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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53화 (53/275)

053화

행사가 끝난 다음 따로 불려간 나는 알버트가 미리 귀띔해 주었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나름대로 여덟 명 정도를 가려놓았으니. 이후 선택은 자네에게 맡기지. 한 명씩 들여보낼 테니 확인해보게.”

나에게 추가로 주어진 보상은 시종이었다. 물론, 여기에서 끝나는 건 아니다. 신년 행사에 초청받았으니, 거기에서 국왕과 이야기를 하면서 또 다른 추가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받게 되는 보상은 일종의 덤 같은 느낌이다.

더 이상 쿠르스트 산맥에서 군역을 수행하는 몸이 아니니 나는 자연스럽게 다시금 레드우드 백작가의 장남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름대로의 품위 유지를 위한 필요최소의 인원이 있어야 하고, 그렇기에 따로 시종을 뽑을 권리를 준 것이다.

기다리고 있으려니 사람이 한 명씩 들어와서 나에게 인사를 했다. 나는 그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곱 번째로 들어온 여자를 본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클로에 레인필드입니다.”

따로 관리라도 하는 것처럼 윤기가 흐르는 곤색에 가까운 흑발과 긴 속눈썹이 인상적이다.

이 여자가 미인이라는 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거다. 원래도 미인인데 거기에 한술 더 떠 치마는 허벅지의 절반 정도만 간신히 가릴 정도로 짧고, 상의도 꽉 끼는 얇은 셔츠를 입고 있다. 심지어 단추도 두어 개 풀어놓았다.

대충 옷 태를 보니 안에는 속옷 말고 다른 걸 받쳐입지는 않은 모양이고.

저런 복장은 그냥 대놓고 몸매 자랑을 하겠다는 거잖아. 물론, 자랑할 만한 몸매라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일곱 명 중에서 여자는 지금 이 여자를 포함해 세 명이었다. 다음 사람을 봐야 확신할 수 있겠지만, 내가 봤을 때는 알버트가 말한 연락책이 아무래도 이 여자인 것 같다.

그녀를 살펴본 다음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감상은 하나였다.

“그것참, 신기하네.”

“네?”

내 중얼거림을 들은 클로에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별거 아니야. 일단, 돌아가도록.”

나는 말을 마치고 나서 클로에를 향해 손을 몇 번 저었다.

“알겠습니다.”

클로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배꼽 인사를 하고는 문을 향해 걸었다. 뒤로 돌아 걸어가는 뒤태는, 마치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골반이 크게 좌우로 움직인다.

노리기라도 한 것 같은 게 아니라 노린 거겠지. 문이 닫히고, 나는 픽 웃었다.

“알버트 블루베인.”

이 양반, 나를 첩보부에 들이는 걸 포기한 게 아닌 모양이다.

“미인의 유혹이라.”

협박의 미덕이 대상이 하기 싫은 일을 강제로 시키는 데 있다면, 미인계의 미덕은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있다.

세상에 미남미녀를 아무렇지도 않게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게다가 일단 몸이 17살이니까.”

이 나이의 성욕은 물을 부어도 꺼지지 않는 불꽃에 비견할 만하다. 속에 든 건 중년이라도 육체는 젊기에, 내가 원하지 않아도 신체는 저절로 반응한다.

정신이 육체를 온전히 통제할 수는 없는 법이지. 그런 점에서는 알버트는 꽤 성공 가능성이 높은 수작을 부렸다.

후보를 다 확인한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바로 클로에 레인필드를 시종으로 골랐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할게요!”

클로에 레인필드는 감동한 표정을 짓고 눈을 빛내며 나를 향해 연신 인사를 한다. 태도만 보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군다.

나는 클로에를 대동한 채 국경 사령부에서 제공해준 숙소로 향했다. 신년 행사 전까지는 여기에서 머무르게 될 예정이다.

숙소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클로에를 향해 말을 걸었다.

“질문이 두 개 있는데.”

내 말에 클로에가 네! 하고 대답한 다음에 정자세를 취하고 나를 바라봤다.

“내가 제대로 뽑은 거 맞나?”

내 말에 클로에가 활짝 웃으며 대답한다.

“후회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뜻인지 몰라서 지금처럼 대꾸한 거라면 결정을 번복해야 할 것 같은데.”

내 말에 클로에가 슬쩍 주변을 살피는 시늉을 한 다음, 내 쪽을 향해 윙크를 날리고는 자기 얼굴을 가렸다가 내리는 시늉을 했다. 좋아, 맞게 뽑았군.

“다른 질문은 뭔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다.

“검을 배운 것 같은데.”

내 말에 클로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죄송하지만, 저는 단순한 연락책 역할을 하기 때문에 따로 무예를 익히지는 않았어요.”

“아니, 너는 검술을 익혔어. 그리고 방금 내가 한 말은 질문이 아니야.”

단언할 수 있다. 근육이 발달한 정도와 부위를 생각해보면, 검술에 나름대로 조예가 깊다고 생각된다.

“손에 왜 굳은살이 없지?”

내 질문은 이거다.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클로에의 손은 굳은살이 없는 정도가 아니다. 한눈에 봐도 체에 거른 밀가루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손이다.

힘든 일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손을 하고 있는데, 몸은 분명히 검을 배운 사람이라는 티가 난다. 그래서 내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럽다. 여태 동안 알고 있던 상식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으니까.

“저는 정말로…….”

나는 그 말에 곧바로 검을 뽑아 들고 있는 힘껏 클로에의 목줄기를 노리고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다. 아마, 이걸 피하지 못했으면 클로에는 여기에서 죽었을 것이다.

