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45화 (145/275)

145화

왕궁의 대회의가 열리는 거대한 홀에는, 왕 대신 세자가 왕좌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세자의 왕좌 아래에는 이 왕궁에서 녹봉을 받아먹는 신하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세자 저하, 제국에서 보낸 최후통첩을 고려해보면, 마틴 레드우드를 즉시 포박해야 할 것으로 아뢰옵니다.”

“그리해야 할 것으로 아뢰옵니다.”

신하들의 앵앵거리는 소리에 세자는 얼굴을 팍 구겼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신하들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세자의 더러운 성격은 신하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잘 알려져 있었다. 세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만들어낸 가면이었고, 그 가면은 이번에도 역시나 신하들로 하여금 말과 행동을 주의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두 번이나 말하도록 할 생각이냐. 사안의 중대함은 알고 있다. 이런 사안일수록 만사에 신중을 기해서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신하 중 하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미, 제국의 군대가 국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공식 서한을 보내고, 왕국의 병력을 국경으로 이동시키는 중이지 않나.”

세자의 말을 들은 신하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세자 저하, 제국과 왕국은 이제껏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한 명의 실수로 인해 국가 간의 관계가 그 신뢰를 잃을 지경에 처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응당한 처벌이 필요할 것으로 아룁니다.”

세자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그를 바라보다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들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착각이라 하심은…….”

차갑게 식은 세자의 목소리에, 방금 전에 말을 꺼낸 신하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착각하지 말라는 거다. 이 나라는 내 아버지의 것이고, 나는 지금 이 나라의 모든 것을 소유한 하나뿐인 참 주인을 대변하기 위해 이 자리에 앉아있다.”

말을 마친 세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왕좌가 놓인 높은 계단 아래로 걸어 내려왔다. 그리고, 방금 전 말을 꺼낸 신하 앞에 섰다.

“그대들은 이어지는 말을 명심해두거라.”

신하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말씀을 삼가 받듭니다.”

그 대답을 들은 세자가 고개를 돌려 신하들을 슥 훑어보고 입을 열었다.

“천만의 백성이 굶어 죽어도 그것이 왕명을 따랐기 때문이라면 그는 충신이다. 천만의 백성이 배불리 먹고 편히 잔다고 해도, 그것이 왕명을 어겼기 때문이라면 그는 역적이다.”

말을 마친 세자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세자 저하, 그것은 폭군의 치세라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세자가 고개를 돌려 입을 연 신하를 확인하고는 서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폭군과 성군을 가리는 기준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다.”

말을 마친 세자는 다시 몸을 돌려 계단을 걸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갑자기 문이 열리고 병사 하나가 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세자 저하, 마틴 레드우드가 두르미롤 국경 수비대 제1관문에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신하들이 술렁거렸다. 세자는 자신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끼며 병사를 바라봤다.

“그걸로 끝이 아닌 것 같구나. 뭔가 더 있다면 말해 보거라.”

이건, 세자가 스스로에게 말하는 애원이기도 했다. 제발, 뭔가 더 있어라.

만약 마틴 레드우드가 목적한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면 세자는 결국 마틴을 묶어서 제국으로 넘겨야 한다.

방금 전까지 폭군이 어쩌고, 성군이 어쩌고 하며 신하들을 찍어누르던 것치고는 굉장히 모양 빠지는 결과가 나오는 거다.

“마틴 레드우드의 뒤에…… 천이 넘는 하이랜더가 뒤따르고 있다 합니다!”

그 말에 세자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말해라.”

“폐하께서 지시하신 임무를 달성했으나, 수비대가 진위를 의심하고 있다 합니다. 워낙 긴밀히 진행된 일이라 이해하지 못할 것이 아니니, 국왕 폐하의 재허락을 구하고자 성벽 앞에서 대기 중이라 합니다.”

그 말에 세자가 의자를 탁 하고 내려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외쳤다.

“마틴 레드우드의 말에는 거짓이 없다, 통과시켜라! 마틴 레드우드가 이번에도 파이크 왕국을 실망시키지 않았음이라!”

말을 마친 세자는 다시 왕좌에 털썩 앉았다. 여전히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 사이, 왕좌 아래의 신하들이 부지런히 눈빛을 교환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어쩐지 일이 예상과는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녀석들 대부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칼을 뽑았으면 뭐라도 썰어야 할 테니까.

신하들이 굴리는 짱구 정도는 세자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것도 하지 못했다면 애초에 세자가 될 수도 없었다.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마틴 레드우드가 왕국에서 큰 이름을 떨치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없는 자들은 많다. 그리고, 그들이 노리고 있는 건 결국 물어뜯을 기회다.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세자는 마틴을 높게 평가하고 있고, 그에게 조력할 용의가 충분히 있다. 부탁하기 전에 나서서 먼저 움직이는 건 하인의 미덕이지, 왕의 미덕이 아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마틴 레드우드가 스스로 청할 것이다.

“조금 쉬고 싶으니, 모두 돌아가도록 하라.”

말을 마친 세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세자의 확인을 받은 다음 문을 열어준 국경 수비대의 표정은 그렇게 밝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동행하는 하이랜더들에 대한 다소의 적의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뒤를 따라 걷고 있던 하이랜더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 적의를 품고 있지만 당당하게 덤빌 용기는 없는 모양이군.

그야, 덤벼들었다가는 신속하게 머리통이 박살나는 미래가 예정되어있으니까.

― 적의를 가지는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그 말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모른다니, 정말로?

