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80화 (180/275)

180화

내 말에 로델린이 편지를 한 번 살폈다.

“왕궁 기사단장님의 가문이 왕도에서 주최하는 파티구나. 기사단장님께서 국왕 폐하께 며칠의 휴가를 받았다고 하더니.”

모리스 핀들턴과는 면식이 있다. 게다가, 평범한 파티도 아니고, 왕궁의 기사단장이 자리하는 파티니 참석하는 사람의 숫자도 많겠지.

“어머니는 왕궁 기사단장님의 휴가 소식을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모리스 핀들턴의 휴가를 내궁에 머무르는 손님인 로델린이 알기는 힘들 텐데. 내 말에 로델린이 웃었다.

“나도 듣는 귀는 있어야 너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겠니. 그리 대단한 건 아니다.”

역시, 그냥 쉬고 있으셨던 건 아니었구나. 어쨌든, 일단 이걸로 중요한 대화는 일단락되었으니. 나는 잠깐 로델린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사를 했다.

“파티 관련 준비는, 어머니께 부탁을 좀 드릴게요.”

“바쁜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알았다, 내가 잘 준비하마.”

문을 나선 나는 클로에가 머무르는 방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세요?”

“참석할 파티가 결정되었어. 왕궁 기사단장님이 참석하는 파티야.”

“그런가요?”

클로에는 쌓인 서류를 읽고 정리하느라 꽤 바쁜 것 같았다.

“너랑 함께 참석할 테니, 준비해두도록 해.”

내 말에 클로에가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나를 바라봤다.

“저랑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나는 그 말에 간단하게 대답했다.

“불필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예방해야 하잖아.”

볼 것도 없다. 가게 되면 참석한 귀족들이 어떻게든 자기 가문과 엮어보려고 눈에 불을 켤 거다.

“귀족들이 내가 아직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가 없다는 추측을 가지면 이후 내 행방에 대해 궁금해할 거야.”

어디에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그런 관심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확신을 줄 필요가 있다.

“일을 그르칠 수 있는 싹을 밟아버리겠다는 거군요.”

“너는 나랑 꽤 오랜 시간을 같이 있었고, 함께 위험한 곳도 많이 돌아다녔잖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내가 클로에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는 건 이상해 보이지 않을 거다.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니까.

“갑자기 연기를 시켜서 미안하다. 강제로 시키지는 않겠지만, 필요한 일이니까 협조해줬으면 하는데.”

내 말에 클로에가 하하, 하고 웃은 다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렌 리버플로우 양에게 부탁해도 괜찮잖아요? 오히려 신분과 지위를 고려한다면 저보다 더 효과가 좋을 것 같은데.”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엘렌 리버플로우는 이런 종류의 연기는 해본 경험이 없을걸.”

“제가 더 능숙하다는 거군요.”

클로에는 첩보국에서 이런 종류의 연기를 해본 경험이 풍부할 것이다. 할 거라면 완벽해야 하니까. 엘렌보다는 클로에와 동행하는 게 더 좋은 선택이다.

하지만, 아직 클로에의 질문은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제가 옆에 붙는다고 해도, 여전히 관심을 보이는 귀족들이 있을 거예요.”

“이미 그 권세가 높은 귀족들은 내가 너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냥 둘 거야.”

녀석들이 두려워하는 건 내가 자신들과 비슷한 수준의 가문의 여식과 결혼하는 거다. 클로에는 이제 막 기사로 임명되었고, 그 후 나를 따라다녔으니 이렇다 할 뒷배도 없고 인맥도 없다.

나라는 녀석이 클로에와 깊은 관계가 되어, 다른 권세 있는 귀족들도 나와 가족관계가 되지 못하도록 두는 것도 매력적인 선택지로 보일 것이다. 내 세력이 더 커지는 것도 막고, 견제해야 하는 가문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도 막을 수 있으니. 일타 쌍피지.

“결국, 나와 네가 깊은 관계라는 걸 알게 된 다음에도 계속해서 나에게 따라붙는 녀석들은…….”

“마틴 님과의 결혼 말고는 역전의 기회가 없는, 권세가 그렇게 크지 않은 귀족들이라는 거군요.”

“그래, 그런 가문이라면 이후 내 행방을 뒤쫓고 싶어도 그럴 힘이 없을 거야.”

내 대답을 들은 클로에가 히죽 웃으며 다시 책상 위에 올려둔 서류를 집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세요. 하지만, 제 연기를 보고 정말로 반해버리시면 곤란해요?”

