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82화 (182/275)

182화

주문을 마치고 방 안에 단둘이 남자마자, 나와 클로에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한숨을 팍 내쉬었다.

“금은화 향수라. 마음에 쏙 들어요. 고마워요.”

내가 일부러 목소리를 간드러지게 바꿔서 방금 전 클로에가 했던 대사를 내뱉자, 클로에가 인상을 팍 쓴 채 나를 바라보다가 착 깔린 느끼한 목소리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뭐 어때, 우리 사이에.”

잠깐 서로를 노려보던 우리는 난감한 표정으로 얼굴을 벅벅 비볐다. 세상에 소름이 다 돋네. 대패로 살을 밀어버려야 할 것 같은데.

“속이 안 좋아서 식사를 남길 것 같아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막상 식사가 앞에 놓이자 우리는 언제 서로를 그렇게 역겹게 바라봤냐는 듯이 빠르게 식사를 해치우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생각해봤는데 역시 베로나 제국에는 너와 나 둘이서 가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전채 요리로 나온 관자 마리네를 먹던 클로에가 커흡, 하는 소리를 내고 눈물 맺힌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왜요?”

“생각해봐, 네가 황제라면 나에게 뭔 짓을 하고 싶을 것 같아?”

내 말에 클로에가 입가를 닦으며 대답했다.

“자식을 잃은 고통에 비견할 만한 고통은 역시 부모를 잃는 거겠죠.”

나는 자식이 없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영주 대리로서 일해야 하니 거처가 일정할 수밖에 없다. 나를 노리는 것보다 훨씬 더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다.

“엘렌 양에게 보호를 부탁하려는 거군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전에도 내 어머니가 레드우드 백작가 영지와 쿠르스트 산맥을 오가는 걸 호위한 경험이 있어.”

회사가 경력직을 좋아하는 것처럼, 나도 경력직을 선호한다. 게다가, 엘렌이라면 단순한 보호가 아니라 마법적인 수단을 곁들일 수도 있다. 이 일에 가장 적합하다.

내 대답을 들은 클로에가 접시 위에 올려진 불쌍한 관자를 포크로 쿡쿡 찌르며 대답했다.

“이해했어요. 그러는 편이 좋겠네요. 계획을 다시 조정할게요.”

덤으로, 혹시나 엘렌이 그럴 의사가 있다면 앞으로도 쿠르스트 산맥의 영지에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실례합니다. 마틴 님.”

사생활이 보장되는 공간에 모처럼 자리잡은 우리는 이제 본격적으로 일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합석을 요청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 말에 문 너머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마틴 레드우드. 처음 뵙겠어요. 올브라운 후작가의 라일라라고 해요.”

후작가라. 나는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올브라운 영애.”

“합석하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겠죠?”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안 괜찮습니다.”

나 지금 바뻐, 해야 할 일 있어. 대충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찾아온 건지는 알겠는데, 그냥 얌전히 저리 갔으면 좋겠다.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었던 뭐시기 아가씨는 이내 다시 표정을 풀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시고…….”

“죄송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참이라서 다른 분들과 합석하기 곤란합니다.”

말을 마친 나는 옆에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종업원을 향해 말했다.

“이후 비슷한 요청이 들어오더라도 거절해주게.”

말을 마친 나는 문을 닫았다.

“꽤나 예쁘장한 아가씨였는데요.”

“사치를 좋아하고 아랫사람을 막대하는 아름다운 아가씨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군.”

내 말에 클로에가 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런가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고 있는 드레스는 물론이고 착용한 장신구까지 전부 사용한 적이 없는 새 물건이야.”

자주 사용하는 장신구에 생길 법한 흠집이 없다. 구두도 완전히 깨끗하고, 드레스도 세탁한 흔적이 전혀 없다.

“마틴 님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거겠죠.”

“단순히 잘 보이고 싶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새 옷과 장신구로 갈아 끼울 정도야. 돈을 물 쓰듯이 쓰는 성격이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 같아?”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아랫사람들을 막 대한다는 건?”

“아까 거리를 걸어가면서 저 여자가 부리는 하인을 본 기억이 있어. 우리가 장신구를 구입 할 때도 짐을 들고 서 있었는데, 향수를 사고 나올 때도 같은 자리에 서 있더군.”

계속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게 수상해서 기억해두었다.

“저 여자가 부리는 하인이라는 건 어떻게…….”

