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세자와의 연락을 마친 다음 다시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하늘받침, 벤부르그 산머리. 그렇게 불리는 쿠르스트 산맥의 최고봉에 하이랜더들이 모이고 있었다. 녀석들은 하나같이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걸 보고 흥분해 콧김을 뿜어내며 무기를 들어 올리다, 내 검과 손등의 흉터를 보고 무기를 거두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백이 넘었다. 그렇게 수백이 모였다. 마침내 천을 넘어가는 하이랜더들이 이 산머리 위에 모두 모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 쿠르스트 산맥에 존재하는 모든 거동이 가능한 하이랜더들이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는데.”
엘렌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이 넘어가는 하이랜더들이 모두 모인 광경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사람들은 방광이 활짝 열려 내용물을 쏟아낼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이 공포의 하이랜더들을 설득해서, 파이크 왕국과 함께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천이 넘어가는 하이랜더들이 일제히 들고 있는 무기를 들어 올리며 외쳤다. 그리고, 그 외침은 카일이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번역했다.
― 오멘티오는 말해라. 하늘받침의 북을 울린 이유가 무엇인지. 네가 저지른 일은 우리가 허락한 자비를 넘어선다.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니라면 네 몸과 뼈를 부수고 으깨 이 산맥에서 싸늘하게 얼어붙을 것이다.
나는 그 말에 침을 삼켰다. 수정구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엘렌의 마법으로 증폭되어, 이곳에 모인 모든 하이랜더가 내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번역할 것이다.
“조상의 시체가 인간의 꼭두각시 신세가 되는 것도 모르고 있던 머저리들이 입은 잘도 놀리는군.”
나는 말을 꺼냈지만, 카일은 번역하지 않았다.
“번역 안 하실 겁니까?”
― 네? 그 말을 번역하면…….
하이랜더들이 화내겠지. 하지만, 내가 일주일 정도 산 타면서 알게 된 게 있는데, 하이랜더들은 기본적으로 공손한 태도라고 하는 개념이 희박한 녀석들이다. 힘이 있다면 거만하고, 힘이 없다면 공손하다. 공손한 녀석은 나약한 녀석이고, 나약한 녀석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이유는 없다.
간단한 사고방식이다. 약한 자는 입을 닥쳐라.
수정구가 잠깐 머뭇거리나 싶더니, 이내 입을 열어 내가 한 말을 번역했다. 곧바로 하이랜더들의 회색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는다.
그리고, 하이랜더들 중에서도 제법 덩치가 큰 편으로 보이는 녀석이 나를 향해 거대한 몽둥이를 겨누고 소리친다.
― 예외로 허락되는 선을 넘었다! 나약한 것, 분수를 모르나!
그리고, 녀석이 얼어붙은 땅을 박차고 하늘 높이 뛰어오른 다음, 그대로 나를 향해 떨어져 내린다.
“마틴!”
엘렌이 당황한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본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
결국, 이 자식들이 내 말을 듣게 하려면 우선적으로 넘어야 하는 절차다. 내가 강하다는 걸 인식시켜야 한다. 이런 상황이 올 줄 알고 내가 그 지옥 같은 급격사의 비탈길에서 마력을 아득바득 아낀 거다.
아니었다면 그깟 절벽, 그냥 발을 땅에 박아넣어 가면서 마구 질주하는 것도 가능했다!
양손으로 움켜쥔 거대한 몽둥이가 내 머리통을 노리고 단두대처럼 떨어져 내린다.
나는 심장의 마력을 움직이며 검을 뽑아 들어 휘둘러진 몽둥이를 막아냈다.
“…….”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발이 눈 속으로 파묻히고, 바닥에 쌓인 만년설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휘날렸다. 손을 타고 어깨까지 저릿한 통증이 달린다. 여기에서 표정을 바꾸면 말짱 황이다.
“큰소리를 친 주제에 형편없잖아, 비실아.”
미리 준비하고, 기억해두었던 말을 하이랜더의 언어로 내뱉었다. 다른 하이랜더들은 별다른 말 없이 이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는 중이다.
― 으아아아아아!
나에게 몽둥이를 휘두른 하이랜더의 눈깔에 대번에 핏발이 서고, 나를 향해 미친 듯이 몽둥이를 휘두르기 시작한다.
