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25화 (25/275)

025화

내 말에 병사가 딱딱한 자세를 유지한 채 즉시 대답했다.

“현재 집무실에 계십니다. 하지만, 지금은 부대 외 사람을 만나기가 조금…….”

그거참, 수색대 병사들이랑은 확실히 다르네. 애가 훨씬 더 경직되어있는 느낌이다.

“중요한 일인데.”

내 말을 듣자마자 병사의 눈이 이리저리 굴러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녀석의 입에서 집무실의 위치가 나왔다.

“고맙다, 고생해라.”

대답을 들은 나는 집무실의 위치를 물어보고 말해준 장소로 향했다.

“이게 무슨…….”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내가 마주한 환경은 참 마음을 복잡하게 한다.

땅콩 따위가 담긴 그릇과 함께 술이 네 병 놓여있는데, 그중에 세 병은 텅 비어있고 남은 한 병도 절반 이상 비어있다. 소파에 엉덩이를 파묻은 웬 중년 한 친구가 벌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세상에 저거 봐, 옆에 여자도 앉아있네. 딱 봐도 여군으로 보이는 복장은 아닌데.

“아, 그래. 그 뭐야. 응.”

뭐라는 거야 새끼야. 알아듣게 말해야 할 거 아니야. 나는 얼굴을 구긴 채 녀석을 보고 있었다.

“마을 가서 술 한 병 더 가져와.”

나는 그 말에 허허, 하고 웃음을 흘렸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술을 하도 퍼먹어서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황인 모양인데.

참, 기가 막힌 광경이다.

“말귀가 먹었냐?”

나는 그 말을 무시한 채 녀석과 사무실을 잠깐 훑어봤다.

집무실 벽에 걸려있는 임명장을 보면 부임한 지는 3년 되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어떻게 대응해야 하지.

“저는 당신의 부대에 소속된 사람이 아닙니다.”

내 말에 녀석이 슥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이내 비틀거리다가 내 쪽으로 빈 술병을 집어 던진다.

“젊은 놈의 새끼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날아오는 술병을 피하자 병이 박살 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녀석은 내 쪽으로 비틀거리며 다가와 멱살을 잡으려 든다.

살짝 뒤로 물러나자 멱살을 잡으려던 우리의 자랑스러운 수비대장께서는 그 임무를 달성하지 못하고 다시금 비틀거린다.

“피해? 이 새끼야, 피해?!”

피한 게 화가 나는 모양이다. 이 친구가 내 눈앞에서 게걸거리는 사이 나는 머릿속이 점차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일종의 서열 정리에 대한 의문이었다.

수색대는 어느 정도의 권한을 가지고 있을까?

내 눈앞에 있는 이 주정뱅이 친구는 국경수비대에서 도리안보다 높은 서열일까?

여기에서 내가 이 친구가 정신 차릴 때까지 싸대기를 후려치기 시작한다면 과연 이후의 사태를 도리안이 무마시켜 줄 수 있을까?

“대장, 방금 무슨……?!”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이 친구는 제정신으로 보인다. 입고 있는 복장도 아까의 병사와는 다르게 꽤나 근사해 보인다. 나름대로 간부인 모양인데.

“……관문을 지키던 병사에게 보고를 받았습니다, 마틴 레드우드. 저는 수비대에 소속된 로버트 다운힐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 새끼, 내쫓아! 군법으로 다스려라!”

그나마 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녀석이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저기에서 또 취한 짐승이 꽥꽥거린다.

“대장…….”

놀라서 들어왔던 간부가 어쩔 줄 몰라 하다, 수비대장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이자 얼굴이 벌건 대장께서는 응? 하는 소리를 내고 게게 풀린 눈으로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외쳤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수색대가 뭐!”

녀석이 다시 노발대발하기 시작하자 간부가 잠깐 그 꼴을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 나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다른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나왔다.

“죄송합니다. 대장이 원래 저런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겠지.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된다.

“도망친 아내와의 기념일이 오늘인 모양이죠?”

내 말에 간부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깐 멈칫했다.

“제7수색대에는 그런 소식까지 파악해 둡니까?”

그럴 리가 있나. 냉정하게 말해서, 남의 집 와이프가 죽은 게 수색대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훑어보는 사이 알게 된 거다.

유리가 깨진 채 쓰러져 있는, 남녀의 초상화가 담긴 액자와 거기에 써진 날짜. 몇 번이고 벗어서 바닥에 집어 던졌다 다시 끼운 결혼반지 같은 걸 보면 대충 짐작해서 때려 맞출 수 있지.

네가 방앗간에서 일하는 아가씨와 애인이라는 것도 맞추면 어떤 반응일지 궁금하네.

“왕궁에서 오는 손님들 대접할 준비는 어떻습니까. 대장님의 상태를 보니 약간 불안해지는데요.”

저 꼴로 일을 제대로 하면 그게 사람이냐. 내 말에 로버트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귀빈들이 식사나 숙소도 미리 마련을 해두었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주변을 지킬 병력도 선발을 마쳤습니다. 제 집무실에서 서류를 확인하시죠.”

로버트의 사무실에 도착하자 곧바로 그가 서류를 내밀었다.

“그렇네요, 다행히도 문제없어 보입니다. 이대로 진행하면 될 것 같네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사본은 바로 보내드리지요. 왕궁 손님들이 오시기 전까지는 따로 마련된 숙소에서 머무르시면 됩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뭘 그걸 또 따로 복사본까지 만들어. 한 번 봤으면 충분하지. 종이 아깝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로버트가 안내해 준 방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괜찮았다. 그리고 태도도, 어차피 같은 국경 수비대에 소속된 입장이고, 아마 크게 지위의 차이도 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내 눈치를 많이 보는 느낌이다. 귀한 사람이라서라기보다는, 두려워한다는 느낌이다.