클로에는 죽지 않았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허리를 뒤로 젖혔고, 칼날은 허공을 갈랐다.

“정말로 뭐.”

내 말에 클로에가 멍하니 내 손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소 얼탱이가 나간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바……방금 저를 죽이려고 했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휘두른 공격이었는데 피했을 뿐 아니라 의도까지 눈치챘네.”

그런데도 검술을 모른다고 할 생각은 아니겠지. 클로에의 눈에 힘이 팍 들어간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면서 검을 칼집에 다시 밀어 넣었다.

다소 차분해진 클로에의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힌다.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어요.”

“아 맞아. 대답해줘야지.”

그녀를 슥 훑어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죽일 생각으로 휘둘렀지.”

내 말에 클로에는 다소 서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도 알 것이다. 죽일 것처럼 칼을 휘두르는 것과, 진짜 죽이려고 칼을 휘두르는 건 다르다.

방금 클로에가 피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목은 탁 하고 잘려나가 바닥을 굴렀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에가 나를 공격하지 않고 있는 건, 알버트에게 지시받은 일 중에 나를 죽이는 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직업윤리가 훌륭하군.

“야시시한 옷 입고 남자 꼬시는 일을 하기에는 좀 아깝지 않아?”

그래도 내가 컨디션이 괜찮으면 하이랜더와 3대 1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인데. 전력을 다한 공격을 피했다는 건 이 여자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거다. 그런데 그 실력을 고작 미인계에 쓴다고?

“…….”

클로에의 몸이 순간적으로 부르르 떨렸다. 저런, 어지간히 아픈 곳을 찔린 모양이다. 혹시나 싶어서 자존심을 한번 긁어봤는데, 아무래도 흠집이 난 모양이다.

“임무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까…….”

“호위, 연락책에 더불어 유혹이라. 한 사람에게 세 가지 일을 시키다니. 악덕 상사잖아.”

거기에 더해서, 나는 이 여자를 시종으로 부려먹을 예정이다. 즉, 이 여자는 사실상 네 가지 일을 혼자서 담당하게 되는 거다.

어떻게 보면, 이 여자가 그만큼 유능하다는 소리도 될 수 있겠지. 유능한지 어떤지는 이후 행보를 살펴봐야겠지만.

“원래는 무슨 검을 주로 쓰나?”

내 말에 클로에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레이피어를 주로 사용해요.”

레이피어라, 그런 가냘픈 이쑤시개 가지고 롱소드나 아밍 소드 같은 거랑 부딪치면 그대로 검이 박살날 텐데.

나는 문을 열고 지나가는 병사를 불러 레이피어를 한 자루 구해달라고 말했다. 잠시 뒤, 병사가 내가 주문한 검을 챙겨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자.”

문을 닫은 나는 레이피어를 클로에 쪽으로 던져주었다. 검을 받아 든 클로에가 나를 바라봤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을까요?”

나는 그 말에 주변을 훑어봤다.

“마음 같아서는 한번 붙어보고 싶은데.”

사령부에서 신경을 써준 모양인지 나에게 배정된 숙소는 굉장히 큰 편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기에서 칼부림을 하면 병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올 거다.

“한번 실력 좀 구경해보자고. 호위까지 담당할 생각으로 파견되었잖아?”

뭐,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 없나? 내 말에 클로에가 건네받은 레이피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실력 말이죠?”

그렇게 중얼거린 클로에가 주머니를 뒤적거려 동전 몇 개를 꺼내더니 허공으로 던졌다. 곧바로 이어진 쉬쉬쉭, 하는 소리. 던져진 동전이 바닥에 부딪혀 짤그랑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허공에 던져졌던 동전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레이피어에 닭꼬치처럼 꿰어져 있다.

“이야, 곡예단에 들어가는 건 어때?”

수입이 짭짤할 것 같은데. 내 말에 클로에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은 채 한마디 했다.

“……부족한 실력이에요.”

클로에는 잠깐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작은 목소리로 그런 대답을 돌려주었다.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돌아가. 내일 아침 9시까지 올 수 있도록 해.”

말을 마친 나는 클로에를 향해 휙휙 손짓을 몇 번 했다.

“……알았습니다.”

말을 마친 클로에는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를 한 다음, 레이피어를 문 옆에 기대둔 다음 나갔다.

“정신상태는 나쁘지 않은데.”

닫힌 문을 바라보던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클로에를 죽이려고 했다. 격렬한 반응이 나오고도 남을 만한 상황이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죽을 수도 있는 위기에서도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를 잊지 않은 것이다.

“안 그래도, 일을 시킬 만한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이 몸을 두 개로 쪼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첩보국에서 나를 꾀어내려고 클로에를 보냈지만, 반대로 내가 클로에를 첩보국에서 빼낸 다음 내 아래에 두는 건 어떨까.

“분명히 불만은 있어 보였으니까.”

이런 인재를 고작 미인계에 쓴다고 할 때 클로에가 보였던 반응은 진짜였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 지나가고 나서도 이성을 붙들고, 목적을 잊지 않을 정도로 감정 통제를 잘하던 사람이 그 대사에 반응했다고 하는 건, 그만큼 지금 맡은 임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지.

이번 한 번 맡은 걸로 나올 만한 반응이 아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전까지도 계속 이런 종류의 일에 투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외모 말고, 다른 걸로 인정받고 싶은 사람이라.”

파고들어 빼내면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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