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서고 안에는 책이 별로 없었고, 문자를 적어놓은 책이 종이가 아니라 대나무나 점토판 같은 것들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살펴야 하는 양도 많지 않았다. 우리는 30분 정도의 시간을 투자한 끝에 뭔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동물의 뼈에 글을 새겨넣은 물건이었다. 전문적인 용어로는 갑골문이라고 하는 거다.
무슨 거대한 상아 같은 걸 깎아서 만들어낸 것 같은 판 위에 적혀있는 무수한 문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문자라기보다는…….”
“그래, 그림에 가깝네.”
사실, 여기에 보관되어있는 자료들의 대부분이 이와 같은 상형문자로 기록되어 있었기에 그렇게 독특한 건 아니다. 기록에 사용된 문자가 눈길을 잡아끄는 게 아니라…….
“이거 봐.”
그 그림에 가까운 문자에는 내가 봐도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확실한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해골 위에 불타는 것 같은 그림을 그려놓은 문자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다른 사람은 모를 수 있어도 내가 모르면 안 되지. 게다가 이 서고의 다른 책들에는 이런 그림이 없었다.
“이 서고에 헤로스와의 계약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적혀있다면, 그건 이 물건일 거예요.”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그 내용들을 최대한 천천히 살펴보다가 그 내용을 옮겨적었다. 필사에는 이해가 필요 없다. 그저, 따라 그리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제대로 따라 그리는 데 성공하면 이걸 해석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파이크 왕국에 분명히 있을 거다.
“좋아, 끝.”
내용을 다 적은 나는 종이를 접어 품 안에 넣고 클로에와 함께 서고에서 나왔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서고의 문이 완전히 닫혔다.
“이제 싸울 각오를 하면 되나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기에 온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야지.”
어차피 우리가 황족의 피가 있어야만 출입할 수 있는 저 서고를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을 거다. 이미 사용한 손수건도 다시 내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으니까. 그렇다면, 제국으로 하여금 우리의 목적을 오해하도록 만들어 두는 편이 좋다.
“여기는 금 토큰이 있어야 들어 올 수 있는 장소지. 훔쳐 갈 가치가 있는 책은 얼마든지 존재해.”
우리가 여기를 빠져나가고 나면 제국에서는 우리를 추격함과 동시에 이 서고 안의 서책 중에 도난된 것이 없는지 조사를 시작할 거다. 서고에 박혀있는 책 제목들을 부지런히 살피던 나는 상당히 재미있는 녀석을 발견하고 히죽 웃었다.
“클로에, 이건 어때?”
휙 하고 책을 던져주자, 클로에가 그 서책을 받아 확인한 다음 내가 짓고 있는 표정 이상으로 음흉한 얼굴을 했다.
“황궁 건축 당시에 발생한 사건들을 기록한 일지네요. 게다가 청사진이 첨부되어있어요. 이게 사라지면 제국에서는 우리의 목적을 한정 지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렇겠지.”
클로에는 그 책을 조심스럽게 배낭 안에 챙겨 넣었다.
“그럼, 몸 풀자고.”
올리비에의 죽음 이후로 칼 들고 사람 멱 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꽤 시간이 지났으니, 다가올 싸움에 대비해 몸을 충분히 풀어둬야겠지. 내 말에 클로에가 웃으며 재빠르게 레이피어를 허공에 몇 번 내지르고는 대답했다.
“몇 년을 해왔던 일인데, 며칠 쉬었다고 둔해지면 보람이 없겠죠?”
동시에 차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레이피어에 꿰인 청동 토큰들이 칼날을 타고 코등이 쪽으로 밀려 내려온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간단한 감평을 돌려주었다.
“역시 서커스단에 들어가면 돈 많이 받겠어.”
“서커스단에서 묘기를 부리느니, 마틴 님 아래에서 일하는 게 더 떨어지는 콩고물이 많겠죠.”
그 대화에 담겨있던 장난기가 우리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방심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와 클로에는 이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티온 대도서관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위에는 대기하고 있겠지.”
은에서 백동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은 토큰을 구하는 건 힘들다고 해도, 백동 토큰 정도라면 충분히 구할 수 있었겠지. 실제로 계단 위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무기가 철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은 토큰은 아직 멀었냐!”