강해야 한다. 아니, 적어도 강해 보여야 한다. 내가 발현점에 도달하면서 얻게 된 능력인 분신과 허상은 눈으로 식별되는 강력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고로, 오늘은 사용하지 않을 거다.
나는 그 공격들을 막아내다가, 팔로 마력을 쏟아내 녀석이 휘두른 몽둥이를 내려찍었다. 굉음과 함께 녀석이 휘두른 몽둥이가 궤도를 바꿔 땅바닥에 처박혔다.
“각오했으니 덤볐겠지.”
그 틈을 타,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나는 하이랜더의 모가지를 검으로 쳐 날렸다. 하이랜더는 머리통이 날아간다고 죽는 게 아니다.
녀석의 머리를 날린 나는 그대로 목이 날아간 하이랜더의 어깨를 발로 밟고, 뒤로 돌아가 척추에 검을 몇 번이고 찔러넣었다.
나에게 달려든 하이랜더는, 비명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목이 날아간 시체가 되어 눈바닥에 몸을 뉘었다. 그 시체를 발로 툭 하고 친 나는 어깨를 몇 번 크게 돌리며 외쳤다.
“다음! 또 불만 있는 자식은 무기를 들고 내 앞에 서!”
오늘 아주 질리도록 한번 싸워보자. 이 가죽을 뒤집어쓴 회색 탱크들아.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다른 녀석이 허연 콧김을 뿜으며 거대한 무기로 눈바닥을 한 번 때리고는 내 앞에 섰다.
그걸로 충분하다. 나는 검을 들고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은 방금 전에 달려든 녀석과는 달리, 굉장히 신중하게 싸움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녀석은 심장 두 개가 자리 잡은 가슴팍에 칼자국을 남긴 채 그르륵, 하는 소리를 유언으로 남기고 바닥에 쓰러졌다.
“다음!”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한 녀석이 쓰러질 때마다 다른 하이랜더들이 무기를 들고 내 앞에 선다. 그리고, 다른 하이랜더들은 이 광경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본다.
몇 마리나 죽었는지 알 수는 없고,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런 걸 계산 할 만한 정신머리는 남아있지 않았고, 하이랜더의 시체는 죽으면 사라져 버렸으니까.
육체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계에 도달한다. 관절이 삐걱거리고, 차곡차곡 쌓인 둔통이 마침내 근육을 넘어 뼈마디 속까지 쑤셔든다.
― 으어어어어!
상대하고 있던 하이랜더의 외침과 함께 휘둘러진 몽둥이.
피하려는 순간 몸이 휘청인다.
“크으으…….”
손에 쥔 검으로 그 일격을 막아내자, 몸이 붕 떠올라 눈바닥 위를 한참 구른다. 귀에서 찌잉, 하는 소리가 들리고 눈앞이 번쩍이며 백색으로 점멸한다.
뿌옇게 변한 시선으로 들어오는 건 거대한 형체가 나를 향해 몽둥이를 휘두르는 광경이었다.
“어딜…….”
어금니를 꽉 물자 입 안에서 뿌득, 하고 어금니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휘둘러진 몽둥이를 흘려내고, 부스러질 것 같은 몸을 움직여 녀석의 가슴팍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쉬지 않고 검을 찔러넣고 뽑아내기를 반복한다.
― …….
정신을 차려보자, 나는 이미 죽은 하이랜더의 가슴팍에 계속해서 검을 쑤시고 있었다. 시체의 가슴에 남은 수십 개의 상처. 그리고 거짓말처럼 내가 칼로 쑤시던 하이랜더의 시체가 사라져 버린다.
“허억…… 허억…….”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나는 퍽, 하고 땅에 검을 박아넣은 다음 양손을 꽉 쥐고 나를 바라보는 하이랜더들을 향해 외쳤다.
“다음 나와, 이 새끼들아! 나오라고 안 하면 나오지도 않는 거냐?!”
수정구에서 내 말을 하이랜더의 말로 번역한다. 그 광경을 보던 엘렌이 마법을 사용했는지, 수정구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거대하게 중폭되어 있었다.
