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긴 항해 끝에 우리는 테네스 공국의 항구에 도착했다.
“마틴 레드우드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덧 정도 되는 남자들이 항구 앞에 서 있다가 내가 내리는 것을 확인하고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가장 앞에 서 있는 청년이 내민 손등에는 오팔이 하나 박혀있었다.
“통제를 담당하시는 분입니까?”
내 말에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메이슨 롱보트라고 합니다. 대단한 실력은 아니지만 이런 쪽에는 제법 조예가 깊으니, 믿고 맡겨주셔도 됩니다.”
“마틴 레드우드입니다. 세자 저하께서 골라 보내주신 분인데, 겸손이 너무 심하시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뒤편의 남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그들이 지키고 있던 통을 확인했다.
“이겁니까?”
내 말에 메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정제에 제법 시간이 걸렸지만, 지원을 많이 받아서 어떻게든 시일에 맞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내용물을 한번 확인해보시겠습니까?”
나는 그 말에 맥주통을 막고 있는 마개를 따보았다. 안에서 알싸한 냄새가 확 올라온다. 맥주통 안에 들어있는 액체는 짙은 녹색이었고, 점성을 띄고 있었다.
“걸쭉하네요. 투여에 시간이 걸리겠는걸요.”
내 말에 메이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틴 레드우드 님이라면 잘 해내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겠지. 고래 아가리 속에 들어가서 약을 주입하는 역할은 네가 아니라 나니까.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 통을 툭 쳤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뒤편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포경선의 준비가 끝나기 위해서는 하루 정도 필요한 모양입…….”
평화롭게 진행되던 이야기는, 뒤편에서 날아온 뭔가에 의해 중단되었다.
“공?”
날아온 것은 푸른색 공이었다. 공 안에서 희미하게 치이이, 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 공을 멀리 집어 던졌다. 이상한 소리를 내던 공은 물속에 빠졌고, 잠시 뒤 쿠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물기둥이 솟구쳤다 가라앉는다. 동시에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
“평안들 하십니까?”
공이 날아온 곳에는 광대 분장을 한 남자가 한 명 있었다. 커다란 공 위에 뒷짐을 짚고 선 채 히죽거리는 녀석의 얼굴을 본 나는 혀를 찼다.
“친구, 우리 구면인 것 같은데.”
내 말에 녀석이 키들거렸다.
“구면이라니. 아, 그런 것도 서로 만난 걸로 쳐주나? 몽정하면 꿈속에 나온 여자를 찾아가서 결혼이라도 하려 들겠어.”
이야, 치는 대사에 잔가시가 제법 돋아있는데. 어디 한번 서로 성격 긁어볼까? 누가 더 기분이 더러워지나 보자고.
“뭔 개또라이 같은 소리야? 꿈속에 나온 걸로 청혼을 하다니. 하고 온 꼬라지만큼이나 머릿속도 알록달록 맛탱이가 간 친구였군.”
내 말에 녀석이 잠깐 나를 응시한다. 나는 그런 녀석을 보고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농담이야 병신아. 그냥 웃고 넘기면 될 일을 왜 정색까지 하고 그래? 무서워서 뭔 말을 못 하겠네.”
내 말에 녀석이 이내 입이 귀에 걸리도록 함박웃음을 지으며 공 위에서 양손을 꽉 마주 잡은 다음 쭉 폈다. 서늘한 느낌이 들어 주변을 바라보니, 바닥에 드리워져 있던 온갖 사물들의 그림자가 햇빛이 쏟아지는 방향을 무시한 채 반시계방향으로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녀석의 손에는 꽤나 큼지막한 경적이 하나 쥐어졌다.
“광대야 마술사야?”
둘 중 하나만 하지 그래. 녀석이 입에 경적을 무는 순간, 나는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뭘 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보고 싶은 기분이 아니네.
띠용,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입에 물고 있는 경적에서 갑자기 새빨간 권투 글러브가 튀어나와 내 몸을 때렸다.
“크흡!”
띠용, 하는 소리는 듣는 사람들은 웃길지 몰라도 저 권투 글러브에 배를 얻어맞은 내 입장에서는 전혀 웃기지 않았다. 충격이 어찌나 격렬한지 파앙, 하고 내 등 뒤의 공기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다.