“드레스 단추에 새겨진 가문 문양과 하인이 들고 있던 짐에 새겨진 문양이 일치하니까. 개인적인 궁금증을 다 해결했으면, 이제는 좀 중요한 이야기를 좀 해보는 게 어떨까?”

내 말에 클로에가 곧장 서류를 꺼내 내 쪽으로 내밀었다.

“관문의 통과에 대한 문제인데. 이 녀석들의 협조를 구해보는 건 어떨까요?”

나는 서류를 훑어보고 약간 얼굴을 구겼다.

“장물아비 조직?”

자기들끼리 어떻게 조직명을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외적으로는 '큰손 전당포' 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모양이다.

도둑이나 노상강도 같은 친구들이 훔치거나 빼앗은 물건을 전문적으로 처리한다.

“고가의 장물만 취급하는 조직이라고 알고 있어요.”

귀한 물건일수록 물건을 훔친 나라에서 처분하는 건 힘들기 때문에, 이 녀석들의 도움을 빌려 장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당연히 국경 부근에 자리를 잡고 장사하는 경우가 많다.

“몰래 물건을 들일 수 있다면, 사람도 들키지 않고 제국 안으로 들일 수 있겠죠.”

“그 녀석들이 함부로 떠들 수도 있어.”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하지만 그것만 어떻게 예방할 수 있다면, 가장 깔끔하게 제국으로 진입하는 길이에요. 검토해 볼 가능성은 충분하죠.”

“왕도 안에도 녀석들의 거점이 있나?”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규모는 국경에 있는 지점들에 비해 작은 편이지만, 존재하는 걸로 추측되고 있어요.”

“추측되고 있는 건 또 뭐야. 첩보국 녀석들 허당이네.”

내 말에 클로에가 쓰게 웃은 다음 대답했다.

“첩보국은 조금 더…… 큰 물고기를 취급하거든요.”

하긴, 장물아비 조직 따위야 첩보국의 입장에서는 눈에 차지도 않고, 조사할 가치도 없는 잔챙이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보고 처리하라고?”

“그 편이 안전하다는거죠. 첩보국이 장물아비에 관심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시선이 끌릴테니까. 제국 정보처 정도라면 그 의도를 짐작할 수도 있어요.”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모양이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다음 어깨를 으쓱했다.

“왕도 치안대에 연락해서 최근 발생한 강도나 도둑 사건이 있나 알아봐.”

“당연히, 비싼 물건의 분실 및 강도 사건이어야겠죠?”

“그래.”

찾아내는 경로는 간단하다. 치안대의 사건을 살펴보고, 도둑질이나 강도를 당한 사건 중 하나를 손에 넣는다.

그 일을 저지른 녀석을 찾아낸 다음 이 큰손 전당포라는 녀석들의 왕도 지부 위치를 정중하게 물어본다.

위치를 알아내면 찾아가서, 마찬가지로 바이란 관문 인근에 자리 잡고 있는 큰손 전당포의 지점의 구체적인 위치를 정중하게 물어본다. 내 계획을 들은 클로에가 식사로 나온 생선을 포크로 찍어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떤 식으로 정중하게 물어볼지 벌써 기대되네요.”

나는 그 말에 턱짓으로 클로에의 접시 위에 살점이 헤집어진 채 방치된 생선을 가리켰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대충 그 생선처럼 만들어버리겠다고 제안하는 거지.”

내 말에 클로에가 자신의 접시 위 생선을 확인하고는 입맛을 다셨다.

“불쌍하기도 하지. 혹시, 제가 업무상 실수를 하는 일이 생겨도 절대 정중하게 지적하지 말아 주세요.”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언제쯤 필요한 서류를 받아 볼 수 있을까?”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그렇게 어려운 요청은 아니에요. 지금 화장실 가는 척 하면서 첩보국에 연락하면, 디저트를 먹으면서 받아 볼 수 있어요.”

“그럼 그렇게 해줘. 아, 그리고.”

내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던 클로에가 동작을 멈춘 채 나를 바라봤다.

“뭔가 더 지시할 일이라도?”

“지시라기보다는…… 아무래도, 파티에 가면 네가 고생을 좀 하게 될 것 같은데.”

내 말에 클로에가 웃음을 흘리면서 손을 휘휘 저었다.

“고생은 무슨.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렇게 대답을 마친 클로에가 문을 나갔다. 잠깐 클로에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밖에서 노크가 들렸다. 클로에가 돌아오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을 거다. 게다가, 그녀가 노크하고 들어올 이유는 없지.

