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결론적으로…….
올리비에는 죽었고, 나는 시한부 인생이 되었다.
텐트를 빠져나온 나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저 여자가 죽고 나니 이번에는 헤로스가 사람을 엿 먹이네.
“괜찮으세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클로에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엘렌도 옆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올리비에가 말하길, 헤로스와의 계약을 무효로 되돌리는 방법이 있다더군.”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움찔하고는 대답했다.
“저 황녀의 말은 믿을 수 없어요. 그런 식으로 사람을 꼬셔내서 살아날 구멍을 찾으려는 거겠죠.”
“나도 저 말에 동의해.”
클로에와 엘렌의 말을 들은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올리비에 황녀는 독약을 먹고 자살했어.”
뭔가 더 말을 하려던 클로에와 엘렌이 동시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살이라니. 그 여자가 그렇게 순순히? 지금 저 텐트 안에 들어가면 시체가 사라졌거나 그러는 거 아니에요?”
얼씨구, 이게 무슨 마술쇼냐? 나도 그게 의심스러워서 이렇게 긴 시간 그녀를 지켜본 거다.
클로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텐트로 다가가 천막을 들춰 안을 확인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시체를 확인한 다음 클로에는 아직도 약간의 당황이 남아있는 얼굴로 나에게 질문했다.
“방법이 있다고 했으니, 찾아내야지.”
계약할 당시에는 달리 방법이 없으니 동의했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방법이 있다는 걸 안 이상 올해 첫눈 보면서 뒤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올리비에 황녀는 세자 저하의 성인식 때 파이크 왕국을 들렀던 것 이외에는 베로나 제국을 떠난 적이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렇다는 건, 우리는 베로나 제국으로 가야 한다는 뜻이다. 올리비에가 헤로스와의 계약을 깨는 법을 읽은 적이 있다면, 그건 분명히 베로나 제국 안에서 본 것이다.
입에서 절로 탄식이 흘러나온다. 베로나 제국이라니.
“내가 자기 구역으로 향한다는 걸 알게 된다면 베로나 제국의 황제가 정말 좋아하겠군.”
자살이니 대놓고 이걸 빌미 삼아 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베로나 제국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든 해버리려고 들겠지.
“아 참. 여기요. 가리세요.”
클로에가 내 쪽으로 장갑을 건네주었다. 언제까지고 손수건으로 손등을 가릴 수는 없으니까. 장갑을 낀 나는 엘렌을 향해 말했다.
“미로스 기사단장에게 우리가 이겼다고 연락하고, 코랄린 관문 안에 있는 제국군에게도 연락을 보내.”
“기사단장님에게 연락하는 건 그렇다 쳐도, 제국군에게는 무슨 메시지를?”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오늘 중으로 항복하면 포로로 대우해주고, 제국에서 적절한 수준의 비용을 지불한다면 풀어주겠다. 하지만 오늘이 지나고 나면 코랄린 관문에 자리 잡은 제국군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다.”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건넸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표식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마. 만에 하나, 신을 섬기는 교단들이 알게 되면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신을 믿는 교단에서, 악마와 계약해 영혼을 팔아넘긴 녀석을 곱게 봐줄 리는 없다.
“꼭 말해줘야 하는 사람들은 이미 정해두었어.”
올리비에가 죽은 텐트 안에서,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있었던 게 아니다. 내 대답을 들은 엘렌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연락을 마친 다음, 올리비에가 머무르던 텐트를 조사할게. 그녀가 언데드 하이랜더를 만들고 조종했다는 증거가 남아있을 테니까.”
올리비에가 원흉이라는 걸 증명하지 못하면 하이랜더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고생해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표정 펴.”
내가 처한 상황은 내가 처한 상황이고,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싸움을 이긴 거니까. 우울한 표정을 지으면 의심받는다. 내 말을 들은 엘렌이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은 채 걸어가기 시작했다.
“해냈어, 젠장맞을! 자네 정말 대단하군그래!”
도리안이 내 쪽으로 달려와서는 나를 꽉 끌어안으며 기쁨에 가득 차 외쳤다. 그래, 해내기는 했지만…… 도리안처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쁜 표정을 짓기는 힘들었다.
나는 복잡한 심정 위에 기쁨의 가면을 쓰고 도리안을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도리안 대장이 많이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우린 큰일을 해낸 거야. 자네와 함께 이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 모르네.”
나는 여전히 웃는 표정을 유지한 채 대답했다.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닙니다. 다들 피곤할 테니, 오늘은 경계에 필요한 최소 인원을 제외하고는 휴식을 취할 생각입니다. 도리안 대장께 부탁을 좀 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지. 맡겨두라고. 자네야말로, 이후의 일은 우리들이 알아서 할 터이니 푹 쉬고 있게.”
말을 마친 도리안이 나에게서 멀어진다. 잠깐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클로에에게 말했다.
“세자 저하와 연결된 수정구를 내 텐트로 가져와 줘.”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사람들이 연신 기뻐하며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마틴 님, 수정구를 가져왔어요. 세자 저하께서는 연락을 기다리고 계시니, 바로 연락을 취하면 될 것 같아요.”
“고맙다.”
수정구를 받아든 나는 클로에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수정구를 들었다.
― 아아, 들리나?
“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내 목소리를 확인한 세자가 약간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전쟁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올리비에는 자살했습니다. 언데드로 변한 하이랜더는 모두 제거되었고, 코랄린 관문에는 오늘 중으로 항복 의사를 밝히라는 전언을 보냈습니다.”
말을 마치고 나서, 수정구 너머에서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 ……정말인가?
“이런 종류의 소식으로 거짓말을 하면 교수형감 아닙니까?
― 그렇지. 그래. 참말이군. 진짜야. 아하, 아하하하하하하핫!