저 멀리에서 울려 퍼지는 고함.
“어차피 우리가 올라갈 생각인데 참 열심히도 사는 친구군.”
말을 마친 나는 계단 위로 발을 올렸다.
“장소는 우리가 더 유리해. 그 점을 살리자.”
“제 자그마한 머리로는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해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지금 그럴 시간이 없죠.”
클로에의 말에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서고의 자료를 인질로 삼아.”
인질이라는 표현을 책에 쓰기는 좀 이상하지만, 어쨌든 이게 제일 적절한 표현이었던 것 같다.
“이해한 것 같아요.”
우리는 서고를 때려 부수고 서책을 작살 내도 별다른 피해가 없지만, 저 녀석들은 베로나 제국의 경비대다. 함부로 움직여서 오랜 세월 보존해왔던 안티온 대도서관의 자료들이 전투 중 소실되는 건 막고 싶을 거다. 써먹을 수 있는 좋은 방패가 있으니, 써먹어야지.
“저기, 올라온다! 전원 집…….”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가 우리의 모습을 확인하고 서고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크게 외쳤다.
“그래, 우리 왔어. 반갑냐?”
녀석의 뒤에 나타난 내 분신이 녀석의 목을 그대로 썰어낸다. 피가 뿜어져 나오고, 바닥에 머리가 구른다. 그 사이, 서고의 문이 벌컥 열리며 병사들이 우리를 노리고 무기를 치켜든다.
“창은 한 자루도 없군.”
녀석들이 손에 들고 있는 건 주로 짧은 검이다. 게다가 혹시라도 주변을 손상시키는 걸 방지하기 위해 횃불도 들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우리가 누군지 알았다면 저런 빈약한 장비를 챙겨오지는 않았겠지.”
검을 이리저리 돌리던 나는 검을 치켜들고 나에게 달려드는 다섯 명의 병사들을 바라봤다. 휘둘러지는 검을 피하며 공격한다.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도 없었다. 훈련을 열심히 받았다는 점은 검에 실려있는 힘을 보면 알 수 있었지만, 그것뿐이다.
다섯 구의 시체가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다. 이런 상황이라면…….
“달리자.”
“좋죠.”
클로에와 나는 곧바로 다음 계단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막아라! 너는 빨리 올라가서 위에 있는 아군에게 연락…… 크으!”
상황을 보고 빠르게 말을 이어가던 녀석이 내가 휘두른 검을 막아내고 뒤로 쫙 밀려난다.
“막아?”
녀석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내 검을 막아낸 녀석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떨리는 손을 진정시킨 것이 아니라, 가슴을 움켜잡는 것이었다. 저 행동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녀석은 구심점에 마력을 모은 녀석이다.
창백한 표정으로 자신의 심장 언저리를 손으로 움켜잡고 있던 녀석은 이네 눈이 허옇게 돌아가며 바닥에 쓰러졌다. 급작스럽게 너무 많은 양의 마력을 소모하는 바람에 구심점을 박아넣은 심장에 무리가 간 모양이다.
“칼린 경이, 칼질 한 번에…….”
주변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병사들의 얼굴에 공포가 자리 잡았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녀석들을 무시한 채 재빨리 계단을 올랐다.
“이런. 소식을 들은 모양이군.”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건 수십에 달하는 병사들이 무기를 든 채 인간 장벽을 쌓은 모습이었다.
“즉시 투항하면, 제국법에 의한 정당한 재판 과정을 보장하겠다. 거부할 경우 이 자리에서 즉시 처형하겠다!”
나는 그 말에 허허허, 하고 웃은 다음 대답했다.
“싸우고 싶지 않은 녀석들은 무기를 버려. 그럼 공격하지 않는다. 이 말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해서 무기를 들고 있는 녀석들은 대항할 의지가 있는 것으로 보고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을 거다.”
내 말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무기를 손에 쥐고 놓지 않았다. 훈련받은 병사들이니까. 녀석들을 보던 나는 심장의 마력을 움직이며 녀석들에게 달려들었다.
“이건…….”
