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화
머리가 복잡해진다. 설마, 내가 까먹었을 거라 생각하고 여기에 온 건가? 만약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여기에 왜 온 걸까.
그냥 머리가 나쁜 건가? 라고 치부하고 넘길 수는 없는 사안이다.
“호위라고 해도 크게 바라는 역할은 없어요. 그저, 파이크 왕국의 왕도를 돌아다닐 때 옆에서 수행을 해주시는 정도면 충분해요.”
어차피 황녀를 호위하기 위한 병력이야 지금 이 귀빈궁 안에도 차고 넘칠 테니까.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문이 열렸다.
“베로나 제국 제1황녀 올리비에 라가르드 저하께서 행차하십니다. 예의를 갖추시오.”
귀하신 분이라 그런지 열린 문으로 그냥 걸어들어오지는 않으시는 모양이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허리를 숙인 채 기다렸다. 그래서, 황녀다 이거지.
“편히.”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굽혔던 허리를 폈다. 하지만, 얼굴을 직시하지는 않도록 고개는 숙이고 있었다.
“고개를 드세요.”
숙였던 머리까지 들어 올리자, 그제야 나는 눈앞에 서 있는 여자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이는 18-20세 사이.
152cm 정도로, 그렇게 큰 편이 아니다.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와 검은 머리카락.
“만나서 반가워요, 마틴 레드우드.”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말을 마친 올리비에가 옆에 서 있는 레티시아를 보고 입을 열었다.
“레티시아, 제가 앉아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황녀 저하.”
대답을 한 레티시아가 의자를 내어주자, 올리비에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저도 차를 한 잔 마시고 싶은데.”
올리비에의 다소 조심스러운 말에 레티시아가 웃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어떤 차를 드시고 싶으십니까?”
“음…… 레티시아가 골라주시겠어요?”
“그럼, 적절한 차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나는 그 대화를 들으면서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녀는 왜 레티시아라는 여자에게 저렇게까지 조심스러운 거지.
황녀가 방에 들어와서는 앉아도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부터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는데. 이제는 아무 마실 차까지 골라준다니.
“베로나 제국의 황녀 저하를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래요.”
올리비에는 내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별로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닌 모양이지. 그 와중에, 올리비에가 문을 지키는 병사를 보고 말했다.
“레티시아는 멀었나요?”
“조만간 돌아올 겁니다, 황녀 저하.”
레티시아가 자리를 비운 지 3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찾는다고? 점점 더 레티시아라고 하는 여자와 이 황녀가 무슨 관계인지 궁금해지는걸.
“두 분이 사이가 매우 좋으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올리비에가 그제야 반응을 보인다.
“네. 제가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 있어 준 친구니까요.”
재미있는 이야기다.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아무래도 이 황녀는 레티시아라는 여자에게 꽤 의존하는 모양이다. 의자에 앉은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그 의심이 점점 더 커진다.
“이제 왔네요.”
문이 열리고 레티시아가 돌아오자 황녀의 입가에 확 하고 웃음이 퍼진다.
“어머, 이야기라도 잠시 나누고 있으시지 그러셨어요.”
“나눴어요.”
레티시아가 가져온 차를 내려놓는다.
“황녀 저하, 차가 많이 뜨겁습니다. 불어드릴게요.”
레티시아의 말에 올리비에가 고개를 끄덕인다. 찻잔을 입가로 가져간 레티시아가 차를 후후 불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고 있던 올리비에는 자신이 앉아있는 의자를 슬쩍 움직여 레티시아에게 더 붙는다.
“오늘은 뭘 하는 게 좋을까요?”
올리비에의 질문에 레티시아가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을 돌려준다.
“파이크 왕국에서는 꽤 좋은 품질의 천이 나온답니다. 왕도를 잠시 거닐다 보면, 마음에 드는 옷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레티시아가 골라주는 게 좋은걸요.”
