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화
나는 레온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집무실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올해? 아니요. 곳간 식량의 절반이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어디서 슬쩍 바꿔치기를 하려고. 나는 종이를 꺼내 들고, 펜과 잉크를 챙겨 레온 앞에 내려놓았다.
“쓰시지요. 아, 도장은 형님 손에 끼워져 있으니 저걸로 찍으면 되겠네요.”
“명심해라. 너는 지금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레드우드 가문이 앞으로 네 뒷배가 되어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또한, 이 영지의 권리라면 무엇이든 절대로, 너에게 돌아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레온의 긁어 올린 것 같은 발악을 듣고 한숨을 쉬었다.
“쿠르스트 국경 수비대 사령관의 입김도 무시하지 못하는 뒷배라. 별로 저에게 필요할 것 같지는 않네요. 영지의 권리라면 아까도 말했지만, 제 협박에 동의하신다면 어차피 저도 거들떠볼 생각이 없었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레온이 떨리는 손으로 펜에 잉크를 묻혀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쿠르스트 국경 수비대에서도 엄청 감사하게 생각할 겁니다.”
“너는 가족을 져버린 거다. 사령관이 무엇을 약속했건, 그자도 결국 남일 뿐이다. 가족끼리는 자신의 손해를 감수해서라도 서로를 돕지만, 타인에게는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그래서, 언제 다 쓰실 겁니까? 저녁 만찬 전에는 끝나겠죠?”
잠시 뒤, 레온에게서 완성된 서류를 건네받은 나는 내용을 확인했다. 문제가 될 구석은 없어 보인다.
데이먼이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쉰 다음 내 쪽으로 반지를 내밀었다. 나는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제가 받아서 찍으면 효력이 없지 않습니까? 다시 반지 끼우시고, 직접 찍으셔야죠.”
내 말에 데이먼이 끄응, 하는 소리를 내고 레온이 작성한 서류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데이먼의 손을 탁 쳐내고 말했다.
“입회인이 없지 않습니까. 빨리 사람 보내서 사제를 데려오시죠. 그사이 나눠 가질 사본 두 장을 작성하시면 되겠네요.”
내가 원본을 가지고, 레온 백작이 사본 한 장. 그리고 입회인으로 참가한 사제에게 또 한 장. 내 말에 레온의 눈이 질끈 감겼다. 나는 그런 그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사본이 완성되고, 영주성에 상주하는 사제가 찾아왔다. 내가 서명하고, 데이먼이 반지의 인장을 찍고, 사제가 자신의 인장을 찍었다. 나는 공손한 태도로 두 사람을 향해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지, 쿠르스트 산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렇게 큰마음을 쓰시다니. 레드우드 가문의 이름이 자랑스럽습니다.”
사제가 앞에 있으니, 아까처럼 싹퉁바가지 없는 태도를 유지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건 방금까지 나를 죽일 기세로 바라보던 레온과 데이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구나.”
할 일을 마친 사제가 자신의 사본을 챙겨서 돌아갔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서류의 원본을 챙긴 다음 두 사람을 향해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던졌다.
“그럼 저녁 만찬 때 뵙겠습니다. 못다 한 회포를 풀 생각을 하니 벌써 두근두근하네요.”
레드우드 영지로 온 목적 중 가장 중요한 건 지금 달성했다. 나머지는 뭐, 로델린이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정도가 있겠네.
“길게 머무를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레드우드 영지는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우호적인 땅이 아니다. 세간의 이목이 신경 쓰여서 대놓고 적대적으로 행동하지는 않겠지만, 이 땅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이제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
“다음은 로델린이구나.”
곧바로, 나는 로델린이 머무르고 있을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로델린은 자신의 거처 안에서 쉬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만나 볼 수 있었다.
“어서 들어오렴.”
곧바로 로델린은 하인으로 하여금 차를 준비하게 하고, 나에게 자리를 내주고 그 맞은편에 앉았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나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다행히, 요즘에는 식사를 제대로 하시는 모양이네요.”