“그럴 각오로 노력해.”

내 대답을 들은 클로에가 뭔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막상 파티장 가서 연인 시늉을 해봤자 설득력이 떨어질 테니, 내일 오후에는 시간을 비우고, 나한테 보고해야 하는 일들은 그때로 미뤄둬.”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다소 뾰족하던 시선을 거두고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게요.”

그걸로 대화는 끝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클로에에게 인사를 건넨 다음 내 방으로 돌아가 눈을 감았다.

퍼펑!

귓가에 폭죽이 터지는 큰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뭔데 또.”

급하게 눈을 떠 주변을 살펴본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의자에 앉아있었고, 눈앞에는 커다란 케이크가 놓여있다. 케이크 위에는 촛불이 잔뜩 박혀 타오르고 있다.

그 옆에는 얼음에 묻어놓은 샴페인 병이 짤그락, 하는 소리를 낸다.

“축하해!”

처음 보는 얼굴이다. 하얀 분을 얼굴에 떡칠하고, 알록달록한 천들을 대충 기워 만든 망토로 몸을 가린 녀석이 히죽거리며 그런 인사를 건넸다. 녀석이 허리를 숙이는 사이, 소매에서 쑥 하고 튀어나왔던 커다란 지네가 팔뚝을 타고 기어올라 등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보인다.

“이 녀석이야?”

“워우.”

고운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나는 깜짝 놀라서 본능적으로 그런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가씨, 얼굴 반쪽은 뭐 강판 같은 거에 갈아버린 건가?”

얼굴이 저 정도로 갈려버리다니, 고통에 쇼크사하지 않은 게 기특할 지경이군.

꽤나 아름다웠지만, 얼굴 반쪽이 너덜너덜하다.

짙은 보라색의 머리카락을 올림머리하고, 검은색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여자였다. 왼쪽 팔목부터 윗가슴까지 새겨진 문신이 꽤나 인상적이다. 식물과 나비인가?

꽃은 가만히 살펴보니 파리지옥이나 코브라릴리로 대표되는 식충식물들이다.

남은 반쪽의 얼굴과, 몸매, 옷맵시 같은 걸 고려해보면 원래는 꽤나 매력이 넘치는 아가씨였겠지.

내 말을 들은 여자가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바닥에 집어 던지고 의자에서 팍 하고 일어났다.

동시에, 그녀의 몸에 새겨진 식물 모양의 문신이 흔들거리고, 나비 모양 문신들이 피부 위에서 날갯짓을 시작한다.

“저 새끼 마음에 안 드는데!”

날카로운 쇳소리처럼 톤이 높은 외침이었다. 아니, 외침이라기보다는 비명 같았다. 잠깐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나는 귓구멍을 후비며 대답했다.

“초면이라 그렇게 느끼는 거 아닐까? 내가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인데.”

“그런가?”

내 말에 얼굴에 허연 분가루를 처바른 녀석이 히죽 웃으며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시뻘건 혀를 내밀어 지 입술을 핥는다.

“친구야. 배고프면 테이블 위에 맛난 케이크를 먹을 것이지, 입술에 바른 립스틱을 처먹고 있어?”

“끄아하하하하학!”

녀석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숨이 넘어가라 웃으면서 내 어깨를 팍팍 친다.

“혓바닥이 길군, 친구.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나는 그 말에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주변을 둘러본 다음 대답했다.

“근데 두 사람은 어떤 악마랑 계약한 건지 모르겠네.”

내 말을 들은 두 사람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어떻게 알았지?”

“너도 참 한심한 녀석이다. 질문할 시간이 있으면 머리를 굴려.”

턱이 빠져라 아가리를 벌리고 폭소할 때, 혓바닥에 새겨진 문양이 보였다. 내 것과 다르지만, 유사한 점이 보인다. 마찬가지로 저 여자의 상반신에 새겨진 꽃 모양 문신 중 하나도 내 문양과 유사점이 있다.

“새로 들어오는 친구가 눈썰미가 좋은 모양이군.”

말을 마친 그는 쯔, 하는 소리를 내고 테이블 위에 놓인 케이크를 한 조각 썰어서 내 앞으로 밀어준다.

“먹고 이야기하자고.”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어차피 꿈인데, 먹긴 뭘 먹어.”

내 말에 두 녀석이 움찔하고는 나를 바라봤다.

