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화
신년 행사의 날이 밝았다. 오늘로부터 일주일 동안, 이 나라의 사람들은 하던 일을 전부 내려놓고 먹고 마시는 데 집중한다.
“1년 내내 이날만 기다린 것도 아니고.”
나는 멍하니 창밖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의 왕도와 오늘의 왕도는 그 모습의 차이가 굉장하다.
왕도 어디를 가더라도 파이크 왕국의 깃발이 휘날리는 천막이 세워져 있고, 천막 안에서는 수많은 먹거리와 마실 거리들이 무료로 제공된다.
이날만큼은 귀족을 보고도 예를 표하지 않는 것이 허용된다.
또한, 왕도의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도 특별한 용무 없이 왕도 인근에 사는 백성들이 성안으로 들어오려고 해도 필요한 절차를 받은 다음 왕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만약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의 수습을 위해서 한 번 왕도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행사가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왕도에서 나갈 수 없다.
마차는 왕궁으로 향하는 주요 도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통제된다.
“집을 비우다니.”
이 신년 행사의 가장 인상 깊은 점은 바로 저거였다.
왕도 안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의 집 안에 소중한 물건들을 모두 따로 빼놓은 다음 모두에게 개방한다. 젊은 남녀는 길거리에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다가, 서로 마음이 맞으면 그대로 근처에 있는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그 결실로 인해 아이가 생긴다면 그대로 두 사람은 결혼한다.
“10개월 뒤에는 인구가 폭발하겠군.”
내 말에 클로에가 하하, 하고 웃었다.
“백성의 숫자는 곧 국력이니까요. 새해 행사 때마다 일어나는 일이에요.”
심지어 내가 머무르고 있던 알버트의 저택도 꼭 필요한 짐을 모두 빼둔 채 모두에게 개방되었다. 우리뿐 아니라, 왕도 안에 머무르던 귀족들 전체가 자신의 저택을 모두에게 개방하고, 일주일 동안은 왕궁 안에서 숙식을 제공받는다.
왕도뿐 아니라, 각 지역의 영주들도 같은 일을 한다.
“향후 일주일 동안 이어지는 신년 행사에 백성들을 먹이기 위해 준비된 소가 380마리, 돼지가 780마리, 닭이 2800마리라고 들었어요.”
세상에, 그렇게 많이 잡아먹어도 괜찮은 거야? 숫자만 들어보면 거의 왕국의 기둥뿌리를 먹어 치우는 수준인데.
그것도 단순히 제공되는 고기만 그 정도라는 거 아니야. 곡식과 술까지 생각하면 말 그대로 이 나라 사람들이 보낸 작년은 이 일주일을 위해 견딘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는데.
“왕국의 국고는 물론이고, 각 지역의 영주들이 보내오는 물건들도 있으니까요.”
나는 푸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왕궁 일정은 어떻게 되는 거야.”
“오늘은 자정까지 계속되는 연회가 있어요. 내일은 검투 경기와 토너먼트가 펼쳐지고, 모레는 무도회가 있어요.”
점심 식사 이후 해가 질 때까지는 가면무도회, 이후에는 쓰고 있던 가면을 벗은 다음 무도회가 진행된다.
4일 차에는 왕궁 전체가 거대한 도박장으로 변한다.
그렇게 사흘을 놀고 난 다음, 5일 차에는 백성들에게 개방한 집 안에서 일어난 온갖 일들로 인해 더럽혀진 이불 따위를 모두 챙겨 왕도의 광장에 쌓은 다음, 밤이 되면 불을 질러 다 태워버린다.
6일 차에는 5일 동안 놀아 재낀 몸뚱어리를 쉬게 하고, 7일 차에 행사 종료를 선언하고 뒷수습을 한다.
결국, 말이 길었지만 그냥 국가가 허락한 놀자판인 거다.
“가면무도회, 솔직히 마틴 님이라면 크게 의미 없죠?”
나는 그 말에 클로에를 바라봤다.
“무슨 소리야 그건.”
“어차피 가면을 쓰고 있어도 누가 누군지 알아보실 것 같은데.”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애초에 얼굴 가렸다고 누가 누군지 전혀 감도 못 잡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뇌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다들 완벽하게 맞추지는 못해도 짐작 정도는 하겠지.
그리고 나는 그저 그걸 조금 더 잘할 자신이 있을 뿐이다.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놀러 가는 게 아니야. 클로에. 정신 차려.”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의 시녀인 레티시아 들롱이 왕도에 있다. 뭔가 일을 저지를 생각으로 온 것이라면 당연히 신년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벌일 것이다.
우리는 그 여자를 감시하고, 뭔가 수상한 일을 벌이려고 하면 그걸 막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다 노는데 우리만 일하게 생겼네요.”
나는 그 말에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마차의 창으로 보이는 병사를 가리켰다.
“어디 저 친구 앞에서도 한번 그 대사 해보지 그래.”
내 말에 클로에가 시선을 밖으로 던진 다음 대답했다.
“저 친구는 오늘 하루 저러고 내일은 교대하잖아요. 우리는 일주일 내내 신경이 날카로워져야 하는데.”
나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불만 갖지 말라고, 원래 인생이라는 게 다른 사람들 놀 때 혼자 일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 거야.”
크리스마스에 당직서는 군인이나, 토요일에 출근하는 회사원들이 대표적인 예시다.
“그렇겠죠. 어쩔 수 없겠죠.”
말을 마친 클로에는 레이피어의 날을 확인하고, 손수건으로 검신을 닦기 시작했다.
“도착했습니다.”
마차에서 내리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로델린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왔구나. 기다렸다.”
“너무 늦지는 않았을까 걱정이네요.”