이 정도까지 대화를 들고 나니 거의 확신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레티시아라고 하는 이 여자는 제국의 제1황녀를 자기 치마폭으로 감싸놓고 자기 맘대로 쥐고 흔든다.
그래, 이러면 이해가 되지. 파이크 왕국의 첩보국이 칠색 내각에 대한 조사를 서두를 것 같으니 이 여자가 황녀를 꼬드겨서 왕국에 오게 한 것이다.
그 결과, 첩보국은 갑작스러운 황녀의 방문에 갑자기 해야 할 일이 폭증해서 칠색 내각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지 못했다.
“잠시만, 닦아드리겠습니다.”
차와 다과를 다 마시고 나자, 레티시아가 올리비에의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아준다.
“바로 나가는 건가요?”
“네,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황녀 저하.”
레티시아의 대답을 들은 올리비에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레티시아가 곧바로 뒤편에 걸려 있던 코트를 올리비에에게 입혀준다.
“따라오세요.”
“알겠습니다.”
코트를 입혀주면서, 레티시아가 나에게 명령하는 투로 말을 건넨다.
올리비에 황녀의 옷과 장신구는 모두 레티시아가 고르기 시작한다. 올리비에는 그걸 보고 있다가, 예의상 레티시아가 '이건 어떠신지요?'라고 물어보면 '좋아요.'라고 대답하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레티시아가 삐에로 분장을 사서 올리비에에게 입히려고 해도 올리비에는 좋다고 말할 것 같은 느낌이다.
“자, 들고 따라오세요.”
말이야 존댓말이지 아주 사람을 짐꾼 취급하는구나. 나는 옷가지와 귀금속 따위가 들어있는 가방을 짊어지고 두 사람을 졸졸 쫓아다녔다.
그러다가 커다란 분수대가 인상적인 광장 앞에 도착하자 레티시아가 나를 슬쩍 돌아보고 한마디 한다.
“아, 여기서 잠시 기다리세요. 식사를 하고 올 테니. 혹시 옷이나 귀금속이 상할 수 있으니 앉지는 마시고, 금방 돌아올 거니 힘들지는 않을 거예요.”
그리고는 레티시아는 올리비에와 함께 휭 하니 식사를 하러 갔다.
“그래, 니들 입은 입이고, 내 입은 아가리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하품을 한 번 하고 옷가지와 귀금속 따위를 바리바리 싸든 채로 서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저 인간들이 1시간 안에 돌아오면 내가 이 광장에서 옷 벗고 개다리춤을 춘다.”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하염없이 두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약 2시간 30분 지나서야 두 사람이 돌아왔다. 개다리춤을 출 일은 없었다.
“그럼, 다시 이동하죠.”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짊어진 짐이 어지간한 군장 두 개 정도의 무게에 도달하자 마침내 저녁이 되었고, 나는 해방될 수 있었다.
“괜찮으세요?”
“뭐가.”
알버트의 저택에 돌아온 나는 물을 한 잔 마신 다음 클로에를 바라봤다.
“오늘 분수 광장에서 몇 시간이 넘도록 서 계신 모습을 사람들이 봤어요.”
“그렇겠지. 내가 투명인간은 아니잖아.”
내 말에 클로에가 애매한 웃음을 지은 채 나를 바라봤다.
“화가 많이 나셨겠네요.”
“별로. 이전에도 말했지만 그 친구들이 나를 꽃가마 태워주고 싶어서 부른 건 아니잖아?”
예상하고 있던 일이 일어났는데 화를 내지는 않는다.
“그것보다는, 첩보국장을 좀 만나고 싶은데.”
내 말에 클로에가 어,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죄송하지만…….”
“올리비에 황녀와 딱 붙어 다니는 레티시아라는 여자가 있는데. 아무래도 칠색 내각의 고위 간부인 것 같아.”
내 말에 클로에가 식사를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확신하세…… 아니, 알겠습니다. 바로 국장님에게 연락할게요.”