관문에서 신분 검사를 한 병사도 비슷한 느낌이었지.

“머무르시다 불편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녀석과의 대화를 마친 나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이후 밖으로 나와 수비대의 주둔지를 슥 훑어본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뭐, 별로 위험하지 않다 그거지.”

로버트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기사의 검 손잡이는 새것처럼 매끈했다. 뽑을 일이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몸을 보니 훈련은 꾸준히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아마, 연습용으로 따로 마련된 날을 죽인 검을 사용하는 모양이다. 하긴 뭐, 정규 도로를 통해 왔다면 제7수비대의 막사에서 여기까지는 세 개의 관문을 지나야 한다.

쿠르스트 산맥의 위협이 여기까지 다가왔다는 건 사실상 상황이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니까.

부대를 나온 나는 락밸리에 있는 술집으로 향했다. 좀 먹은 널빤지에 시커먼 타르로 '살롱'이라고 적혀있을 뿐인 술집이다.

“뭐 드릴깝쇼.”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장이 나를 슥 훑어본다.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던 나는 한 녀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이 먹고 있는 걸로.”

내 말에 주인장이 슬쩍 그 사람의 잔을 확인하고, 나무를 깎아 만든 잔에 술을 넣어 내 앞에 두었다.

한 모금 마신 것만으로도 몸이 뜨거워진다. 더럽게 독하네. 뭐로 만든 거야 이거.

이걸 마시는 자식을 무조건 취하게 만들겠다는 일념 하나로 빚어낸 물건이 확실하다.

술잔을 손에 들고 얼굴을 약간 구기고 있으려니 밖에서 짐마차 지나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리고, 앉아있던 녀석 중 하나가 허, 하는 소리를 냈다.

“또? 락밸리에 이렇게 마차가 많이 들락거리는 건 또 처음 보는군.”

맞은 편에 앉아있던 녀석이 그 말을 듣고 대답했다.

“한스가 말하길, 왕궁에서 높으신 분들이 오신다더군. 새끼, 존나 고생하는 모양이던데. 그 뭐냐, 수색대에서도 사람을 내려보냈다고 들었어.”

“그, 하이랜더랑 치고받는다는 인간 병기들이? 쉬러 오는 게 아니라 일 때문에 내려온 경우는 드물잖아.”

“심지어 간부라더군.”

그 이야기를 들은 녀석의 입이 쩍 벌어졌다.

“혼자서 하이랜더도 순식간에 작살 낸다는?”

하이랜더 순식간에 작살 못 내 이 자식들아.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하여튼, 그 무시무시한 녀석들이 간부까지 보낼 정도면 뭐가 대단한 사람들이 오기는 하는 모양이야.”

술 먹다가 갑자기 인간 병기가 되어버리니 기분이 참 이상하네.

그리고, 자연스럽게 로버트가 내 앞에서 말과 행동을 조심했던 이유도 대충은 알 것 같다. 저런 소문이 돌고 있다면 확실히 막 대하기 좀 그렇겠지.

“여기 계산 좀.”

내 말에 주인장이 대답했다.

“국경 수비대 소속이니, 동전 다섯 개이외다.”

싸네. 할인이라도 해주는 건가. 나는 동전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비대 주둔지에 마련된 숙소로 돌아가 보니, 문 앞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었다. 저건 수비대장이잖아.

“……마틴 레드우드.”

그는 나를 보고 잠깐 움찔한 다음 시선을 피한다.

“수비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내 말에 그가 잠깐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오후 중에 내가 실수를 했다더군. 아무래도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그것 때문에 수비대장씩이나 되는 녀석이 문 앞에서 대기를 타고 있다고? 내가 물끄러미 그 친구를 바라보고 있자 녀석이 잠깐 내 눈을 바라본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식사는 했나?”

“아직 안 했습니다.”

“그래? 그럼 같이하지.”

밥이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수비대장이 나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련된 식탁 위에는 근사하게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닭고기에, 생선에, 야채에…….

수색대의 식사와 비교하기가 미안할 지경이군. 술 먹고 주정 부렸던 게 굉장히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많이 들게.”

그리고 식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비대장이 말을 건넨다.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야.”

“로버트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많이 힘드시겠지만, 과음으로 잊으려 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수비대장이시지 않습니까? 지휘관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병력 관리에도 차질이 있을 것 같습니다.”

대충 이 동네에서 우리가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는 이 수비대장과 로버트의 태도, 그리고 술집에서 엿들은 대화로 대충 이해했다.

쿠르스트 산맥의 수색대는 자신이 키우던 비글이 죽었다고 77명의 목숨을 작살 낸 전설적인 킬러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다.

아니면 뒤통수에 바코드 박아넣고 다니는 대머리 암살자.

“그래, 자제해야지. 어쨌든, 수색대에서의 생활이 편하지는 않았을 텐데. 머무는 동안에는 최대한 배려를 해주겠어.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하게, 형편이 되는 데까지 최대한 마련을 해보겠네.”

“감사합니다. 수색대에서 쉬러 내려오는 다른 병사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대접을 하시는 겁니까?”

내 말에 그가 음, 하는 소리를 냈다.

“머무는 데 최대한 편의를 봐주고는 있지.”

그래, 나와 함께 위키백과 만들던 병사 자식이 왜 내려오면 천국이라고 했는지 이해가 된다.

내 지위가 이 정도였다면 아까 저 친구가 술 취해서 게걸거릴 때 뺨 정도는 올려붙일 수 있었겠구나. 아쉬워라. 이래서 아는 게 힘이라니까.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인사를 했다.

“식사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오늘 밤은 마무리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