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우리는 곧장 ‘레드 케그’라는 이름의 쉼터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깊은 밤이라 그런지, 정면에 보이는 긴 바 테이블 옆에 기대 졸고 있던 남자가 크흡, 하는 소리를 내고 입가의 침을 닦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 필요하슈?”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방은 필요 없고. 디에론 다프리를 만나러 왔는데.”
내 말에 잠이 아직 덜 깨어 있던 녀석이 눈에 힘을 주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술병을 들어 내용물을 쭉 들이켠 다음 입가를 훔쳤다.
“나는 댁의 얼굴도 모르고, 목소리도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데. 그 이름은 어디에서 누구한테 주워들었을까?”
나는 그 말에 입맛을 다셨다. 여기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왕도에서처럼 다 때려 부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시선이 너무 많이 끌리고, 여기에는 그 일을 덮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조금, 다른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
“만나서 이야기 좀 해 보겠다는 건데 뭐 그렇게 까칠하게 굴까?”
“만나게 해달라는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이러는 거 아니겠소, 형씨.”
나는 그 말에 하하하, 웃음을 흘렸다.
“보통 사람이 아니긴 뭐가 보통 사람이 아니야. 밥 먹고 금이라도 싸는 건가?”
내 말에 그가 히죽 웃었다.
“따져보면 밥 먹고 금 싸는 것보다 훨씬 더 돈이 되는 일을 하시는 분이지.”
나는 그 말에 낮게 휘파람을 불고 나서 말했다.
“대단하시군. 그럼 하다못해 말이라도 좀 전달해주지 그래?”
“글쎄.”
나는 그 말에 손을 내밀었다.
“만나게 해주지도 못하고, 말을 전해주지도 못한다라. 그럼 내가 줬던 돈주머니는 다시 돌려줘야 할 것 같은데.”
내 말에 녀석이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자기 손에 들려있는 묵직한 돈주머니를 보다가 대답했다.
“말은 전달해주지,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대장이 만날지 말지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나는 그 말에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댁한테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어.”
“그래서, 누가 왔다고 전해주면 될까?”
나는 그 말에 웃으면서 편지봉투를 꺼내서 녀석에게 건네주었다.
“보여주면 될 거야.”
녀석이 봉투를 받아들고는 끄응, 하는 소리를 낸 다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수다. 기다리고 있으쇼. 입이 심심하면 찬장에서 술이라도 한 병 꺼내 먹고.”
구석에 자리 잡은 문으로 다가가 노크를 몇 번 하고 문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의 걸쇠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녀석이 문 안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문이 닫히고, 다시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클로에가 잔에 술과 물을 섞어 넣은 다음 입가로 가져가며 말했다.
“만나줄 거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그 말에 웃으면서 대답했다.
“당연하지. 거기에 내 이름을 적었으니까.”
곧바로 클로에의 입에서 푸확, 하고 묽어진 술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켈록거리는 소리.
“무슨 생각을 하신 거예요?!”
나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생각을 하긴. 두고 보면 알아.”
이런 일을 할 때 생각해야 하는 것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조직의 규모와, 주로 돈을 벌어들이는 방법이다.
“이 자식들은 베로나 제국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고, 파이크 왕국의 심기도 거스를 수 없는 녀석들이야.”
두 국가의 국경을 오가며 장물아비를 하는 녀석들이다. 어느 한쪽의 눈 밖에 나게 되면 이 녀석들의 돈줄은 바짝 마르게 된다. 사실, 돈줄이 마르는 것에서 끝나지는 않을 거다.
결국, 이런 불법행위를 하는 조직은 공권력이 마음먹고 쥐어패기 시작하면 숨도 못 쉬고 얻어터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
“내가 마틴 레드우드라는 걸 알았다고 해서 베로나 제국에게 바로 일러바칠 수가 없는 녀석들이라는 거지.”
“하지만, 눈 딱 감고 제국의 보상금을 기대하면서 불어버릴 수도 있잖아요?”
나는 그 말에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확인했잖아. 밥 먹고 똥 대신 금이라도 싸는 거냐고.”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그런 것보다 더 벌이가 좋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는 건 이 녀석들의 대장이 머리도 제법 굴러가고, 수완도 좋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나를 어떻게 하려고 했다가는 자신들이 맞이할 운명 정도는 눈치챌 수 있겠지.
“보상금 몇 푼 받자고 파이크 왕국과 척을 지기는 싫을걸.”
“그건 그렇겠지만…….”
그 사이, 아래에서 누군가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벌컥 문이 열리고, 방금 문 안으로 들어갔던 녀석이 우리를 보고 인사하며 말했다.
“두목이 보고 싶다고 하십니다.”
말도 벌써 존대로 변했다. 나는 바뀐 녀석의 태도를 보고는 클로에를 향해 히죽 웃음을 지었다.
“가자.”
나와 클로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의 안내에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어두운 복도를 한동안 걸어가자 위쪽과는 다르게 꽤 그럴듯한 문이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자, 거기에는 약간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있는 중년 여자가 한 명 앉아 있었다.
“디에론 다프리? 여자일 줄은 몰랐는데.”
내 말에 중년 여성이 대답했다.
“그럼 비겼다고 해두겠습니다. 저도 그 유명한 마틴 레드우드께서 여기까지 찾아오실 줄은 몰랐으니까요.”
중년 여자는 그런 말을 한 다음 나를 훑어봤다.
“하지만, 제가 파악해둔 정보와는 다른데요.”
나는 그 말에 주머니에서 이전에 세자가 나에게 주었던 증표를 꺼내 살짝 흔들었다.