“웃어, 친구. 활짝.”
녀석은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린 채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상자 하나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빠바밤,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리고 겁나 흉측하게 생긴 광대 모형이 튀어나와 나를 향해 날카로운 검을 휘두른다. 공격을 막아내면서 녀석의 배에 발차기를 박아넣자, 녀석의 배가 풍선처럼 크게 부풀더니 뒤로 휙 튕겨 나간다.
“하나하나가 전부 흑마법입니다. 극도로 뒤틀렸어요.”
메이슨이 긴장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본다.
“아니, 이건 서커스야!”
광대는 신경질적으로 그런 외침을 날리고는 이내 자기 입을 막고 키들거렸다.
“실수했군. 화내는 광대라니. 그런 건 광대가 아니지. 응?”
녀석의 얼굴 분장이 그 잠깐 사이에 변했다. 웃음을 표현하던 얼굴의 분장은 슬픔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한 채 녀석은 한 손을 들어 올려 토끼 모양을 만들더니 거기에 대고 말을 건다.
“피터,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으드득, 빠드득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녀석의 손이 그 형태를 바꾼다. 손가락의 뼈와 살점, 핏줄 같은 것들이 서로 뒤엉켜 만들어진 토끼와도 같은 형상.
“나쁘다고 생각해에!”
녀석은 뒤틀린 자기 손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목소리를 바꿔 자문자답을 한다.
“피터가 네가 저지른 일이 나쁜 일이라고 말하는데? 피터, 더 말해봐. 나쁜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
“혼내줘야해에~”
녀석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남아있는 멀쩡한 손으로 뒤틀린 손을 쓰다듬었다.
“그래, 맞아. 하지만 그 전에 기회를 주는 게 어떨까?”
“그래야 하나아?”
“그럼!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녀석은 그렇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쾌해지는 일인극을 마치고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친구, 이쯤에서 멈추는 게 좋을 거야. 오늘은 그냥, 경고하러 온 것뿐이야. 그래. 어쩌면 정말로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응?”
말을 마친 녀석이 자기 목을 뒤로 젖히더니, 목 안에 손을 집어넣어 우산을 쑥 뽑아내 펼쳤다. 살구색 우산에는 사람의 입술이 한가득 달라붙어 있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며 희미한 신음을 흘리는 입술이었다. 저 우산의 재료가 뭔지는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그럼, 다음에 볼 때는 웃으며 만나자고.”
으하하하하하!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바람이 확 불어닥쳐 녀석의 몸을 허공으로 띄워 올린다. 녀석이 서 있던 장소 바닥에서 하얀 장갑을 낀 손들이 무수히 솟아나더니, 박수갈채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정신을 차려봤을 때, 허공에 떠오른 녀석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박수가 잦아들고, 땅에서 솟아올라 박수를 보내던 손들이 다시 땅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진다.
“…….”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클로에.”
“엘렌 리버플로우 양에게 연락을 취해볼까요?”
“그래 줘.”
클로에에게 해야 할 일을 전달한 나는 메이슨에게 다가갔다.
“표정 푸시고, 이렇든 저렇든 오늘 하루는 원래 쉴 예정이었잖아요? 마련된 숙소로 안내를 부탁하겠습니다.”
“네? 아, 네. 그렇죠. 참…… 알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메이슨이 멍해져 있던 표정을 어떻게든 수습한 다음 우리를 항구 근처의 여관으로 안내했다. 방에 도착한 우리는 수정구를 앞에 두고 엘렌과 교신했다.
― 흑마법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렇게까지 변형된 흑마법은 처음 봅니다. 굉장한 실력자였어요. 잠깐이었지만, 소름이 돋을 지경이더군요.”
이어지는 메이슨의 설명을 쭉 듣고 있던 엘렌이 혀를 찼다.
― 흑마법이 확실하네.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같은 의견이었을 거야.
“하지만, 흑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녀석은 뭔가를 제물로 바치는 모습도 안 보이고, 그렇다고 자신의 몸에 피해를 누적하지도 않았어요.”
