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이랜더들은 공세를 중단했다. 이미 우리는 포위된 상황이다. 애초에 별로 위협적인 포위라고 생각하지 않고 방치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성문까지 가는 길을 뚫어야겠군.”
곁으로 다가온 하이랜더의 말에 나는 조용한 어조로 대답했다.
“양 떼가 곰을 포위했다고 곰이 자기 굴로 돌아가지 못하지는 않잖아?”
“……곰이라면 애초에 돌아가지도 않겠지.”
서로 동의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하이랜더들이 퇴각이라는 단어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표정은 밝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미 한 맹세를 어길 녀석들도 아니기에 하이랜더들은 곧장 성문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럼, 바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크게 외치지 않았다. 하이랜더들이 지금 이 행위를 부끄러워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나 혼자 신나서 크게 외치는 건 너무 눈치 없는 짓이니까. 옆에 있던 하이랜더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다음 들고 있던 몽둥이를 크게 휘둘러 땅을 내려찍었다.
땅을 타고 퍼지는 진동을 신호 삼아, 하이랜더들이 일제히 제국 병사들의 포위망을 뚫기 시작했다.
이미 공포에 질린 제국 병사들의 포위망을 뚫는 건 예상대로 전혀 어렵지 않았다. 사시미칼로 두부를 저며내는 것처럼, 우리는 큰 저항 없이 적의 포위망을 뚫는 데 성공했다.
“돌아간다, 돌아간다!”
그런 우리의 움직임을 보고 제국의 병사들이 살았다는 듯이 힘껏 외친다. 그 꼴을 봐서는, 우리가 돌아간다고 해도 뒤를 칠 생각 같은 건 전혀 없는 모양이다. 하긴, 머리가 제대로 어깨 위에 달린 녀석이라면 이렇게까지 쥐어 터지고 나서 우리의 뒤를 치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
우리는 성문을 넘어 다시 아리아 장벽 안으로 돌아왔다. 열려있던 성문은 둔중한 소리를 내며 서서히 닫혔다. 성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을 확인한 다음, 나는 미로스가 부른다는 소식을 병사에게 전달받고 곧장 지휘실로 향했다.
“그나저나 아리아 장벽의 성문이 열려있으면 반격 정도는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미로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적의 사령관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만, 병사들이 따라주지 않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리해서 추격 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추격하면 지들이 뭘 어쩔 수 있었겠습니까.”
또 활이랑 마법 쏘려고?
“제대로 반격에 성공하고 싶다면 후방으로 빼두었던 언데드 하이랜더를 앞세워야 할 텐데. 그 언데드 하이랜더들이 제대로 진형을 갖추고 돌격하기 전에 아리아 장벽의 성문이 먼저 닫혔을 겁니다.”
내 대답을 들은 미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 점이 신경 쓰이고 있었다네. 어째서 언데드 하이랜더를 앞에 내세우지 않은 거지?”
“퇴각하려는 겁니다.”
대답을 들은 미로스가 나를 바라봤다.
“퇴각이라니. 아무리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적의 병력은 그 숫자가 만만치 않고, 언데드 하이랜더들은 여전히 위협적이야.”
“블루핸드 성과 안타리아 요새의 지원군이 도달하기 전에 아리아 장벽을 뚫을 수는 없다는 확신이 선 거죠.”
어차피 뚫지 못할 거라면 여기에서 버티며 피해를 늘리고 병력을 지치게 하느니, 코랄린 관문 쪽으로 빠져서 병력을 재정비하는 편이 훨씬 이득이라는 판단이겠지.
“그런가.”
“뭐, 사실 이득이라는 단어보다는 손해를 덜 보는 방법이라는 표현이 적절하겠네요.”
지금 제국의 움직임은 말 그대로 울며 겨자 먹기로 내린 선택일 뿐이다. 저 뒤에 뭔가 숨은 수작이 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간부 중 하나가 상당히 밝은 표정을 짓고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그렇다면 적이 퇴각하는 순간을 노려서 후방을 친다면 다시 한번 큰 피해를 줄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말에 나는 음, 하는 소리를 냈다.
