산맥은 채굴할 수 있는 자원이 많지만, 땅은 척박해 수확량이 적습니다. 반대로, 레드우드 영지는 채굴할 수 있는 이렇다할 자원은 없지만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수원인 로티샤 호수 덕분에 작물 수확량이 뛰어나지요.”

레드우드 영지와 쿠르스트 산맥은 서로가 필요로 하는 것을 산출할 수 있는 땅들이다. 서로 의존하는 관계가 성립된다면, 레드우드 영지가 내 아래에서 떠날 생각을 할 리가 없다.

“게다가, 영지민들의 반발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듭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레드우드 가문의 장자다. 장자가 아버지의 영지를 이어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 시대에서, 백성들이 내가 레드우드 영지의 주인이 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리 없다.

“두 개의 영지를 잘 관리하는 건 마누라 두 명과 함께 사는 것보다 더 힘들어.”

“무슨 뜻인지 이해합니다.”

영지민들의 머리에 불만이 자리 잡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결국 차별이다. 쿠르스트 산맥을 홀대하거나, 레드우드 영지를 홀대하게 된다면 그 영지에 사는 백성들의 마음이 나에게서 떠나는 건 피할 수 없다. 잠깐 나를 바라보던 세자가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충분한 조언을 해주었다고 생각되는군. 뭐, 지금까지 자네가 보여 준 모습이라면 영지 두 개를 잘 관리하는 것 정도는 그렇게 어렵지도 않을 것 같아.”

말을 마친 세자가 다시 기대놓았던 클럽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쿠르스트 산맥은 그 위로는 하이랜더와 사나운 야생동물들이 자리 잡고 있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면 제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군사적 요충지다. 당연히, 일반적인 영지와는 그 다스리는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지. 타국과 맞닿아 있는 이상 더 많은 권한을 허용해 줄 것이고, 또한 그에 걸맞게 국경 수호라는 의무가 주어져야 할 것이다.”

말을 마친 세자가 클럽을 몇 번 휘둘러 자세를 잡은 다음 말을 이었다.

“특별집행부의 업무가 정리되면 변경백의 작위를 내리도록 하지. 레드우드 가문이 세습하던 백작위와는 별개다.”

“그 말씀은…….”

세자는 잔디 위에 올려진 공을 툭 쳐 날려 보내며 대답했다.

“쿠르스트 산맥에 있는 자네의 영지는 변경백령이 될 것이다. 마틴 레드우드는 쿠르스트 변경백과 레드우드 백작을 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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