산머리에 차가운 바람만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하이랜더들 중 앞으로 나오는 자는 없었다.
나는 바닥에 피가 뒤섞인 침을 뱉은 다음, 수정구를 통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카일에게 상담받은 다음 크게 외쳤다.
“아직도 내가 하는 말은 들을 가치가 없어 보이냐! 내가 북을 친 게 허락할 수 없는 일이냐!”
하이랜더들은 별다른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들과 눈을 마주치고 있던 나는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고 나서 바닥에 박아넣은 검을 다시 뽑아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으로 나와! 내가 저 북을 울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녀석은 무기를 들고 튀어나와서 내 손에 뒤져버려!”
하이랜더 중 하나가 자기 손에 들고 있던 몽둥이를 바닥으로 던졌다.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그 하이랜더는 눈바닥 위에 털썩 앉았다.
그러기가 무섭게, 다른 하이랜더들도 손에 들고 있던 몽둥이를 바닥으로 떨군 다음 자리에 앉는다.
마침내 이 자리에 모인 모든 하이랜더들이 무기를 바닥에 버리고 자리에 앉자, 가장 먼저 무기를 바닥에 버린 하이랜더가 뭐라고 외친다.
모든 하이랜더들이 일제히 녀석이 한 말을 따라했다.
― 너는 자격이 있는 전사고, 나는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좋아. 나는 히죽 웃은 다음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바닥으로 떨군 다음 눈바닥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청중이 들을 준비가 되었으니, 이제 소식을 전해줘야겠지.”
이제 시작이다. 개 같은 거, 뼈를 추려다가 팔팔 끓여도 육수 한 방울 안 나올 정도로 진이 쪽 빠졌네. 정말 보람찬 싸움이었어.
“설득하기 위해서 저 새끼들 명줄을 얼마나 끊어먹은 건지도 모르겠네.”
내 중얼거림을 들은 엘렌이 작게 대답했다.
“16마리째였어.”
“젠장, 16마리면 어지간한 병력 한 무더기는 쌈 싸 먹을 수 있을 텐데.”
내 말에 엘렌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여기 있는 하이랜더들이 네 이야기를 듣겠다는 생각을 굳히지 않았겠지. 별로 도움이 되어 주지 못해서 미안할 지경이네.”
엘렌의 말에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네가 중간에 껴들었으면 일이 더 꼬였을 거야.”
잠깐 엘렌과의 대화를 마친 나는 자리에 앉은 하이랜더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칭하는 소위 '나약한 것들' 중 하나가 네 조상들의 무덤을 여는 데 성공했다.”
내 말을 들은 하이랜더들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리고, 이내 자기들끼리 뭐라고 마구 떠들기 시작한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럴 땐 진정되기 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좋다. 웅성거리며 이어지던 하이랜더들 사이의 소란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자가 무덤을 연 목적은, 여태 동안 싸움 끝에 그 삶의 끝을 맞이한 하이랜더들, 즉 너희들의 조상을 언데드로 일으켜 세워 자신의 꼭두각시로 쓰기 위해서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듣자 자리에 앉아있던 하이랜더들 중 상당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뭐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해석을 듣지 않아도 지금 굉장히 화가 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엘렌, 내가 신호를 보내면 목소리를 증폭시켜줘.”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정구를 통해 내가 하고 싶은 문장들의 번역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하이랜더의 언어로 외쳤다.
“일련의 상황에 대해 너희들만 분노하고 있는 게 아니다!”
엘렌의 마법으로 증폭된 목소리는 효과가 짱짱했다. 내 외침을 들은 하이랜더들이 순간적으로 잠잠해졌다.
“그대들의 자랑스럽고 위대한 선조들의 안식을 방해하고 강제로 일으켜 세워 꼭두각시로 부리려 하는 자는, 나에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을 생각이다!”
말을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바라봤다.
“우리가 서로 노리는 목적이 같다면, 함께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 말에 하이랜더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 우리는 타 종족과 교류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약하고, 투지가 없다.
“지금 앞에 서 있는 나도 그렇다고 생각하나?”
내 말에 방금 전에 대꾸한 하이랜더가 바로 대답했다.
― 너는 하이랜더가 아니지만, 전사라고 인정할 만하다. 예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