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화
마차를 타고 저택을 나선 나는 마차의 맞은편에 앉은 로델린을 향해 말을 건넸다.
“옷 한 벌 맞춰드리고 싶은데, 어떠세요?”
챙겨둔 돈이라면 어디 가서 욕을 듣지는 않을 정도의 옷 한 벌 정도는 충분히 살 수 있을 거다. 내 말에 로델린이 손사래를 친다.
“얘는, 지금 가지고 있는 옷으로도 충분하다. 이 이상 있어봤자 짐이야.”
이 이상 있어봤자 짐이라. 나는 마차에 동석하고 있는 클로에를 바라봤다.
“레드우드 부인께서 가지고 계신 드레스의 숫자는, 적은 편이에요.”
그렇다는데? 내가 다시 로델린 쪽으로 시선을 던지자 그녀가 약간 기어들어 가는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어지간한 드레스는 너무 가격이 비싸지 않니.”
그래, 뭐 냉정하게 말해서 보통 17살 먹은 애가 쉽사리 선물해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건 나도 동의한다.
근데 내가 어디 보통 17살이냐.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드레스가 좋을 것 같네요.”
내 말에 로델린이 뭐라고 더 말을 하려고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래, 사 줄 때 받아.
“신년 행사 일정이 어떻게 되지?”
“무도회는 사흘 뒤에 열려요. 오늘 바로 실력 있는 재단사에게 맞춤 드레스를 주문한다면 무도회 전에는 받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클로에가 내가 물어본 의도를 곧바로 눈치챈 다음 대답을 돌려주었다.
“다행이네요. 신년 행사 때 맞춰드린 드레스를 입고 가신다면 나름대로 의미도 있고.”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이상 거절하지는 않으마.”
문제는 다음인데. 클로에가 말했던 실력 있는 재단사라고 하는 사람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걸까. 로델린이 내 표정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재단사를 잘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곳이 있으니 거기로 가자.”
로델린의 말에 내가 뭐라고 첨언을 하려고 하자 곧바로 로델린이 선수를 쳤다.
“기왕에 아들이 드레스를 맞춰준다고 했고, 나도 마음을 먹었으니 저렴한 곳으로 갈 생각은 없어. 각오하렴.”
귀신처럼 내가 할 말을 알아차리고 저렇게 나오니 나도 할 말이 없네. 로델린이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고민이 많아도, 한번 결정을 내린 다음에는 팍팍 진도를 치고 나가는 편이긴 하다.
그렇지 않고 계속 어물어물하는 성격이었다면 애초에 레드우드 영지도 떠나지 못했을 거다. 로델린의 안내에 따라 마차는 왕도에 있는 재단실 중 하나에 도착했다.
재단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꽤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가 안경을 쓴 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한다.
“환영합니다. 실례지만 존함을 여쭈어봐도 괜찮겠습니까?”
곧바로 로델린이 입을 열었다.
“나는 레드우드 부인이고, 옆에 있는 자는 내 아들 마틴 레드우드다.”
나와 대화를 나눌 때와는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긴 하다. 목소리에서 따뜻함이 쫙 빠져 있다.
로델린의 대답을 들은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안경을 한 번 고쳐 쓰고 나와 로델린을 번갈아 확인한 다음 나를 향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요즘 왕도에서 소문이 자자한 분을 직접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어머니께 드레스를 한 벌 맞춰드리려고 하는데.”
내 말에 재단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로델린을 바라봤다.
“레드우드 백작 부인, 치수를 확인해도 괜찮겠습니까?”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수로 보이는 여자가 로델린에게 다가왔다.
“잠시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로델린이 여자를 따라 이동하고, 나는 재단사로 보이는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치수를 잰 다음, 완성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가능하면 신년 행사 무도회에 어머니가 드레스를 입고 가셨으면 좋겠는데.”
내 말에 재단사가 웃었다.
“제가 만든 드레스를 레드우드 부인께서 입고 무도회에 나가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무도회 전까지는 문제없이 완성해 보이겠습니다.”
“저걸 보니 주문이 약간 밀린 것 같은데.”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이런저런 쪽지들과 기한이 붙어 있었다. 유명한 재단사라는 말에 걸맞게, 신년 무도회에 맞춰 옷을 주문한 사람들이 꽤 많은 모양이다.