“저들은 너희들과 오랜 세월 싸웠잖아.”

함께 동고동락하던 전우가 죽고, 불구가 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았을 것이다. 제아무리 아군이 되었다고 해도 마음속에 박혀있는 앙금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가 없다.

이러한 시선은, 최소한 록밸리 마을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감수해야 한다.

내 말을 들은 하이랜더가 푸후, 하고 비웃는 것 같은 소리를 내더니 입을 열었다.

― 우리는 서로 적으로 만났다. 적으로 만난 이상, 둘 중 하나가 죽기 전까지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틀린 말은 아니군. 하지만, 맞는 말이라고 해서 몇 년을 함께 한 전우가 머리통이 사라진 슬픔이 사라지는 게 아니야.”

내 말에 하이랜더가 대답했다.

― 전사가 맞이할 수 있는 최고의 죽음이다. 무기를 든 것은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슬퍼할 이유가 없다.

뭐, 자발적으로 선택한 길이라면야 그렇겠지. 실제로 기사들 중에서는 전장에서 죽고 싶어 하는 또라이들도 꽤 있는 모양이니까.

“저 친구들은 자발적으로 무기를 든 게 아니야. 억지로 끌려온 거지.”

내 말을 들은 하이랜더가 껄껄거리면서 내 등을 한 번 퍽 때렸다.

― 웃기는 농담이다. 싸울 의지 없이 무기를 들다니.

“농담 아닌데.”

잠깐 내 표정을 보던 하이랜더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그리고, 녀석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 싸우고 싶어서 무기를 든 게 아니라면, 무엇이 저자들에게 무기를 들게 한 거지?

두르밀로 국경 수비대 제1관문을 넘는 데 성공한 나는 살짝 얼굴을 구긴 채 대답했다.

“거절하면 죽으니까.”

내 말에 하이랜더가 황당하다는 듯이 입을 쩍 벌리고 있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 지금 그건 정말로 농담이겠지.

“슬프게도 아니야.”

내 말에 하이랜더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 어차피 모든 생물은 죽는다.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은 거지.”

―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피하기 위해 전장의 위험을 감수했다면, 전장에서 죽은 게 억울할 이유가 없지 않나?

말이야 뭐 썩 틀린 말은 아니네. 그나저나 이 녀석은 왜 내 옆에 붙어서 개똥철학을 전파하고 있는 거야. 안 그래도 신경 쓸 거 많은데 정신 사납게 하고 있어.

“그러게 말이다.”

애초에 서로가 서로를 당장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도 아니고, 아예 종족이 다르잖아. 그렇다고 하이랜더가 교류를 활발히 하는 녀석들은 아니니까. 하이랜더가 인간을 모르는 만큼, 인간도 하이랜더를 모른다.

지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이랜더가 무슨 호랑이나 곰처럼 이성이 없는 야수라고 생각하고 있을걸? 이해를 위해서 필요한 건 편견 없는 환경 속에서 보내는 시간이지만, 당장은 그런 환경을 마련할 수 없다.

“빨리 지나가는 데 집중하자고.”

말을 마친 다음 걸어가고 있으려니, 정면에서 클로에가 달려와 넙죽 인사한다.

“마틴 님, 오셨군요.”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에게 인사를 마친 클로에가 다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방금 전까지 내 옆에서 개똥철학을 떠들던 하이랜더에게 말했다.

“……그쪽도 안녕하세요?”

붙임성도 좋네. 보통은 저 험상궂은 회색 얼굴을 보면 두려움부터 품기 마련인데. 하이랜더는 일단 적대감이 없는 클로에의 인사를 받은 다음 나를 바라봤다.

“인사하는 거야.”

내 말을 들은 하이랜더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클로에를 바라보며 몽둥이로 바닥을 한 번 찍었다. 그 모습을 본 클로에가 움찔한다.

“인사하는 거야.”

똑같은 말을 다른 언어로 두 번 하게 될 줄이야.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나저나, 얼굴이 반쪽이 되셨네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마침내 돌아오는 길이니까.”

아, 그것보다. 마침 시키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딱 나타났네.

“왜 없겠어. 가서, 수비대장과의 만남을 좀 준비해줘.”

별로 달가워하지는 않겠지만, 협조 자체는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을 거다.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만나자마자 일이라니. 빨리 돌아왔으면 하며 기다리던 제가 멍청했네요.”

나는 그 말에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간만에 보니 반갑다.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네.”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말을 마친 클로에가 시킨 일을 처리하기 위해 곧바로 움직였다. 잠시 뒤, 클로에가 돌아왔다.

“바로 만나보겠다고 하네요.”

수비대장 쪽에서도 나를 만나보고 싶었을 거다. 클로에의 안내를 받아 수비대장이 머무르는 장소로 향하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비대장이 인사한다.

“마틴 레드우드님, 오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건물 안으로 나를 인도했다. 서로 마주 앉자 곧바로 차를 한 잔 내온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정도로 많은 숫자의 하이랜더라니. 솔직히, 기절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워낙 비밀리에 이루어진 일이었으니까요. 하이랜더들이 저와 동행하는 한, 왕국군을 적대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겠습니까?”

당연히 있지. 부탁할 일이 없었다면 나도 병력들의 불안감을 줄이기 위해서 재빠르게 관문을 넘었을 거다.

“현재 저와 동행하고 있는 하이랜더는 천 명이 넘어갑니다. 이들을 위한 보급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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