“누구십니까?”

장담한다. 아까 겸상하자고 한 여자일 것이다.

“그 여자는 없군요.”

“그 여자가 아니라 클로에 로니세라 경입니다. 그리고, 남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내 대답을 들은 여자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을 연다.

“그 여자와는 무슨 사이지요?”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아이는 몇 명이나 낳는 게 좋을지 함께 고민하는 사이지요.”

내 말에 여자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틴 레드우드, 그 여자는 원래 평민이었다가 당신의 눈에 띄어서 가까스로 기사로 임명된 걸로 아는데요.”

나는 그 말에 얼굴을 구긴 채 대답했다.

“미안한데, 좀 나가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다음에는 험한 말을 하게 될 겁니다.”

제발, 이게 무슨 여자들이 보는 로맨스 소설도 아니고 뭐 하는 짓거리야. 좀 꺼져.

“그런 여자와 깊은 관계가 되면 당신의 체면도…….”

그래, 그만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지. 나는 냅킨을 든 채로 이 여자가 줄줄줄 이어가는 이야기를 자르고 들어갔다.

“백작가의 하녀들이 왜 제 손에 목이 졸리곤 했는지 아십니까?”

내 말을 들은 여자가 하려던 말을 멈추며 움찔한다.

“말이 너무 많았거든요. 한 번 꽉 졸라놓고 나면 마법에 걸린 것처럼 말 수가 줄어들더군요. 어떻게, 제가 영애의 수다도 좀 줄여드릴까요?”

내 말을 들은 여자가 눈을 크게 뜨고 창백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믿을 수 없어. 당신 지금, 후작가의 영애를 협박한 거예요!”

기세 좋게 소리는 질렀지만, 역시 목이 졸리고 싶지는 않은 모양인지. 저 뭐시기 영애는 그런 말과 함께 곧바로 문을 나섰다.

“잘 먹히네.”

이제는 거의 까먹을 뻔했던 나에 대한 소문이지만, 써먹으려고 하면 이렇게 잘 써먹을 수 있다.

지금 나눈 대화가 소문으로 퍼진다면, 파티에 참석해도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제아무리 그래도 금쪽같이 귀한 딸이 밤에 침대 위에서 교수형 놀이 당하는 걸 무시할 수 있는 부모가 많을 리 없잖아.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레드우드 백작도 자기 아들을 그 험한 쿠르스트 산맥으로 보내버렸으니까. 그래도, 최소한 숫자는 좀 줄어들 것이다.

“다녀왔어요.”

잠시 쉬고 있으려니 클로에가 돌아왔다.

“받기로 한 시점은?”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말씀드렸던 대로, 디저트를 먹으면서 볼 수 있을 거예요.”

식사를 마치고, 클로에가 밖으로 나가더니 서류봉투를 챙겨 돌아왔다.

그녀가 말했던 대로, 우리 앞에는 디저트와 커피가 놓여있었다.

“벤그리프 교수의 집에 도둑이 들었었다고 하네요.”

“벤그리프 교수?”

내 말에 클로에가 다소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머, 모르세요? 왕도에서는 꽤나 유명한 사람인데. 롱라인 아카데미의 교수예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봐.”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롱라인 아카데미는 귀족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기관이 아니라, 평민을 교육하는 시설이다. 애초에, 귀족들은 아카데미 같은 걸 다니지 않고 가정교사를 부르니까. 아카데미 같은 건 없다.

어쨌든, 그 롱라인 아카데미라고 하는 곳은 평민에게 글이나 회계, 법 같은 것을 가르쳐 귀족들의 업무를 보조하는 인재 양성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벤그리프 교수는 그 아카데미에서는 꽤나 명망이 높은 모양이다.

“어제 새벽에 잃어버렸다고 하니, 딱 좋지 않아요?”

“아직 수사 중이네.”

나는 히죽 웃으면서 손을 비볐다.

“큰손 전당포 왕도 지점의 위치도 알아내고, 벤그리프 교수라고 하는 자에게도 빚을 지워둘 수 있겠어.”

내 말에 클로에가 음?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그자에게 빚을 지워서 어디에 쓰시려고요?”

“어머니가 영주 대리로서 수월하게 영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아래에 둘 사람들이 필요하잖아. 도둑에게서 물건을 되찾아 돌려주면, 그 사람에게 괜찮은 인재를 좀 추천받을 수 있겠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일타쌍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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