“사정이 있어서 염색을 했지.”
내 말에 디에론 다프리가 움찔하고는 대답했다.
“저희는 물건을 밀수입하지, 사람을 밀수입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그 말에 활짝 웃었다. 그런대로 눈치는 빠른 편이군.
“근본적인 면은 일맥상통하잖아? 물건이나 사람이나.”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맞아요.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죠. 알고 계시나요? 물건도 밀수입 여부는 그 물건의 위험성에 따라 결정돼요. 마찬가지로, 사람의 밀수입도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위험성이 달라지는 법이죠. 마틴 레드우드 님, 당신을 베로나 제국으로 밀수입하는 건 저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이에요.”
나는 그 말에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럼, 여기에서 거절한 다음에 일어나게 될 일은 감당할 수 있고?”
내 말에 디에론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무슨 의미로 하신 말이죠?”
“잘 들어, 디에론 다프리. 이야기하는 걸 보니 적당히 머리는 돌아가는 편인 모양이긴 한데…….”
나는 말을 마치고 나서 웃음을 지었다.
“더 머리가 돌아간다면 애초에 너에게 선택지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도 알아야지. 여기에서 거절당하면 우리는 곧바로 바이란 관문 쪽에 이야기를 뿌릴 거야. 댁이 나와 만남을 가졌다는 소문이지.”
내 말을 들은 디에론이 잠깐 침묵하나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어차피 우리는 당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베로나 제국은 이 자그마한 조직 정도는 개박살 내서 필요한 정보를 짜낼 수 있는데. 참깨를 압착해서 기름을 짜내는 것처럼.”
내 말에 디에론이 몸을 잠깐 떨었다.
“마틴 레드우드, 당신이 베로나 제국으로 몰래 들어가려고 한다는 걸 불어버릴 수도 있어.”
나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내가 제국에 몰래 들어가서 하려는 일은 별로 급한 일은 아니야. 잠잠해질 때까지 왕도로 돌아가 푹 쉬면 되겠지. 그 사이 바이란 관문의 큰손 전당포 지부는 개박살이 날 거다. 내가 계속해서 바이란 관문에다가 이런저런 소문을 퍼뜨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해? 너희 조직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사실 이 자리에서 제일 급한 건 나다. 하지만 상대는 내가 급한 걸 모른다.
“…….”
디에론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만약에 마틴 레드우드…… 당신이 베로나 제국에서 잡히기라도 한다면.”
나는 그 말에 픽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 내가 베로나 제국 안에서 잡히게 되면 너희들도 곤란하겠지.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영역이잖아? 하지만 잘 생각해봐.”
나는 달래는 것 같은 어조로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나는 잡힐 수도 있고, 잡히지 않을 수도 있어. 확률의 선택이지. 하지만, 여기에서 내 요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장담하는데 이 지부는 반드시 멸망한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가능성과 필연.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람은 무엇을 선택할까? 나는 손깍지를 낀 채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해. 댁한테 선택지는 없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중 하나가 막다른 길이라는 건 내가 이미 말해줬잖아.”
디에론이 자신의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혀를 한 번 찼다.
“코앞에 죽음이 닥친 상황에서도 고민할 여자로군. 계속 그렇게 고민하다가 망하라고. 잡아야 하는 구명줄은 이미 지나갔어.”
말을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다가갔다.
“어딜.”
나를 여기까지 안내한 녀석이 지금 분위기를 눈치채고 문으로 다가가는 나를 막으려고 했지만, 나는 곧바로 녀석의 뒤통수를 때려 기절시키고 문을 열었다.
“잠깐만요. 할게요.”
나는 그 말에 시선을 돌려 그녀를 훑어보고는 대답했다.
“이제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겠군.”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은 채 디에론을 향해 말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해. 오늘 중이면 좋고, 늦어도 내일 중으로는 베로나 제국의 국경을 넘었으면 한다.”
내 말에 디에론이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런 디에론을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별거 아닌 충고를 하나 해줄게. 사자 두 마리가 싸우고 있을 때 사이에 낀 고양이는 두 사자 중 하나의 편을 들면 피떡이 되는 법이야.
내 말에 디에론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편을 택하는 게 아니라, 빨리 그 자리에서 도망쳐야죠.”
“그래, 이 사자가 부탁한 일을 마치고 나면 파이크 왕국과 베로나 제국 중 어디에 붙을지 고민하지 말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어버려. 그편이 조직과 댁의 수명 증진에 도움이 되는 길이니까.”
말을 마친 나는 기지개를 켠 다음 말을 이었다.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으니, 나중에 내가 잡히게 되더라도 큰손 전당포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 만큼은 알아낼 수 없도록 조치를 해두지.”
“그 조치는 확실한가요?”
나는 그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도움을 받는 이상, 댁들이 위험에 처하는 건 나로서도 썩 내키는 일은 아니야. 잘못하면 제국에서 너희들을 타고 나까지 닿을 수가 있거든. 네가 먼저 제국에 입을 열지 않는다면, 우리와 너희 조직 사이의 연결점은 절대 들키지 않을 거다.”
내 말에도 불구하고 디에론은 아직도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고 한숨을 쉬고 그녀의 어깨를 몇 번 두들겼다.
“이야, 뭔가 다른 선택지라도 있어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내 말을 들은 그녀가 이내 작게 고개를 저었다.
“협조하고 잊는다. 명심하겠습니다.”
자, 이제 채찍질이 끝났으면 적당한 당근을 쥐여줄 시간이 되었다. 협박만 가지고는 동네 양아치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법이지. 협조한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한 법이다. 안 그러면 다른 생각을 할 가능성이 높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