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86화 (186/275)

186화

마지막으로 날짜와 내 지장을 찍었다.

“이러면 만족하나?”

어차피 이 녀석이 이걸 아무렇게나 공개할 수는 없으니까. 이 정도는 약속해도 문제없다. 종이의 내용을 확인한 밀론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바이론 관문에 위치한 큰손 전당포의 지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아, 이제 대화를 나눌 준비가 좀 된 것 같네.”

말을 마친 나는 히죽 웃으며 녀석을 바라봤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오늘 밤 내가 여기에 방문했다는 사실은 현재 너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쓸데없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그로 인한 책임은 네가 감당해야 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나는 마침내 이 녀석에게서 내가 원하던 정보들을 얻어 낼 수 있었다.

필요한 정보를 확보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돈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건……?”

“치료비 겸 사례금. 부족하지 않게 충분히 넣었으니 혼자 홀랑 먹지 말고 괜히 얻어맞은 녀석들도 잘 좀 치료해. 나 간다?”

인사를 마친 나는 다시 후드를 눌러쓰고 밖으로 나왔다.

“방금 전에 하신 일은, 귀족이 할 법한 일은 절대로 아니던데요.”

밖으로 나와 밤거리를 걸어가고 있으려니 클로에가 그런 말을 던졌다.

“왜, 충격 먹었나?”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보는 광경도 아니고, 제가 비슷한 일을 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그건 제가 첩보국 소속이라서 그런 거고…….”

이제 열여덟이 된 백작가 귀족 아들내미가 길거리 건달처럼 굴 줄은 몰랐다는 건가.

“귀족가의 열여덟 난 철부지 도련님들 중에 나처럼 많은 일을 겪은 녀석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내 말에 클로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마틴 님은 보통이 아니긴 하시죠. 이제는 갑자기 바다 같은 걸 가르지 않는 이상에는 놀라지도 않을 것 같아요.”

“이제 파티 전까지는 좀 쉬자고.”

왕도에서 얻어내야 할 것들은 다 얻어낸 상황이니까. 남은 건 파티에서 적절하게 연기를 해서 사람들을 속인 다음 적절한 시점에 왕도를 빠져나와 바이란 관문으로 향하면 된다. 그럼 이제 비로소 안전한 파이크 왕국을 떠나 위험하기 그지없는 베로나 제국에서 헤로스의 계약을 풀 방법을 찾아내는 데 집중할 수 있겠지.

“아직은 역시 남아있는 편이 좋겠죠?”

클로에가 던진 물음이다. 남아있는 편이 좋겠다는 말에 주어는 없었지만, 그게 첩보국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은 굳힌 모양이네.”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틴 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레드우드 부인의 아래에서 일할 생각이에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너 정도면 갈 곳이 많을 텐데 굳이 그럴 필요 있겠어?”

“레드우드 부인은 좋으신 분이세요. 마틴 님이 아니라고 해도 아래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세상에 어머니 칭찬을 싫어하는 아들은 많지 않다. 나는 그 말에 픽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으마.”

“물론 제가 레드우드 부인 아래에서 일하는 상황은 없었으면 해요.”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왕궁 근처에 도착해서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던지고 왕궁 안으로 향했다. 미행은 붙어있지 않았다.

“아, 파티에서 제가 연기해야 할 역할 말인데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역할이라니, 무슨 역할.”

내 말에 클로에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떤 게 좋을까요.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아서 주눅 든 아가씨? 아니면 마틴 님을 믿고 싸가지 없게 구는 재수 없는 여자? 아니면 단순히 마틴 님에게 완전히 맛이 가서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는 사랑에 미친 여자?”

그 이외에도 많은 역할들이 클로에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연기 폭이 넓은 아가씨였네. 지금 말한 역할들을 다 문제없이 소화할 수 있다면 다 때려치우고 극장에서 연기를 해도 되겠어.

“너무 과도하게 날뛸 필요는 없어. 다소 주변의 눈치를 보긴 하지만, 어쨌든 스스로의 힘으로 기사가 되었으니 나름의 자존심 같은 게 있는 분위기를 풍기는 게 좋겠지.”

“그렇겠네요. 평민에서 기사가 된 거면 다른 귀족들의 눈치를 보긴 하겠지만, 어쨌든 나름대로의 자긍심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클로에는 자기 턱을 쓰다듬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 마틴 님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다는 점도 확실히 보여줘야겠지.”

그런 소리를 중얼거리며 수첩에 뭔가를 적는 걸 보고 있으려니 마차는 내궁 근처에 도착했고, 나와 클로에는 마차에서 내려 인사를 하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 * *

며칠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왕도의 핀들턴 가문 저택에서 주최하는 파티가 다가왔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린 모양인데.”

우리가 내리는 와중에도 마차들이 쉬지 않고 저택의 대문 앞에 멈추고,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참석한 사람들의 머릿수가, 전승 기념으로 왕궁에서 주최할 예정인 파티에 버금갈 정도다.

클로에가 옆에서 웃으며 대답했다.

“왕도에서 핀들턴 가문이 파티를 주최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요.”

“왕궁 기사단장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모리스 핀들턴이 자주 파티를 주최하면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지.”

희소성뿐 아니라, 왕궁 기사단장이라고 하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힘도 굉장하다. 귀족 자제들 중에서도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녀석들은 썩어나고, 그런 녀석들에게 있어서 직접 왕궁 기사단장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으니까.

“거기에 더해서 세자 전하도 오기로 하셨고…… 마틴 님도 참석하니까요.”

나는 그 말에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래. 마틴 레드우드라. 요즘 왕도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사람이라고 들었어.”