“확신하는 이유는?”

“댁한테 말해줄 이유는 없어. 확실한 건, 아무리 봐도 이게 내 꿈은 아니라는 거야.”

꿈은 결국 현실의 열화판이다. 당연히, 꿈은 현실에 비해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과 케이크 위에 꽂힌 촛불은 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가. 도대체 저 촛불은 언제쯤 촛농을 케이크 위로 떨어뜨릴 건가. 왜 각도가 맞는데도 불구하고 테이블 위에 놓인 은제 식기는 저 밀가루 면상의 남자를 비추지 않는가.

게임으로 치면 꿈을 꾸는 사람의 머리가 그래픽카드와 비슷한 기능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꿈을 꾸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래픽카드는 너무 구리다. 똥망겜을 보는 느낌이야.

“이 친구 마음에 드는데.”

밀가루 광대의 한 마디에 옆에 서 있던 아수라백작 여자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아!”

밀가루 면상이 아수라백작녀의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듣고 쯔쯔,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새로 헤로스 님의 계약마가 될 놈이 있다길래 얼굴이나 한번 보러 온 거다.”

“썩 잘 생겼지? 얼굴 다 봤으면 이제 나 잠 좀 자게 해주는 건 어때.”

내 대답을 듣자 밀가루 남자는 키들거리고, 아수라백작녀는 나를 산채로 찢어버릴 기세로 노려보다가 이내 표정을 풀고 화사하게 웃는다.

“헤로스 님은 계약마를 빚어내는 과정이 굉장히 잔학하다고 들었는데. 나중에 꼭 구경 가야겠어.”

“나도 보러 가야겠군! 이 친구 입에서 나오는 비명소리는 어떨지 생각만 해도……!”

서서히, 녀석들이 떠드는 목소리가 잦아들고, 코를 찌르는 같은 유황 냄새가 차올랐다.

내가 바라보는 주변 풍경에 불이 옮겨붙어 타오르기 시작한다.

“허읍……!”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 내가 잠들었던 침대다.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훔친 다음 나는 침대에 기댄 채 한숨을 팍 내쉬었다.

“진짜, 난 재수가 지지리도 없는 놈이다.”

꿈에서 깼지만, 아직까지도 유황 냄새가 코에 남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참새들이 창문가 근처에서 악쓰는 소리를 듣고 있던 나는 사람을 불렀다.

“엘렌 리버플로우 양에게 찾아갈 거다.”

내 말에 시종이 깊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대답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잠시 뒤, 나는 엘렌을 앞에 두고 있었다.

“아침 식사할래? 역시 왕궁은 팬케이크부터 맛이 다르네.”

나는 그녀의 태평한 소리를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어제 꿈을 꿨어.”

엘렌이 팬케이크를 썰어 입에 넣으면서 턱짓을 했다. 말해보라는 거겠지. 나는 어제 꿈을 기억나는 대로 최대한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엘렌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대답했다.

“뭐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까.”

엘렌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태초마는 물론이고, 계약마도 제대로 된 절차를 밟지 않고는 우리의 세상에 오지 못해.”

누군가 정해진 절차에 따라 불러줘야지만 이 세상에 올 수 있다. 그 점은 나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 내 꿈에 나온 그 녀석들은…….”

“아직 유예기간이 남아있는 것들이야.”

계약에 따라 만기일에 영혼을 바치기 전까지는 여전히 인간이다. 당연히 제약 없이 이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다. 엘렌은 속삭임을 끝내고 등받이에 기대며 말을 이었다.

“연결몽이라고 하는 기술이야. 하나의 꿈을 여러 명이 함께 꾸는 건데…… 윤리적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에 금지된 마법이지.”

“윤리적 혼란?”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대표적인 예시. 꿈속에서 누군가에게 강간당하면, 그건 강간일까? 연결몽을 통해 강간한 사람이 자신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 도대체 어떻게 증거를 확보해야 할까?”

나는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대충 이해했다. 연결몽을 통해 강간을 한 건지, 아니면 그냥 여자가 혼자 그런 악몽을 꾼 건지 구분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오히려 여자가 이러한 수단을 악용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감방으로 보내버릴 수도 있다.

굉장히 복잡한 문제네. 복잡하고 국소적인 예외를 만들어 해결하느니, 차라리 연결몽이라는 마법 자체를 금지시켜버리는 게 훨씬 깔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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