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30화 (130/275)

130화

최초의 계획이 불발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큰 피해가 발생한 건 아니었다. 동행했던 수색대도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서 복귀했기 때문에 큰 피해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급습을 대기하는 과정에서 4-5명 정도의 피해가 발생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정도의 피해를 통해 상대의 텐트에 불을 지르고, 입힌 피해를 생각해보면 이득을 보고 교환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내가 원래 예상했던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지만.”

지도를 살피고 있던 나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올리비에와 2,500명의 병력이 마침내 케스트렐 산머리의 관문을 넘었다. 녀석들의 동선을 주기적으로 파악하면서, 우리는 거기에 맞춰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다.

“이제 서로 간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아요. 오늘 밤 숙영하게 된다면, 서로의 불빛이 보일걸요.”

“그럼, 올리비에도 슬슬 일시적인 숙영지가 아니라 오래 머무를 숙영지를 편성할 때가 되었군.”

그리고, 우리는 그 숙영지를 공격해야 한다.

“앞으로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첫 싸움을 준비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도리안이 제시한 의견에 모두가 동의한다. 우리는 내일 새벽 중으로 일어나서 올리비에가 자리를 잡은 거점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싸움은 초장에 승리해서 기선을 잡으면 이후의 흐름이 좋아지기 마련이니까, 오늘만큼은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알버트가 입을 열었다.

“올리비에가 다른 곳에 병력을 분산하는 것 같지는 않아. 저쪽도, 이 산맥에서는 대규모 병력이 은밀하게 기동하는 게 어렵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더군.”

“그렇겠죠. 야습도 힘들고, 기습도 어렵습니다. 일단 오늘은 별다른 일이 없다면 주변을 경계하면서 휴식을 취하죠.”

회의를 마친 나는 텐트 밖으로 나가려 하는 클로에를 향해 말했다.

“카일 블랙매도우는 지금 뭐 하고 있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지금은 텐트에서 쉬고 있을 거예요.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지 아주 죽으려고 하던데요. 데려올까요?”

“그래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밖으로 나간 클로에는 잠시 뒤 카일 블랙매도우를 데리고 왔다.

“그,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틴 레드우드 님.”

나는 그 말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따라와 주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학자가 군인의 일정에 맞춰 움직이는 일이 보통 힘들지 않았을 텐데.”

“아닙니다.”

녀석이 슬슬 눈치를 보고 있는 꼴이, 알버트가 약간 자극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이 친구를 여기까지 끌고 온 모양이다. 뭐, 수단과 방법에 제한을 두지 말라고 했던 건 나였으니까.

“하이랜더의 언어, 얼마나 이해하고 계십니까?”

카일 블랙매도우가 필요하게 될 수도 있다. 내 말에 카일이 으음, 하는 소리를 내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이랜더들의 관습과 성격을 고려한다면 실제로 대화를 나눌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할 줄 모르신다는 겁니까?”

내 말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하이랜더의 언어에 대해서는 충분히 자료를 모으고 연구했습니다. 언어는 그 종족의 문화를 파악하는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내 말에 카일 블랙매도우가 대답했다.

“알바야르,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언어도 번역하면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지요.”

강하다, 그리고 잘생겼다. 간단하게 말해서 하이랜더들 사이에서는 강함과 잘생김이 같다는 뜻이다. 강하면 잘생겼고, 잘생겼으면 강하다.

어쨌든, 이 친구가 하이랜더의 언어도 오랜 시간 연구했다는 점은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입니다만, 하이랜더와 대화를 하게 되는 상황이 오면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는 되는 겁니까?”

내 말에 카일이 으음, 하는 소리를 내고 인상을 찌푸리나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한 번도 해보지는 않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좋아, 내가 듣고 싶었던 대답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알겠습니다. 고생을 끼쳐드려 미안하지만, 이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저희와 동행해주셔야겠습니다. 대신, 이후 섭섭지 않은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그가 잠깐 나를 바라봤다.