다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대답을 돌려주자, 클로에가 내 장난에 어울려 줄 생각인지 마찬가지의 어조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네요. 아래에 두고 부리는 아름다운 여기사를 혹사시킨다는 소문도 있던데 들어보셨어요?”

나는 그 말에 저런, 하는 소리를 냈다.

“글쎄, 아마 그 여기사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일 처리가 능숙하지 못하다거나.”

나와 클로에가 순간적으로 눈을 마주쳤다. 팍, 하고 불똥이 튀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이내 서로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래야 하는 자리니까. 곧바로 눈에 들어오는 건 방금 전의 빈정거림으로 인해 약간 힘이 들어간 눈과, 로델린이 빌려준 머리장식으로 멋을 낸 머리였다.

제대로 화장을 하고, 드레스와 장신구로 멋을 낸 클로에는 확실히 대부분의 남자들이 눈을 허옇게 뒤집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첩보국에서 클로에에게 주로 맡긴 임무들이 왜 남자를 홀려내는 쪽에 편중되어 있었는지는 지금 모습으로도 충분히 증명되었다.

“머리장식, 잘 어울리네. 지금부터는 좋은 모습을 기대할게.”

내 말에 클로에가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머리장식은 저도 마음에 쏙 들어요. 좋은 모습이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손잡아주세요.”

내밀어진 클로에의 손을 잡고, 우리는 함께 저택의 대문까지 걸어갔다. 파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부터 몰린 사람들이 입장 전 검문을 받는 중이었고, 덕분에 대문 앞에는 약간의 줄이 세워져 있었다.

“아, 마틴 레드우드 님과 클로에 로니세라 경.”

초대장을 확인하던 사람이 나와 클로에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다가와 인사했다.

그가 우리의 이름을 말하자 곧바로 사람들의 시선이 확 쏠리고, 이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부터가 진짜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건 이미 예상했었다. 아마, 이 시선이 거두어지는 상황은 최소한 이 저택 안에서는 없을 테니. 나와 클로에는 조금의 휴식 시간도 없이 서로가 담당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야 한다.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나는 그 말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슬쩍 보며 말했다.

“우리도 순서를 기다려야 하지 않겠나?”

내 말에 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리스 핀들턴 기사단장님께서 두 분은 도착하는 즉시 통과시키라고 했습니다. 왕궁으로 들어가실 때도 검문을 받지 않는데, 하물며 핀들턴 저택에서 그럴 수야 있겠냐는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그거 고마운 일이네. 대기 중인 귀족들도 별다른 불만은 없어 보이는 모양이다. 사실, 그런 건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자기들끼리 나와 클로에를 바라보며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피곤하지는 않아?”

“네, 이런 장소에 오는 건 처음이라서 다소 긴장되기는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웃으면서 대답했다.

“앞으로는 자주 참석하게 될 거야. 빨리 익숙해지는 게 좋을걸.”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약간 숙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야겠죠, 마틴.”

입장을 기다리던 귀족가의 영애들이 클로에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는 클로에 쪽으로 시선을 던진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나와 나란히 걸어가던 클로에가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나를 향해 속삭였다.

“하, 망했다. 오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는 다 틀려먹었네요.”

“그런 거야?”

내 말에 클로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도움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해. 머리에 와인 뒤집어쓰고 다니면 찝찝하잖아.”

내 말에 클로에의 입에서 프흐, 하는 비웃음 섞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해 뜨면 아침 먹으면서 수다 떨고, 오후 되면 차 마시며 수다 떨고, 해가 지면 파티에 가서 덩실덩실 춤추면서 수다 떠는 여린 아가씨들을 상대하는데 무슨 도움까지 필요하겠…….”

이야, 이 친구 사실은 귀족 혐오 아니야?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클로에와 팔짱을 꼈다. 곧바로 클로에는 잠깐 입술을 달싹이다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잘하네.”

그리고, 곧바로 팔뚝을 타고 전해지는 따끔한 통증에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이거…….

“지금 기사 작위까지 받은 주제에 팔뚝을 꼬집은 거야?”

“뭐 어때요. 어차피 일 처리도 능숙하지 못한데. 게다가, 모시는 주인을 칼로 찌를 수는 없잖아요.”

아, 그 발언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네.

“네가 먼저 뭐라고 하지 않았으면 나도 좋은 말을 해줬을 거야.”

“그래요? 어떤 말을 할 생각이셨는지 궁금하네요.”

우리는 그런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다가, 연무장 앞에 멈췄다. 오늘 열리는 무도회는 핀들턴 가문의 저택 중 저택의 구성원들이 사용하는 사적인 공간을 제외한 나머지를 전부 사용한다. 그리고, 이런 파티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무도회장은 본래 연무장으로 사용되던 장소에 마련되었다.

“밖인데도 불구하고 연주 소리가 굉장히 선명한데?”

본격적으로 파티가 시작되기 전, 악사들이 악기를 조율하는 소리를 듣던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우리를 안내하던 시종이 바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왕궁 마법사들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탁 트인 장소지만 소리가 잘 전달되는 건 물론이고, 불빛을 보고 날아오는 벌레들도 없도록 조치를 취해두었으니, 즐기시는 데 불편함은 없을 거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안내를 마친 시종이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한다.

“핀들턴 저택의 파티 초대에 응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음료를 한잔 올려도 되겠습니까?”

준다면야 달게 먹지.

“그럼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시종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쟁반 위에 음료 두 잔을 챙긴 하녀가 다가왔다. 클로에는 적포도주, 나는 탄산수로 만든 음료.

“하아.”

클로에는 잠깐 자신의 잔 안에 담긴 내용물을 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표정의 변화는 전혀 없다.

“식초지?”

클로에의 손에 들린 와인잔 안에는, 맛이 팍 가서 식초로 변해버린 적포도주가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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