“다른 분도 아니고 마틴 레드우드 님께서 직접 요청하셨으니, 기한에 맞추지 못할 것 같은 분들에게는 미리 양해를 구할 생각입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 쿠르스트 산맥에서 해낸 일에 더해서, 엔더슨의 체포까지 관여한 덕분에 왕도에서 나름대로 이름값이 높아진 모양이다.
“선금은?”
“어느 정도 물건을 생각하고 계신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맞춤 드레스다보니 당연히 원하는 드레스의 품질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모양이다.
“드레스에 대한 건 나보다는 어머니가 더 잘 알고 계실 테니, 자세한 내용은 어머니와 상담해보는 편이 좋겠는걸.”
“네, 그럼 백작 부인께서 돌아오시면 더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치수를 마치고 돌아온 로델린이 재단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확실히, 이 시대에 옷을 산다는 행위는 그냥 쇼핑몰에서 마우스 클릭 몇 번 하면 다음 날 휙 하고 배송되는 현대 지구와는 다르다.
원단은 무엇을 쓰길 바라는지, 디자인은 어떤 걸 기반으로 할지, 옷에 어디에 포인트를 주는 게 좋을지. 그런 것들을 결정해야 하다 보니 예상외로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사이 나는 클로에에게 저녁 식사를 할 만한 식당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너도 먹을 거면 자리 하나 더 잡고.”
내 말에 클로에가 아하, 하는 소리를 냈다.
“아들과 어머니가 함께 자리하는데 어떻게 제가 거기에 끼겠어요.”
“같은 테이블을 쓸 수는 없지만, 따로 자리 하나 더 예약하는 정도는 문제없잖아?”
내 말에 클로에가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두 분이 식사를 할 만한 장소라면 저 같은 사람들은 따로 자리를 예약할 수 없을걸요.”
나는 그 말에 클로에의 가슴에 달려 있는 배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니 가슴에 달려 있는 건 까먹었냐?”
너 기사야 인마. 내 말에 클로에가 자기 가슴을 확인하고는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하긴 뭐, 오늘 기사서임을 받았으니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
“이걸 까먹고 있었네요. 바로 예약하겠습니다.”
예약을 마친 클로에가 다시 돌아오고, 다시 30분 정도를 기다렸을까. 마침내 재단사가 나에게 와서 인사를 하고 가격을 말해주었다.
“2300론도라.”
선금으로 500론도를 주고, 드레스를 받은 다음 잔여금을 치르기로 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와중에 옆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와서 고개를 돌려보니 로델린이 웃고 있었다.
“아들에게 드레스 선물을 받으려니 기분이 이상하구나.”
난 부모 역할을 해본 적도 없고, 자식 노릇을 해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키우던 자식놈이 자라서 선물을 해준다고 하면 기분이 뭔가 이상하긴 하겠지.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네요, 식사하셔야죠.”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 세워져 있던 마차로 다가가던 나는 로델린을 향해 말했다.
“잠깐만요.”
마차를 타고 오면서 커튼을 친 기억은 없는데. 앞으로 걸어가는 로델린을 팔로 막은 나는 클로에를 바라봤다.
“어머니를 지켜.”
내 대답을 들은 클로에가 허리에 차고 있던 레이피어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로델린이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바로 옆에 서 있는 클로에와 마차로 다가가는 나를 바라본다.
“…….”
마차로 다가간 나는 분신을 만들어 마차 문을 열었다.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로 자세를 잡고 있던 내 눈에, 마차 안에 놓인 편지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또 뭐야.”
다시 분신을 만들어 마차 바닥에 놓인 편지봉투를 뜯은 나는, 별다른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 안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
제비꽃이 붉은 묘목에게.
이번에 카넬리안이 당신에게 신세를 졌다고 들었습니다.
슬프게도, 결국 형장의 붉은 녹으로 사라지게 되었군요.
여기까지 해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축하드려요. 많이 기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직접 얼굴을 마주 볼 날이 기다리겠습니다.
추신. 머리는 좋으신 편인가요, 한판 해보지 않겠습니까? 54.