“큰 피해를 주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퇴각할 때는 언데드로 변한 하이랜더들을 최후방에 배치해서 왕국 병사들이 추격하는 것을 막으려 들 것이다. 언데드는 퇴각 와중에 공격받는다고 해도 사기의 저하 같은 건 없을 뿐 아니라, 아군의 정예병력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랜더들을 막아내는데도 탁월한 성능을 발휘하니까.
“어쩌면, 추격을 대비하고 있을 확률도 있지요.”
내 말에도 불구하고 추격전을 제안한 간부는 여전히 열정적인 표정을 한 채 미로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적들이 사기를 잃고 도망가는 데 그냥 구경만 하고 있기는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도망치는 병력의 뒤를 쫓아 피해를 누적시키는 것은 병법의 기본입니다. 놓칠 수 없는 기회입니다.”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하이랜더들이 전투 후 퇴각에 대해서 어떻게든 이해해주고는 있지만, 사실 가능하면 그런 방식으로의 운용은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자제하려고 합니다.”
추격전에 하이랜더를 동원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돌려 말한 거다. 내 말을 들은 간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마틴 레드우드 님과 하이랜더들은 이미 큰 공을 이루었지 않습니까. 휴식이 필요한 것은 당연합니다.”
말을 마친 녀석이 미로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뜻을 같이할 기사 스물다섯과 마법사 열 명. 말타기에 능숙한 병력 오천을 주신다면, 제가 직접 그들을 끌고 나가 후퇴하는 적의 뒤를 치겠습니다.”
녀석의 이야기를 들은 미로스가 고민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런 미로스를 향해 말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반대합니다.”
올리비에가 그냥 뒤로 빠질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추격전을 제안한 간부가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봤다.
“마틴 레드우드 님, 어찌 이 전쟁의 공을 혼자서만 독차지하려고 하십니까. 저희도 싸울 수 있습니다.”
인마, 내가 공을 독차지하기는 뭘 독차지해. 그리고 니들이 싸울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이 장식이 아닌 것도 알고, 팔다리가 다 붙어있는 것도 두 눈에 아주 잘 보여. 나는 잠깐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녀석을 바라봤다.
“전쟁의 공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상대의 의중도 모른 채 퇴각하는 병력을 함부로 추격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휘실에 자리하고 있던 간부 중 몇몇이 입을 열었다.
“글쎄요. 하지만 적이 퇴각하는 게 확실하다면…… 저는 추격전이 그렇게 잘못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틴 레드우드 님의 말대로 후방에 언데드가 된 하이랜더들이 배치되어 있을 확률이 높겠지만, 퇴각하는 이상 분명히 그 숫자를 줄일 수는 있을 겁니다.”
얼굴을 구긴 채 뭐라고 말하려던 나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 지휘부는 추격전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고 있는 상황이다.
기병 오천과 기사 스물다섯이라. 지금 아리아 장벽 안에 머무르고 있는 병력이라면 그 정도의 손실은 치명상이 아닐 수도 있다. 게다가, 어차피 블루핸드 성과 안타리아 요새에서 지원군이 오고 있는 형국이니까.
“어쩔 수 없겠군요. 미로스 기사단장님께서 현명하게 판단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일단 말을 줄이기로 했다. 나는 반대했고, 나머지가 찬성했다. 이전까지는 나름대로 지휘부에서 내 의견을 잘 들어주었다. 어디 한번 니들이 생각하는 대로 해봐. 잘되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이득이고, 실패한다면 이후에 이 친구들이 내 말을 더 주의 깊게 들을 테니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상관없다.
“추격전이라. 그대가 요청한 병력과 기사들을 붙여주지.”
미로스는 결국 추격전을 제안한 간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로스를 향해 경례했다.
“실망시키지 않고, 반드시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오겠습니다.”
