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87화 (87/275)

087화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일을 벌이려는 걸까.

“쿠르스트 산맥은…….”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저었다.

“거기는 현재 성벽 보수 작업이 진행 중이기에 꾸준히 보고가 들어오는 중이고, 나도 귀를 기울이고 있는 중이야. 만약을 대비해서 감사청의 사람도 몇 명 거기에 붙어 있지.”

그럼 쿠르스트 산맥은 아니다. 끄응, 하는 소리를 내고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던 나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린모스 늪지대.”

내 말에 세자가 나를 바라봤다.

“고대 유적이 발견된 장소를 말하는 건가?”

엘렌은 왕도에 도착해서 곧바로 엔더슨 하이빌의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그린모스 늪지대로 파견되었지.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게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보낸 건지는 모른다. 이전에 클로에가 수상하다고 말했을 때 그렇게 대답한 기억이 있다.

“확실하고 그렇지 않고 간에, 그 제국 황년의 꼬리에 따라붙은 자식이 뭔가 수작질을 꾸미고 있는데, 그나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 그린모스 늪지대라는 거잖아.”

황년이라, 올리비에가 들으면 슬퍼할 만한 욕이겠네.

“그렇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좋아, 라고 말한 다음 잠깐 하늘을 바라봤다.

“유적 발굴을 진행 중인 녀석들에게 따로 특이사항은 없나 한번 보고를 받아봐야겠어. 일단, 바람 쐰다는 핑계로 이 이상 오래 머무는 건 이상하게 생각될 테니 슬슬 돌아가지.”

말을 마친 세자가 휘적휘적 앞장서서 연회장으로 돌아가기 시작하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아, 이제야 정신이 드네. 자네도 내가 계속 데리고 다니면 불편하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세자는 손을 휘휘 저었다. 나는 인사를 하고 로델린이 앉아있는 옆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세자 저하께서 너를 좋게 보시는 모양이구나.”

로델린의 말에 나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저야 감사할 따름이지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연회장의 공기에 섞인 술 냄새가 점점 더 진해져 간다. 취기에 들뜬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고, 서로 자리를 바꿔 앉기 시작한다.

붉어진 얼굴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사람들과, 했던 말을 또 하는 사람들. 정신이 말똥말똥한 상태로 취한 사람들을 보는 건 여러 가지 의미로 난감하다.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래, 술을 안 먹는 사람이 회식 자리에 가면 느낄 법한 기분을 나는 지금 이 연회장 안에서 느끼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로델린도 제법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클로에는 술과 음식을 먹는 속도가 심상치 않다.

밥 먹고 물 먹으면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라서. 다소 지루해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자가 바람을 쐬러 갔던 그 정원으로 다시 향했다.

“환장하겠네.”

주정을 피해 도착한 장소도 정상은 아니었다. 정원에서는 취해서 눈이 맞은 젊은 남녀가 서로의 입술을 뜯어먹는 소리가 참 요란하다.

사실, 서로의 입술만 뜯어먹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일도 하고 있었다.

“이 날씨에 밖에서 저러다니, 안 춥나?”

열심히 돌아다녀 그나마 조용한 곳을 찾아낸 나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벤치에 앉아 멍하니 달을 바라봤다.

“아.”

뒤편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올리비에 황녀가 서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베로나 제국의 황녀님을 뵙습니다.”

내 말에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술을 안 먹으면 아무래도 연회장의 분위기가 좀 거북하죠?”

“그렇습니다. 아마, 올리비에 황녀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올리비에는 연회장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

“다음 날 머리가 아프잖아요.”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틀린 말은 아니다. 술 먹으면 다음 날 머리 아프지.

“레티시아 들롱 양은 동행하지 않은 모양이십니다.”

내 말에 올리비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답답해서 살짝 나온 거라 금방 돌아갈 거예요. 오늘 실수하지 않았나 걱정이라.”

말을 하는 동안에도 올리비에의 눈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따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나와서 걱정되는 모양이다.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올리비에는 지금 연신 손톱을 물어뜯고 있다. 심지어, 손톱의 상태를 봐서는 하루 이틀 저러는게 아닌 모양이다.

내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면 의존성 성격 장애라고 봐도 괜찮지 않을까?

“레티시아 들롱 양과의 관계가 매우 각별해 보이십니다.”

내 말에 올리비에가 고개를 끄덕이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없으면 전 아무것도 아니에요. 세 살 때부터 저에게는 시녀였던 레티시아 말고는 없었답니다.”

말을 마친 올리비에가 드레스 앞섶을 꽉 잡고 중얼거렸다.

“공식 행사에 나설 일이 있으면 미리 적절한 대본을 써주고, 무언가 결정해야 할 일이 있으면 언제나 대신 결정해주고. 아마, 그녀가 없었으면 저는 진작에 황녀 대접을 받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내 말에 올리비에가 눈동자를 떨며 대답했다.

“아니요, 분명히 그랬을 거예요. 둔하고, 멍청해. 저는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없는데 재수 좋게 베로나 제국의 황가에서 태어난 모질이에요. 지진아, 한심한 여자. 이 나이 먹고도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우둔한 맹탕에 골빈 여자. 레티시아가 없었으면 나는…….”

스스로의 몸을 끌어안은 채 자학적인 단어를 쏟아낸 올리비에가 숨을 몇 번 몰아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그…… 죄송해요, 이런 이야기 외국의 귀족에게 하면 안 되는 건데. 잊어주세요. 제발요. 부탁드릴게요.”

“그러겠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올리비에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만 돌아가야겠어요. 그럼.”

말을 마친 올리비에가 황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급한 발걸음으로 연회장으로 돌아간다.

“거참.”