내 말에 로델린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마침맞게 잘 왔어.”
로델린은 연회 시작하기 30분 전까지 와달라고 말하고는 먼저 왕궁으로 향했다.
나에게 소개해 줄 사람들과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그 사람들을 나에게 안내할 계획이었으니까.
왕궁에 입궐하는 것치고는 나와 로델린, 클로에의 복장은 굉장히 간편했다.
“엄청나군요.”
왕궁 안에 마련된 연회장 문 앞에 서자, 근사하게 옷을 차려입은 중년이 인사를 하고 우리의 신분을 확인한다.
“마틴 레드우드 님, 레드우드 백작부인 그리고 클로에 로니세라 경. 환영합니다.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계단 위에는 왕을 비롯한 왕족과, 베로나 제국의 황녀가 앉게 될 예정인 상석이 마련되어 있고, 중앙에는 이런저런 공연을 위한 커다란 공터가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공터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테이블과 의자가 무수히 놓여있다.
무도회와 연회는 다르다. 무도회의 메인은 음악과 함께 추는 춤이지만, 연회의 중심은 음식과 술이다. 굳이 다른 단어로 대체하자면 잔치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 같은데.
“여기에 앉으시면 됩니다.”
중년이 안내한 자리는 왕족들이 앉는 단상과 제일 가까운, 왼쪽의 테이블이었다. 왕이 앉는 자리를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왕도의 귀족들이 앉고, 왼쪽에는 그 이외의 사람들이 앉는다.
“대접이 좋구나.”
안내된 테이블에 앉은 로델린이 약간 미소를 띤 채 그렇게 중얼거렸다.
“폐하가 앉으시는 자리와 가장 가깝죠.”
이건 제법 좋은 소식이다. 주변을 살피던 로델린이 살짝 턱짓을 해 꽤 멀리 떨어져 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테이블에는 레드우드 가문의 문장이 박혀 있다.
“레드우드 백작가의 자리도 따로 마련되어 있는 모양이구나. 아마 데이먼이 앉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우리가 앉은 테이블과는 제법 멀리 떨어져 있다. 아마, 우리가 레드우드 백작가에서 초대받은 형식이었다면 저 자리에 앉았겠지.
주변을 둘러보던 로델린이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향한다.
잠시 뒤, 서너 명 정도의 사람이 로델린과 함께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찾아온 사람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잡담을 나누었다.
잡담의 매력은 다른 짓을 하면서 이야기를 해도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대충 추임새를 넣어주면서, 나는 레티시아 들롱과 베로나 제국 황녀 올리비에가 앉게 될 자리를 확인했다.
“그럼, 나중에 무도회에서 보자고.”
대화를 마치고 돌아가자, 나는 로델린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중에 이스트라인 자작이라는 사람 있죠?”
“그래, 그 사람은 왜?”
나는 로델린의 말에 젖은 수건을 손을 닦으며 대답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해드릴 수는 없겠지만, 가깝게 지내시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내 표정을 보던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게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알았다. 아, 다른 사람들도 소개해 줄 테니 잠시만 기다리렴.”
옆에서 클로에가 작게 속삭였다.
“이스트라인 자작은 왜요?”
나는 그 말에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15살 이하의 어린 여자의 몸에 욕정하는 변태라고 말하면 이해가 되나?”
네 글자로는 철컹철컹.
“으…….”
내 대답을 들은 클로에가 얼굴 표정을 순식간에 어둡게 하고 몸을 살짝 떤다.
“어차피 가깝게 지낼 사람 아니야.”
피할 사람은 그냥 피하면 되지, 거기에 대해서 더 생각할 필요는 없다.
“마틴.”
“아, 데이먼 형님.”
그리고, 마침내 레드우드 백작가의 대표로 찾아온 데이먼이 내 쪽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내가 웃는 표정으로 말하자, 데이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냈다.”
말을 하는 와중에, 데이먼이 약간 위축되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야 그렇겠지, 초대받아 왕궁으로 왔더니 떡하니 동생 놈은 왕이 앉는 자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았고, 자신은 저 멀리에 떨어져 있으니까.
내가 쿠르스트 산맥으로 쫓겨나기 전과는 많이 다른 태도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제인 부인은 좀 어떠십니까?”
“마찬가지로 어머니도 잘 지내고 계신다.”
이 친구 몸무게가 좀 빠졌는데? 아무래도 나름대로 마음고생을 할 일이 좀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 오늘 연회 중에 폐하께서 이야기를 꺼내실 것 같습니다.”
내 말에 데이먼이 응?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무슨 이야기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저번에 제가 아버님의 영지로 찾아가서 서로 합의를 본 내용 있지 않습니까.”
내 말에 데이먼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동시에 주눅 들어있던 녀석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 기억한다.”
“폐하께서 언급을 하신다면 분명히 데이먼 형님에게도 이런저런 질문을 하실 수도 있다 생각합니다. 어련히 잘해주실 거라고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니 다시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데이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은 걱정할 필요 없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니들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이미 서류에 인장까지 꽝 박아넣고 합의한 내용을 번복할 수는 없으니까. 그냥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해주는 것뿐이다.
“그리고, 너 또한 약속을 성실히 이행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데이먼의 말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부가 있습니까. 레드우드 영지는 데이먼 형님이 이어받게 될 겁니다.”
안 그래도 별로 탐이 나지 않던 영지였는데, 세자에게 따로 임무까지 받게 된 지금 와서는 정말로 관심이 없어졌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그럼, 신년 행사 동안 즐거운 시간 보내거라.”
“형님도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대화를 마친 다음 로델린이 소개해주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금방 연회 시작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