--------------------
편지에 써진 글은, 글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제비꽃은 자색이다. 나는 레드우드, 붉은 묘목이다. 칠색 내각의 자색이 나에게 보낸 편지다.
다나 힐베른이 손등에 박았던 붉은 보석 카넬리안은 당연히 검은사자 기사단의 엔더슨을 뜻하는 거겠지. 일종의 경고장 같은 거다.
“싱거운 새끼네. 뭐 대단한 일을 한다고 이렇게 부끄럼을 탈까.”
자리 비운 사이에 몰래 마차 안으로 들어가서는 한 짓이 겨우 편지 놓고 돌아가는 거냐. 누가 보면 경고장이 아니라 팬레터인 줄 알겠네.
글씨체를 쭉 훑어본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주머니에 편지를 구겨 넣으며 로델린을 바라봤다.
“어머니, 아무래도 마차 말고 걸어가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겉보기에는 이 편지 말고 별다른 이상한 점은 없어 보이지만, 굳이 찝찝한데 위험을 감수하고 이 마차를 다시 타야 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거리도 그렇게 멀지 않으니까.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재단실로 들어가 종이와 잉크를 받아서 휙 하고 뭔가를 적었다.
“뭘 쓰세요?”
나는 클로에의 말에 종이를 내밀었다.
“자.”
클로에가 내가 내민 종이의 내용을 읊었다.
“심심한가 보지? 35. 다음에 편지할 때는 어디로 답장을 보내야 하는지도 적을 것.”
클로에는 내용을 다 읽은 다음에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저기, 이건 암호문 같아 보이는데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설마, 나를 의심하는 거야? 저건 그냥 체스야.”
내 말에 클로에가 허,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럼 저게 체스판 좌표라는 거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에서는 체스판 좌표를 말할 때 알파벳과 숫자를 혼용하는데, 이 세상에서는 숫자 두 개로 좌표를 정하는 걸로 안다.
체스 기물의 명칭도 조금 다르긴 하지만, 룰 자체는 유사하다.
“놀아달라고 하는데, 못 놀아 줄 건 없잖아?”
뿌리 뽑아야 하는 조직의 수장과 우편으로 하는 원거리 체스라. 나름대로 운치를 갖추고 싶어 하는 녀석이군.
* * *
[심심한가 보지? 35. 다음에 편지할 때는 어디로 답장을 보내야 하는지도 적을 것.]
“역시 알아차렸군. 너무 쉬웠나? 조금 더 꼬아볼 걸 그랬어.”
손에 쥔 쪽지를 보고 희미하게 웃던 자색은 받아 든 쪽지를 촛불에 태운 다음 새로운 편지를 써두었다.
지금 당장 보낼 생각은 없다. 천천히 보내면 되겠지. 어차피 심심풀이로 한번 해본 유흥거리일 뿐이니까.
“레티시아 들롱을 당장 건드릴 수는 없겠지.”
그녀가 파이크 왕국의 땅 안에 있는 한 마틴 레드우드는 그녀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하지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을 거다.
“그거면 충분해.”
어차피 애초부터 왕국의 신년 행사 따위는 별로 안중에 없었다. 그저, 마틴 레드우드와 첩보국의 시선을 왕도에 붙들어 두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를 없애고, 그사이 다른 곳에서 일을 벌여놓는다.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이걸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자색이 은잔을 손에 쥐자. 곧바로 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자색, 이쪽은 준비가 끝났소이다.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다면 바로 시작하고 싶군.
은잔 너머의 노쇠한 노인의 목소리를 확인한 자색이 대답했다.
“아니. 아직은 진행하지 마라.”
― 이유를 알 수 있겠나?
은잔 너머에서 들리는 의문에 찬 목소리에 자색이 혀를 한 번 찬 다음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파랑아, 생각도 내가 하고 개시도 내가 한다. 너는 그냥 따르면 되는 거지.”
잠깐 은잔 너머에서 끄응, 하는 소리가 들렸다.
― 알았네.
“좋아. 그럼 따로 지시를 내리기 전까지는 기다리고 있도록.”
말을 마친 자색은 은잔을 내려놓고 연락을 끊었다.
“사실, 지금 바로 시작해도 좋지만. 그건 너무 재미없잖아.”
자색은 말을 마치고 나서 물을 한 모금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