“적의 퇴각은 빠를 겁니다. 오늘 밤 중에 추격전을 해야 할 수도 있으니, 미리 병력과 기사들을 선발하고, 해가 떠 있는 동안 배를 불리고 휴식 여건을 보장해야 할 겁니다.”
내 말에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시선을 돌려 엘렌을 바라봤다.
“아, 엘렌 리버플로우 양. 혹시 여유가 있다면 도움을 조금 받고 싶습니다.”
엘렌이 네? 하는 소리를 낸 다음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수성전에서 마력을 과도하게 쓴 탓에, 이틀 정도는 휴식을 취해야 할 상황이에요.”
엘렌의 거절을 들은 간부는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어쩔 수 없겠군요. 엘렌 리버플로우 양이 굉장히 분주하게 움직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니까요.”
회의를 마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일단 거절하긴 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
엘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사람은 아니야.”
말을 마친 그는 인사를 하고 지휘실을 나섰다. 이십 대 초반의 젊은 피에 깃들어 있는 용기와 나도 할 수 있다고 하는 자신감이 다소 앞설 뿐이지, 성정이 썩은 사람은 절대 아니다.
“그래서 더 아쉽지.”
내 말에 엘렌이 응?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별거 아니야.”
어차피 막을 수 없었다. 지휘실은 이미 추격전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어진 상황이어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었으니까.
그 규모는 다르지만, 아마 그 여자도 나와 비슷한 상황에 직면해서 일을 그르친 게 아닐까.
엘렌과의 대화를 마치고 쉬기 위해서 내 방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와 함께 클로에가 들어왔다. 손에는 식사가 담긴 접시가 들려 있었다.
“식사 가져왔어요.”
그냥 밥 먹으러 오라고 하면 될 걸 아예 식사를 챙겨오다니.
“물어보고 싶은 거 있으면 물어봐.”
내 말에 클로에가 음, 하는 소리를 내고 테이블 위에 음식을 올려놓은 다음 말했다.
“정말로 추격이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엘렌과 비슷한 질문이었다.
“아마도.”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접시 위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아마도, 라는 단어는 너무 애매한데요.”
“그래서 나도 끝까지 반대할 수 없었던 거야. 애초에 지휘부도 추격전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형성되어있었기도 하고.”
아무래도 불안한데, 명확한 근거라고 할 만한 건 없다. 근거도 없이 강하게 반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냥 넘어가야지.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다음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친구가 추격전에 너를 동행시키려고 해도 동행하지는 마라. 내가 따로 시킨 일이 있어서 곤란하다고 하면 될 거야.”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이미 그렇게 말을 전하고 오는 길이거든요.”
“잘했네. 보상으로 이거나 하나 먹어라.”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접시 위에 올려져 있던 딱딱하게 굳은 꿀을 한 조각 클로에에게 던져줬다. 꿀 조각을 받아먹는 클로에를 보던 나는 입을 열었다.
“엔리코는 도대체 언제 보급품을 전달해주는 거야?”
“아, 안 그래도 방금 확인해봤어요. 왕도의 항구로 엔리코가 보낸 물자가 도착했다고 하던데요. 규모가 꽤 크다고 들었어요.”
왕도와 아리아 장벽까지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으니까. 왕도에서 빨리 움직여 준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리아 장벽으로 보급이 도착할 것이다.
“엔리코에게 감사 인사라도 보내야겠군.”
“그 건은 세자 저하께서도 직접 감사를 표한다고 하셨는데, 보내는 서한에 덤으로 껴 넣는 건 어떨까요?”
그게 좋을 것 같다.
“이 와중에도 나름대로 할 일은 하고 있었네.”
내 말에 클로에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할 일을 다 마치고 나서 피투성이가 된 몸을 좀 씻으려고 하면, 그 사이에 오물이나 피가 다 말라붙어버리는 거 있죠.”
“휴가 받기로 했잖아? 조금만 더 참으라고.”
대화를 나누면서 식사를 마치자. 클로에가 그릇을 챙기며 입을 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잘된 일이라는 뜻이군요.”
나는 클로에의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잘된 일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