메이슨의 말에 엘렌이 잠깐 고민하나 싶더니 입을 열었다.
“메이슨, 잠깐 자리를 비켜 줄 수 있을까?”
“알겠습니다.”
메이슨이 문을 나갔다. 클로에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말과 함께 방을 나섰다. 방 안에는 혼자 남자, 곧바로 엘렌이 입을 열었다.
― 혹시, 네가 이전에 꿈속에서 봤다고 하는 녀석 중 하나야?
“그래.”
내 말에 엘렌이 역시, 라고 말한 다음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 녀석을 먼저 처리하지 않으면 네가 제안했던 계획은 진행할 수 없어.
“그래야겠지.”
어떤 식으로든 방해할 거다. 게다가, 이번 계획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향유고래를 통제하는데 사용하는 마법이다. 흑마법이건 그냥 마법이건 어쨌든 녀석이 마법을 한가락 할 줄 아는 녀석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 제물도 없이 흑마법을 쓸 수는 없어. 그건 실력과 연구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원래 그렇게 작용하는 물건이야. 금속을 녹이지 못하는 산성 물질은 산성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아.
제물 없이 사용하면 더 이상 흑마법이 아니다. 그렇기에, 흑마법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도 발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방금 전 메이슨이 했던 진술은 틀리지 않았어.”
녀석이 뭔가를 바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 그림자의 회전.
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것 같다. 녀석과 본격적으로 치고받기 전에, 갑자기 바닥에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들이 제멋대로 움직였지.
“거기에 뭔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 녀석은 계약마가 될 예정이야. 악마와 계약한 건 분명하고, 헤로스의 지시에 따라 너를 방해하러 올 정도라면 자신과 계약을 맺은 악마와도 좋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헤로스의 요청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으니까. 나처럼 자신이 계약마가 된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있지 않다는 건 분명하다.
― 제물로 바칠 할 만한 영혼은 지옥에 썩어나지. 물론, 그걸 제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지옥의 영혼에게 동의를 받아야겠지만…….
지옥에 떨어져서 고통받고 있는 영혼 입장에서는 차라리 제물로 사용된 다음 영원히 세상에서 지워지는 편을 원할 것이라는 게 엘렌의 해석이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네.
“지옥의 영혼들을 제물로 바쳐 흑마법을 사용한다는 거군.”
― 그러기 위해서는 지옥과 이 세상을 엷게나마 겹쳐야 할걸. 그림자가 회전한 건 그 과정에서 생긴 필연적인 결과일 거야.
엘렌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 그림자의 움직임은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기도 해. 그렇다고 정말로 지옥의 시간 흐름을 이 세상으로 끌어올 수는 없으니. 시간이 빨리 흐른다면 응당 발생하게 될 현상을 하나 고른 거야.
즉,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보일 법한 요소인 그림자의 움직임을 선택해서 그것만 실현시켰다는 것이다.
그 행위를 통해 지옥과 이 세상에 생긴 아주 조금의 공통점을 가지고 지옥과 이 세상을 겹친 다음, 지옥의 영혼을 제물로 바쳐 흑마법을 구사했고.
“솔직히 말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는 제대로 알아먹기는 힘드네.”
― 나는 마법사고, 너는 아니잖아. 어쩔 수 없지.
그나마 비슷한 게, vpn을 사용한 우회 접속이 아닐까?
한국의 접속을 차단하는 사이트도 vpn을 돌리면 들어갈 수 있잖아. 물론, 실제로는 그 사람이 한국에서 접속하고 있지만, 서버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접속한 것으로 인식한다.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에이, 원리를 이해할 필요는 없다. 뭐 스마트폰을 쓰는 사람 중에 그 원리를 완벽히 이해하고 사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 그 그림자가 회전하지 않게 만들거나…… 회전하기 시작하면 그걸 다시 원래대로 돌리는 데 성공하면 된다는 거지?”
― 맞아. 바칠 제물이 없는 흑마법사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거든.
어떤 식으로 공략해야 하는지 그 원리는 알게 되었다. 문제는 그걸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이제부터 생각해야 하는 건 그 점이다.
그래서, 어떻게 차단할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