이내, 세자가 폭포수처럼 웃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 잘했네, 마틴 레드우드. 이걸로 파이크 왕국은 베로나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수 있을 거야! 젠장, 정말 큰일을 해냈어!
“코랄린 관문의 승리를 위해 저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습니다.”
폭포수처럼 웃음을 쏟아내며, 기쁨과 환희로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던 세자는 내 말을 듣자마자 웃음을 뚝 멈췄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세자의 웃음이 멈추자, 텐트 안에 냉막한 긴장감이 휘몰아친다.
잠깐 머뭇거리나 싶던 세자가 입을 열었다.
― 시적인 표현이군. 전쟁이니, 큰 희생이 뒤따르는 건 어쩔 수 없어. 자네의 잘못이 아니네.
“세자 저하, 돌려 말한 게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입니다.”
내 말을 들은 세자가 자기도 모르가 으허어어어 하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구체적으로 말해보게.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왕국의 승리를 위해 저는 헤로스라는 태초마에게 제 영혼을 팔았습니다. 이 싸움의 승리가 보장된 대신, 저는 올해 겨울 첫눈이 내릴 때 헤로스에게 영혼을 빼앗깁니다.”
내 말을 들은 세자가 기겁하는 것처럼 외쳤다.
― 그럴 수는 없어! 자네가 나를 위해서 해줘야 하는 일은 아직 많고, 나 또한 자네에게 갚아야 할 것이 남아있어! 이런 씨팔, 개좆같은 경우를 봤나!
세자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고, 세자가 입에 담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 쌍욕을 쏟아내고 있었다. 방금 환희에 가득한 목소리와는 정반대였다.
“왕국의 승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 왕국의 승리를 가져다준 자네에게 그 큰 빚을 어찌 갚아야 한단 말이냐! 젠장, 올해 겨울에 내리는 첫눈?! 자네가 이 왕국을 위해 해준 일은 1년 안에 갚기에는 너무 크고, 자네가 나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은 그 짧은 시간 동안에는 절대로 달성할 수 없어!
빚이라. 나는 그 말에 낮게 웃음을 흘렸다.
“저를 그리 높게 평가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 그 거래, 나 말고 아는 자가 또 있나?
“엘렌 리버플로우 양과 클로에 로니세라 경이 알고 있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세자가 몇 번이나 깊은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 이 일은 극비로 부쳐야 하네. 그 둘은 자네와 함께 전선에 섰고, 그 우정과 충심이 깊으니 괜찮겠지만…… 절대로, 다른 자들에게 말해서는 안 될 거야. 알겠나? 왕국의 교단들이 미쳐서 날뛰기 시작하면 나로서도 그들을 억제하기 힘들어.
“인지하고 있습니다.”
세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 젠장맞을, 마틴 레드우드. 너는 지금 죽어도 괜찮은 사람이 아니야.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이 왕국이 나의 것이 되었을 때, 자네에게는 이 나라의 대소사를 역임시킬 생각이었어. 이제 고작 열여덟이 아닌가. 자네가 나를 위해서 해줘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내 말을 들은 세자는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뭐가 되었건, 세자는 진심으로 내가 처하게 된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 죽게 두지 않을 것이다. 최소 여든이 될 때까지 이 왕국을 위해 내 아래에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큰 저택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도록 만들 거야. 뭔가 방법이 있겠지. 내가 은밀히 찾아보겠네.
세자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올리비에 황녀는 죽기 전, 저에게 유언 비슷한 걸 남겼습니다. 헤로스와 맺은 계약을 무효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더군요.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 더 자세히 말해보게.
내 말을 들은 세자가 약간의 떨림이 남은 목소리로 재촉했다.
“단지 그것 뿐이었습니다. 방법이 있으니 찾아봐라.”
그 후, 올리비에는 숨이 멈췄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피가 말라서 엉겨 붙은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그 여자는 자세한 방법을 말해주지 않았다. 마치 '이 정도면 다 말해줬잖아. 뭘 더 바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세자 저하, 저는 베로나 제국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 황녀가 알고 있는 방법이라면 베로나 제국에서 찾아내야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았어. 자네는 가만히 있게. 내가 사람을 보내 알아보지.
“세자 저하,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나는 세자의 말을 부정했다.
“제 목숨입니다. 남에게 맡겨놓고 놀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저보다 이런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자가 있습니까?”
― 빌어먹을.
수정구에서, 쿵 하고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찍는 소리가 들렸다.
― 자네가 베로나 제국으로 향하게 되면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은 지극히 제한적이야. 내 힘이 미치지 않을 터이니.
“게다가, 제 얼굴을 드러내놓고 다닐 수 있는 환경도 아닙니다.”
올리비에의 자살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나를 제국의 황제가 가만히 두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저는 원래 이런 종류의 일이 더 입맛에 맞습니다.”
소수의 인원으로 은밀하게 움직여 주변을 탐색해 목표를 찾아내고, 확보하는 일.
대량의 병력을 운용해 치받고 싸우는 건 본디 내 특기도 아니고, 자주 하던 일도 아니다.
생각해보면, 그 불타는 해골 놈이 내 손등에 지 꺼라는 침을 발라놓은 다음부터 자꾸 대규모 전투가 내 팔자에 꼬인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그 자식이 말한 것처럼, 녀석이 찍어놓은 표식은 전사를 전장으로 부르는 모양이다.
― 그러다 일이 잘못되면…….
“겨울에 죽을 팔자가 조금 더 당겨지는 것뿐이죠.”
별거 아니잖아. 내게 주어진 수명이 조금 더 빨리 끝나는 것뿐이다.
―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하게. 가능한 범위 안에서라면 최선을 다해 도와주지.
“일이 잘못되면 제 어머니를 부탁드리겠습니다.”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게. 일이 잘못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