베로나 제국의 황제는 자기 딸이 저러고 있는데도 그냥 두는 건가? 국사가 너무 바빠서 신경을 쓰지 못하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어차피 황위를 계승하지는 않을 황족이니 그냥 방치하거나. 뭐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한다.

잠깐 올리비에가 앉아있던 벤치를 바라보던 나는 한 30분 정도 지난 다음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내가 돌아오자,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치 파티장에 누가 찬물이라도 확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한 사람이 이 정도의 지배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국왕 정도 말고는 없겠지.

“웃고 떠들며 즐기는 자리에 어울리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모두가 모인 김에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둘 것이 있다.”

왕의 말에 사람들이 침묵한 채 이어지는 말을 경청할 준비를 한다.

“쿠르스트 산맥이 처한 상황은 인근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뭇 사람들이 잘 인지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번에, 레드우드 가문에서 쿠르스트 산맥의 상황을 듣고 큰 결정을 내렸다.”

곳간에 비축한 곡식 중 절반을 떼서 쿠르스트 산맥으로 보내기로 한 계약에 대한 이야기였다.

“레드우드 가문의 결단은 쿠르스트 산맥 인근 백성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참으로 갸륵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또한, 레드우드 가문의 장자 마틴 레드우드는 개인적인 만남을 청해, 왕국 안의 귀족들이 쿠르스트 산맥의 사정을 딱히 여겨 각자 낼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식량을 보내 줄 것을 간원했다.”

대충 말뜻을 알아들은 귀족들 몇몇의 얼굴에서 취기가 사라졌다. 침묵 속에서,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이 단체로 짱구를 굴리기 시작한다. 쿠르스트 산맥으로 빠져나가게 될 곡물의 양과, 보내지 않았을 때 잃게 될 것을 계산하는 중이겠지.

“레드우드 가문과 함께 그 갸륵한 뜻을 함께할 자는 없는가?”

왕의 말에, 머리를 굴리던 사람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케링턴 가문이 함께합니다. 레드우드 가문 만큼의 지원을 약속할 수는 없지만, 마련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곡물을 마련해 쿠르스트 산맥으로 보내겠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귀족들이 하나씩 지원 의사를 밝히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한 말은 왕이 들었으니, 따로 계약서 같은 걸 작성할 필요는 없다.

스물여섯 개의 가문이 식량 지원을 약속했다. 이 정도면 여기 와서 내가 개인적으로 왕을 만나 요청한 보람은 있었군. 쿠르스트 국경수비대 사령관도 이 정도면 만족하겠지.

“그대들이 하나 되어 어려운 사정에 처한 쿠르스트 산맥을 돕는 모습을 보니, 국가의 미래가 참으로 밝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럼, 그리 알고 있겠다.”

국왕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30분 정도가 더 지나자, 다시금 연회장의 분위기는 들뜨기 시작한다.

“좋아.”

이 정도면 연회에 참석해서 지켜야 할 예의는 다 지켰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더 머무를 이유도 없지. 로델린에게 다가간 나는 다소 취해있는 로델린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니, 저는 이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 잠시만 기다리렴.”

엄청 피곤하다. 마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내일 느낄 숙취를 내가 오늘 미리 다 받아 보는 느낌이다. 내 말을 들은 로델린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가자꾸나.”

그리고 저 멀리에서 술과 음식을 퍼먹던 클로에도 내 행동을 보고 뭔가 느낀 게 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돌아가시게요? 끅.”

“얼씨구.”

클로에는 질문을 마치자마자 그간 먹은 음식과 술이 얼마나 되는지 알려주겠다는 듯이 순간적으로 끅, 하는 트림을 흘렸다.

그럴 줄 알았지. 아주 그냥 생긴 것만 여자일 뿐이지 먹어치우는 양은 어지간한 장정 세 명보다 더 먹는 것 같더니.

“더 먹을 거면 먹어.”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죠. 마틴 님의 안전 보장은 제 임무인걸요.”

“다행이네. 그럼 그럴까요? 같은 대답이 돌아왔으면 확 해고해 버리려고 했는데.”

먹고 마시는 걸 즐기는 건 딱히 문제없다. 하지만 거기에 빠져서 자기 일을 까먹는 건 문제다.

“부하를 떠보는 건 좋은 상사가 아니에요.”

“아, 그러셔? 연회에서 술과 밥을 잔뜩 퍼먹는 부하도 좋은 부하라고는 할 수 없을 텐데.”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 대신 동전을 몇 개 꺼냈다. 쉬쉬쉭, 하는 소리와 함께 이전에 봤었던 레이피어로 동전 꿰는 기교가 다시 한번 펼쳐졌다.

칼에 꿰뚫린 동전이 차르르 하는 소리를 내며 검신을 타고 미끄러진다.

“보이세요? 취할 정도로 마신 건 아니에요.”

로델린이 옆에서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래, 잘났다. 마차나 타.”

내 시큰둥한 반응에 클로에가 잠깐 으으, 하는 소리를 내고는 마차에 올랐다.

“내일 있을 검투 대회와 토너먼트는 어쩔 거니?”

로델린의 말에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네?”

“대부분의 귀족들은 관람하러 가지만, 연회에서 많이 피로해진 사람들은 가지 않아도 문제없단다.”

말을 마친 로델린이 잠깐 있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는 개인적으로 그닥 선호하는 행사도 아니고.”

“왜요?”

내 말에 로델린이 대답했다.

“그냥, 보고 있으면 마음이 별로 편하지는 않단다. 네가 관람하고 싶다면야 가면 되지만…….”

검투 경기와 토너먼트 다치는 사람 없이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로델린은 피를 보는 걸 별로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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