“구체적으로 어떤……?”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테네스 공국에 부유한 상인을 한 명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당신의 연구를 후원하게 하는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후원금은 섭섭지 않을 겁니다.”

까놓고 말해서 하이랜더의 문화와 풍습 연구라고 하는 장르는 그렇게까지 투자자들의 입맛을 끄는 메뉴가 아니니까. 카일 블랙매도우는 자금난을 겪는 중이고, 내가 거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모처럼 쓸만한 지갑을 하나 얻었으니, 유용하게 써야지. 내 말에 그가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들으니 힘이 납니다. 도움이 될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불러주시길 바랍니다.”

“그러지요.”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카일이 아하하, 하고 웃으며 뒤통수를 긁는다.

“처음에 여기로 끌려올 때는 제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벌을 받는 건가 싶었습니다.”

“저지른 잘못?”

내 말에 카일이 잠깐 나를 본 다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처음 뵈었을 때, 제가 흥분하는 바람에 실수로 말을 놓지 않았습니까.”

“아, 그런 일도 있었지요.”

근데 세상에 흥분해서 실수로 반말 좀 했기로서니 그거 가지고 트집 잡아서 사람을 조지는 경우도 있나?

“저는 꼼짝없이 그때 저지른 잘못 때문에 여기로 끌려온 줄 알았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당장 중요한 일이 없고 지루한 녀석들이라면 누구 하나 잡고 시비 걸어서 괴롭히는 걸 즐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그런 별것도 아닌 일로 사람을 오라 가라 하지는 않는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카일이 돌아가고 나서, 나도 곧바로 숙소 대용으로 만들어진 엄청나게 추운 텐트 안으로 기어들어가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새벽부터 준비를 마친 우리의 병력은 적이 자리 잡은 거점 근처에 접근해 있었다.

“그사이에 참 고생했겠다.”

눈으로 쌓아 올린 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물론, 급하게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성벽이라고 불릴 만한 수준까지는 아니다.

차라리 담벽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은데. 대충 3~4m 정도의 높이.

하지만 장애물이라고 하는 역할을 하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눈이 녹을 일이 없는 쿠르스트 산맥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물건이 아닐까.

“적도 우리를 확인한 모양이군, 움직임이 분주해졌어.”

담벼락에 숭숭 뚫려 있는 구멍들은 어디에 써먹을 생각인지 궁금했었는데, 저 녀석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덕분에 알게 되었다. 그 구멍에 창들이 마구 박히기 시작하자, 담벼락은 이제 가시가 박힌 담벼락으로 진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럼, 시작하죠.”

나는 시선을 돌려 자리 잡은 병력들을 보며 히죽 웃었다.

“표정들 풀어. 뒤질 때 그런 표정 짓고 있으면 장의사가 니들 시신 닦아주다가 놀라겠다.”

검을 뽑아 올린 나는 내 뒤편에 세워져 있을 하얀 담벼락을 보며 말했다.

“개고생했다. 날은 춥고, 잠자리는 불편하고, 먹으라고 주는 밥은 개똥같지. 별로 오고 싶다고 자원한 것도 아닌데 억지로 끌려와서 여기에서 덜덜 떨다가 죽으려니 얼마나 개같을까.”

내 말이 이어질수록 병사들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내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고, 시릴 정도로 냉정한 팩트다.

“너희는 여기에 나 때문에 끌려와서, 싸우게 되었다. 재수가 없으면 죽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 너희들을 떠민 나는 일단, 개인적으로 너희들에게 원한은 없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리안이나 클로에를 비롯한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더 안 좋아진다. 싸움 전에는 응원해서 사기를 고양시켜야 하는데, 나란 새끼는 갑자기 있는 힘까지 다 빼버리는 이야기를 떠들고 있으니 아무래도 불안한 모양이다.

나는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고는 외쳤다.