저번에 로델린을 만났을 때 보다 훨씬 살이 붙은 모습이다.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없던 식욕도 생기더구나. 요즘에는 너무 과식하는 거 아닐까 걱정이지 뭐니. 너도, 그렇게 힘든 일을 겪었는데도 불구하고 건강한 모습이라 한시름 놓았다.”
“저야 뭐, 누가 와서 죽이려고 해도 안 죽을 놈인걸요.”
찻잔을 내려놓은 나는 곧바로 찾아온 본론을 말했다.
“어머니가 괜찮으시다면, 왕도에 부족함 없이 머무를 수 있는 곳을 마련해드릴 수 있습니다.”
내 말에 로델린이 대답했다.
“가게 된다면, 나 혼자 살게 되는 거니?”
나는 그 말에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저도 어머님과 함께 살 생각이에요. 하지만, 아무래도 밖으로 자주 불려 다니는 경우가 많을 것 같아서…….”
감사청은 당연히 감사를 한다. 감사는 가서 확인하는 일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가서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은 지금으로서 내가 확실히 로델린에게 말해주기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로델린이 함께 왕도로 향하는 편이 그녀에게 훨씬 좋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나는 이미 레온 백작의 눈 밖에 났다. 사실, 눈 밖에 난 정도가 아니지. 내가 그 친구의 아들만 아니었다면 사람을 보내서 죽이려고 들어도 그렇게 놀랍지 않다.
그런데 로델린이 여기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살 수 있을까? 가능성이 너무 희박하다.
“그렇구나.”
로델린은 그 대답을 끝으로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찻물만을 들이켤 뿐이었다. 나도, 로델린을 재촉하지 않았다. 선택은 언제나 당사자의 몫이다. 내가 봤을 때는 로델린이 이 영지를 떠나는 게 가장 현명한 판단 같지만, 당사자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그렇게, 주전자 안의 차를 거의 다 마실 때가 되어서야 로델린이 입을 열었다.
“왕도의 생활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원래 모든 일이 하기 전에는 모르는 법 아니겠니.”
저 말은 사실이다. 세상 일이 내가 짠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리란 법은 없다. 당장 나는 감사청에 소속될 생각이지만, 막상 가서는 다른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말을 마친 로델린이 빈 찻잔을 바라보았다.
“왕도에는 아는 사람들이 제법 있기는 하다. 결혼 후로 연락이 소원하기는 했지만…… 왕도로 돌아가 연락해본다면 답장을 주는 사람들이 조금은 있을 거야.”
왕도에 아는 사람이라. 그러고 보면 로델린은 귀족이었지. 로델린의 인맥은 당연히 남성이 아니라 여성에 치중되어 있겠지. 그리고, 그런 종류의 모임은 아무래도 내가 참석하기는 힘든 경우가 많다. 까놓고 말해서 초대해주지 않을 거다. 하지만 로델린이라면 가능하겠지.
“아마,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로델린의 아들이나. 누군가 나에게 요청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직접 나를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로델린을 통해 나에게 말을 전달하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을 거다. 물론, 반대로 내가 로델린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도 있다.
“그럼 함께 하시는 걸로 알고 있을게요.”
대화를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로델린의 거처를 나섰다.
“이야,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복도에서 등장한 데이먼을 보고 나는 반가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도대체 너는 뭐가 문제인 거냐.”
“그건 내가 물어보고 싶은 질문입니다, 형님.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니가 그렇게 나를 노려볼 이유가 도대체 뭐야.
“형님이 영지를 상속받게 되었으니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요.”
내 말에 데이먼이 뭐라고 하려던 말을 멈췄다. 내 말이 틀렸냐? 잘 생각해봐.
“어차피 아버지 대에서 지불하고 끝나는 겁니다. 이후에 이어받게 되는 데이먼 형님 입장에서는 화를 낼 일이 아니죠.”