입을 열었던 클로에가 하려던 말을 다시 호록 먹어치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30분 정도 지나고 난 다음, 나는 저택으로 찾아올 알버트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황녀를 모시고 온 제국 인간들에 대한 조사는 잘 되고 있습니까?”
내 말에 알버트가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나를 바라봤다.
“850명이야. 황녀의 방문 때문에 제국에서 이 나라로 보낸 인간들이 그 정도지. 거기에 더해서 추가로 조사해야 하는 인원까지 합치면 2000명이 넘어.”
“이야, 공사다망하셨겠습니다.”
내 말에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망할 제국의 버러지 새끼들.”
별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버러지고 뭐고. 일단 전해드릴 이야기가 있어서 이렇게 와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래, 들롱 후작가의 레티시아. 베로나 제국 제1황녀 올리비에의 시녀지.”
알버트가 조사한 바가 사실이라면, 올리비에는 레티시아가 다섯 살일 때부터 시녀로서 곁에 있었던 여자라고 한다.
“황족을 어릴 적부터 보필하던 시종이나 시녀가 황족과 긴밀한 사이가 되는 건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야.”
“제가 본 두 사람의 관계는 긴밀이라는 단어로는 조금 부족할 지경이더군요.”
내 말에 알버트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 올리비에 황녀가 자신의 시녀인 레티시아에게 다소 의존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되었어.”
“그리고 그 레티시아는 칠색 내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내 말에 알버트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의심으로는 조금 부족한데.”
나는 그 말에 로티샤 호수의 어부 살인 사건에서 내가 발견했던 것들을 공유해주었다. 알버트는 그 말을 듣고 나서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제가 로티샤 호수로 찾아갔던 날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첩보부에서는 그 당시 레티시아 들롱이 어디에서 무엇을 했었는지, 그 행적이 확인됩니까?”
제국의 황녀가 심하게 의존하고 있는 시녀다. 그 행적을 첩보국에서 파악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내 말에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당시 레티시아 들롱은 황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웠었지.”
“이쯤 되면 확신해도 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알버트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마틴, 첩보국은 왕국의 안위가 최우선적인 고려대상이네.”
나는 알버트의 말을 듣고 녀석을 바라봤다.
“말 돌리지 마시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세요.”
“현재 그녀의 지위와 황녀와의 관계를 고려해보면, 레티시아 들롱이라는 여자는 첩보국이 건드리기 힘든 존재라는 뜻이야. 그녀가 칠색 내각의 간부 중 하나라고 해도, 왕국 선에서는 그녀에게 해를 끼칠 수 없네.”
나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약간 구겼다.
“대충, 말뜻은 이해했습니다.”
“게다가, 첩보국 선에서 파악했던 정보와 자네의 진술을 종합하면…… 설사 레티시아 들롱이 칠색 내각이라는 조직의 간부라고 해도 올리비에 황녀가 그녀의 처벌을 원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제국의 황녀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면 방법이 없다.
“황제가 처벌할 가능성은 없습니까?”
내 말에 알버트가 고개를 저었다.
“베로나 제국의 황제는 올리비에 황녀의 말이라고 하면 껌벅 죽지. 올리비에 황녀는 늦둥이라서 사실상 손녀나 다름없거든. 게다가 황제에게는 첫 딸이기도 하고.”
올리비에는 레티시아의 말에 껌벅 죽는다. 그리고 제국의 황제는 올리비에의 말이라면 껌벅 죽는다. 중간 유통과정을 생략하면 레티시아의 말에 제국의 황제가 껌벅 죽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자네는 엔더슨 하이빌의 조사에 집중해줬으면 좋겠어. 어차피 외국의 일 아닌가. 베로나 제국의 황녀가 칠색 내각의 간부에게 놀아나고 있는 건…… 첩보국에서는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젠장, 그 외국 여자가 로티샤 호수에 사람을 끌고 와서 붉은 가지를 꺼내려고 했어!
다른 나라 백작 가문의 가보를 노릴 정도라면, 다른 것도 얼마든지 노릴 수 있다는 거다. 예를 들면 내 목숨 같은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