“지금 네 녀석들을 여기까지 끌고 올라온 나는 두르밀로 관문으로 밀고 들어온 하이랜더를 다시 돌려보내고! 그린모스 늪지대에 출몰한 언데드 군세를 싹 쓸어냈다! 나는 내 나라가 모욕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약속되었던 훈장의 수훈을 포기했고, 이후 나의 공을 인정해 폐하께서 머무르시는 내궁을 내 집처럼 사용할 권리를 주셨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판국에 나 잘났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싸우게 될 녀석들의 표정이 좋아질 리는 없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라는 생각을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인다.

헤로스의 면상은 아군의 머리 위에 떠 있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제부터가 본론이니 귀 닦고 잘 들어라. 왕궁에서 내 목소리는 제법 잘 먹힌다. 이 싸움에서 이기게 된다면 내 목소리는 더 커지겠지. 어떤 부탁이든, 국왕 폐하께서는 내 청을 무시하시지는 않을 거다.”

퍼억, 하고 눈더미 속에 검을 박아넣은 나는 양팔을 벌리고 외쳤다.

“이 전쟁의 목표를 달성하고, 우리가 다시 록밸리 마을로 돌아간다면 전역시켜주마!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

전역. 그 말에 병사들의 표정이 변했다. 두려움이나 억울함 같은 감정은 용광로에 던져진 눈송이처럼 녹아내리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향한 굳건한 열망이었다.

전역하고 싶다. 하이랜더 50마리를 잡아 족쳐야 한다는 불가능한 목표 대신, 이 녀석들 눈앞에 어쩌면 실현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표가 주어졌다.

승리하면 이 짓거리를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

앞에서 쭉 이어졌던 내 자랑은 지금의 한 마디를 위한 거다. 이 정도로 공적을 많이 쌓고, 왕도에서 이름이 드높아진 내가 전역을 약속했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끝이야, 이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다! 아니, 돌아가도 뭐가 없다! 어차피 여기에서 싸우지 않고 뒤로 빠진다면 이후에는 관문을 지키다 늙어 뒤지는 거 말고는 없어! 그렇지 않냐?! 언제까지 근무서고 훈련받고 식사와 수면까지 통제받으면서 살 생각이냐! 이젠 그만하고 싶지 않냐?!”

내 말에 병사들이 무기를 들어 올리며 외쳤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죽어도 본전이란 말이다! 어차피 국경 수비대에 들어온 이상 죽을 때까지 못 나가니까! 하지만 여기, 내가 지금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거다! 어차피 죽을 거, 여기에서 죽거나 아니면 화려하게 승리하고 돌아가서 전역하자는 거다!”

“으아아아아아!”

울려 퍼지는 외침은, 순간적으로 쿠르스트 산맥에 몰아치는 찬바람을 잊게 할 정도로 뜨거운 열망이 담겨 있었다.

“너희들에게 주어진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다, 달려들어 쟁취해라! 어차피 국경 수비대에 머무르게 된다면 그 인생에 다음은 없어! 그렇다면 여기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악바리처럼 엉겨 붙어 새로운 삶을 쟁취해라!”

말을 마친 나는 눈 위에 박아넣었던 검을 다시 뽑아 들고 외쳤다.

“전원, 대열을 갖춰라. 전역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를 막아선 첫 번째 장애물을 무너뜨리자!”

하루를 쉰 병력 앞에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던져졌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천이 넘어가는 병사들의 눈동자 안에 용암처럼 뜨거운 갈망이 불타오르는 것이 보인다.

“대열을 갖춰라!”

내 외침을 병사들이 따라하며, 재빠르게 위치를 가다듬고,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무기를 꼬나쥔다. 나는 그들을 보다가 검을 높이 들어 올리고, 그대로 저편에 보이는 하얀 얼음벽을 가리켰다.

“나아가라! 우리 앞에서 저 허연 벽 아래에 숨어서 달달 떨고 있는 잡것들을 쓸어내자!”

헤로스의 머리는 이제, 적의 머리 위에 떠서 그들의 패배를 예언하고 있다. 사기가 질질 흘러넘치는 격렬한 고함과 함께 우리는 하얀 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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