내가 서 있던 장소에서 내가 지금 서 있는 장소까지 이어지는 직선 경로를 지키던 병사들은 모두 죽었다.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잘려나간 신체의 일부가 그 피 위에 철벅이며 떨어진다. 주르륵, 검을 타고 흐르는 피를 털어내며 나는 녀석들을 슥 훑었다.
“경고했다. 지금이라도 무기를 버려.”
“어림도 없는 소리. 전원, 긴장을 늦추지 마라.”
차분한 목소리고 계단 너머에서 들렸다.
“카를로스 경이다!”
두려움에 떨던 병사들이 대번에 기운을 차린다. 나는 그 말에 뒤를 돌아 그쪽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검 한 자루를 허리춤에 차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대도서관 안에 뿌려진 피와 쓰러진 시체를 보고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에서 한 가락 배운 녀석인 모양이구나. 하지만 거기까지다.”
녀석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은 일본도를 상당히 닮아 있었다. 이런 검을 쓰는 녀석들도 있는 모양이지.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채 허리춤에 일본도를 차고 있는 꼴은, 꼭 와패니즈에 심취한 양키를 보는 느낌이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상대해주마. 제국의 정병을 향해 그 날붙이를 들어 올렸을 때부터, 대가를 치를 각오는 했다고 생각하마.”
말을 마친 녀석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간 채 자세를 잡고 나를 바라본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녀석을 바라봤다.
“뭐 하고 있는 거냐. 칼 안 뽑아?”
“…….”
내 말에 녀석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는다. 우리를 막으려 들던 병사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저 기괴한 와패니즈 양키를 향해 신뢰의 시선을 보낸다. 녀석은 여전히 허리춤에 손을 가져간 채로 슬금슬금 내 쪽으로 다가오며 거리를 좁힌다.
“거참, 굼벵이도 아니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녀석을 보던 나는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채 녀석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끝이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녀석은 재빠르게 검을 뽑아 들었다.
“…….”
정확히 말하면, 검을 뽑아들려고 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네. 검은 칼집에서 절반도 뽑히지 못한 상태였고, 녀석의 머리통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린 내 검으로 인해 반으로 짜개져 버렸다.
“웃긴 놈이네. 다음 생에는 미리 검을 뽑고 자세를 잡은 다음에 공격하렴.”
칼집에 들어있는 검을 뽑아서 상대를 공격하는 것보다, 미리 들어 올려진 검을 내려찍는 게 더 빠른 건 너무 당연하다.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하게 나선 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이다.
그 속도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실력이 뛰어나야 하는데, 슬프게도 이 친구는 그런 단점을 극복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지도 않았다.
“카를로스 경이 한 칼에. 말도 안 돼.”
머리가 반으로 갈라진 시체가 풀썩 쓰러지는 광경을 지켜보던 병사들의 눈에는 아까보다 더 지독한 공포가 자리 잡았다.
“무기 버리고, 길 비켜. 안 그러면 니들 어깨 위에 올라간 수박도 저 꼴로 만들어주지. 대가리가 반으로 쪼개져도 살 재주가 있는 녀석들은 알아서 하고.”
내 말에 병사들이 주춤거리며 무기를 버리고, 옆으로 비켜서기 시작한다.
“책을 볼모로 삼을 필요는 없었네요.”
“그러게. 내 생각보다 더 많은 실력자들이 황도로 갔던 모양이야. 괜히 머리를 굴려서 손해만 본 느낌이다.”
나와 클로에는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계단을 오르고, 다시 적들과 마주치고, 녀석들을 빠르게 처리하는 과정이 이어졌고, 마침내 대도서관 밖으로 나가는 입구가 눈에 들어온다.
대도서관 밖으로 나오자, 이번에는 제법 제대로 무장한 것 같은 녀석들이 우리의 앞길을 막고 있었다. 횃불을 들고, 석궁과 활이 우리를 겨누고 있다. 그리고 그 석궁과 활을 든 병사들은 두꺼운 방패와 창으로 무장한 병사들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거기까지다! 더 이상 움직이지 마라!”
“방금 전에 머리통이 쪼개진 녀석도 비슷한 소리를 했던 것 같은데.”
그 친구 소식은 아직 못 들은 모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