“그게 지금 말이라고…….”
지금 곳간 안의 식량이 데이먼의 소유냐? 아니잖아. 레온 백작이 열 받아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건 그렇다고 치는데, 너는 그럴 이유가 없지.
“아버지가 곳간을 열었더니 형님의 영주 자리가 확정되었습니다. 저 같으면 제 얼굴에 뽀뽀라도 퍼부어 주고 싶을 것 같습니다만.”
물론 뽀뽀하려고 달려들면 때리겠지만. 고맙다고 선물이라도 보내주지는 못할망정 시시비비를 따지려고 들어? 데이먼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나는 그런 멍한 데이먼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쉰다.
“머리를 좀 쓰는 건 어떨까요. 아버지 옆에서 형님 얼굴이 굳어졌던 게 연기인 줄 알았더니만. 진짜 화를 낸 거면 어떡합니까.”
차기 영주가 머리 굴리는 꼬라지를 보니 레드우드 영지의 미래가 어둡구나. 저 머리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고 그러냐. 녀석도 내 말을 듣고 자신이 화를 낼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더 하실 말씀 없으면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 영지 상속권을 확보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있다 돌아가서 제인이랑 함께 와인 한 병 따. 말을 마친 나는 데이먼에게 인사를 건네고 클로에가 머무는 장소로 향했다.
“방은 좀 어때. 불편한 거 없어?”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딱히 불편한 건 없어요. 방도 넓고, 침대도 편해요.”
그렇다니 다행이네. 클로에는 레이피어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때문에 오신 거죠?”
내가 그럼 이 밤에 뭐하러 여기까지 왔겠어.
“챙겨서 연무장으로 나와. 길 모르면 하인에게 물어보고.”
말을 마친 나는 곧바로 영주성 안에 위치한 연무장으로 향했다.
“도련님.”
무기를 들고 훈련 중이던 영주성의 병사들이 나를 보고 움직임을 멈춘 다음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고 경례한다.
“고생한다.”
“아닙니다.”
내 말에 병사들이 황급하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다소 굳어있는 녀석들의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그들을 교육하고 있던 자를 향해 말을 건넸다.
“잠깐 연무장 좀 써야 할 것 같은데, 상관없겠지?”
내 말에 병사들을 가르치던 교관이 황급하게 대답했다.
“네, 자리를 비워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교관은 병력들을 데리고 연무장을 나갈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와중에 클로에가 옆으로 다가와 물통 하나를 내려놓았다.
“병사들이 훈련 중이었네요.”
“뭐 어때. 저 친구들이 뭘 하건.”
“그건 그렇네요.”
말을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병사들 몇 명이 클로에를 확인한 모양이다. 다들 시선이 클로에 쪽으로 계속 향해있다. 마침내 병력들이 연무장을 나갔다. 나는 검을 휙휙 돌리며 클로에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저 중에 마음에 드는 남자 없었어?”
내 말에 클로에가 푸후, 하는 기묘한 소리를 냈다.
“없으면 없다고 대답을 해. 짐승도 아니고 울음소리를 내고 있어.”
“알아들으셨으면 된 거죠.”
말을 마친 클로에가 레이피어를 들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나도 거기에 맞춰 자세를 바로잡았다.
“오는 길에도 계속 말씀드렸지만, 지금은 이기는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에요. 아시죠?”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길 생각으로 치고받지 않을 거면 뭐하러 칼 들고 있어.”
내 말에 클로에가 혀를 한 번 찼다.
“하여튼 고집은.”
“그렇다고 말하는 걸 흘려듣지는 않잖아.”
“그럼 검을 쥔 손에 힘 좀 빼시는 게 어때요?”
나는 그 말에 곧장 손에 힘을 풀었다.
“시작하지.”
그 말을 끝으로 나와 클로에가 둔중한 소리와 함께 발을 크게 구른 다음, 서로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