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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4화 (4/275)

004화

급작스럽게 식탁의 분위기가 조용해진다.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이다. 이제 밥 좀 먹을 수 있겠네. 다시 식사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백작이 입을 열었다.

“눈이 좋구나.”

나는 그 말에 물을 한 모금 마신 다음 대답했다.

“아버님, 제가 말하고 난 다음에도 데이먼 형의 옷에서 잉크와 촛농 방울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내 말에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물컵을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방금 전에도 못 보신 게 아닙니다. 제가 눈이 좋은 것도 아니지요. 저도, 아버님도,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이 다 보고 있었을 겁니다.”

단지 눈으로 봐도 그걸 분석할 생각이 없었던 거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오감을 통해 수용된 정보는 그대로 사라진다. 일에 집중하면 듣고 있던 음악이 안 들리는 현상과 비슷하다.

“네가 그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나는 쾌활하게 웃었다. 그냥 이 껍데기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 바뀐 것뿐이다. 술 먹고 사람 패는 어린 미친놈에서, 이런 짓거리 해서 십 년 넘도록 밥벌이했던 유능한 흥신소 주인장으로.

“글쎄요, 호수에 빠져서 마신 물이 효험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내 말에 레온 백작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뭔가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백작에게 굳이 말을 붙이려 들지는 않았고, 식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방으로 돌아간 나는 곧장 창문을 열어젖혔다. 확 하고 몰려오는 겨울의 찬바람이 몸을 후려친다.

“날씨 한번 기가 막히네.”

덜덜 떨면서 담배 한 대 빨기 좋은 분위기다. 하늘에 낀 먹구름을 보니, 눈이 오려나. 잠깐 바람을 맞고 있던 나는 다시 창문을 닫고 신호줄을 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젤라가 문을 열고 들어와 인사했다. 또 이 여자가 오네, 뭐 붙박이 하녀 같은 건가. 어제도 오고 오늘도 왔으니, 붙박이라고 한다면 내가 모질게 대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좀 친절하게 대해주는 편이 좋겠지. 혹시 뭐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르니.

“신발을 아직 바꾸지 않았군.”

내 말에 안젤라가 순간적으로 흠칫한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다. 이제 아침이니. 시간이 없었겠지.”

어차피 바꿔 신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크게 할 일도 없으니 성안이나 돌아볼 생각이다. 겸사겸사 네 신발도 바꿔줄 테니. 앞장서서 안내해.”

“괘, 괜찮습니다.”

나는 그 말에 작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시겠지.”

나를 무서워하는 이유를 명확하게는 모르지만, 대충은 짐작한다. 어차피 무섭고 두려운 사람이라면 굳이 좋은 말로 설득할 필요는 없다.

“잔말 말고 시킨 일이나 해.”

내 말에 안젤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안젤라의 안내를 받아 성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신발 말씀이십니까.”

안젤라가 안내한 곳에 있던 남자는 나를 보자마자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잠시 뒤, 안젤라는 신을 갈아신었다.

“베른에게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신발을 갈아신은 안젤라는 나를 성안에 머무르고 있는 베른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안에는 다친 사람 몇 명이 누워있었다.

가문 주치의라고 하더니, 꼭 귀족들의 병만을 치료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잘되었군.

“도련님, 혹시 몸이 여전히 불편하십니까?”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고, 이 하녀의 무릎이 좀 불편해 보이던데. 혹시 봐줄 수 있나 해서 지나가는 길에 들른 겁니다.”

내 말에 베른이 잠깐 하녀의 무릎을 살펴본 다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이리 와보게.”

안젤라가 잠깐 내 눈치를 보다가 베른의 앞에 섰다.

“어머니를 뵙고 싶은데. 지금 시간이면 어디에 계실지 혹시 아십니까?”

베른이 안젤라의 무릎을 살펴보며 말했다.

“지금이라면 3층에 마련된 거소에 머무르고 계실 겁니다.”

그렇군. 잘 되었네. 어차피 성 안내라고 한다면 하녀인 안젤라보다는 백작 부인 로델린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쪽에게 안내를 받아볼까.

“염증으로 보이던데. 치료할 방법은 있나?”

내 말에 베른이 약간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버드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약물이 염증을 치료하고 통증을 덜어내는 효과가 있습니다.”

아스피린 말하는 건가. 의외로 중세처럼 생겨서는 치료는 제대로 할 줄 알잖아. 뭐 대가리에 구멍 뚫고 피 뽑아내겠다고 하면 대번에 싸대기를 치려고 했는데.

“알았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살짝 머리를 움직여 인사를 하고 로델린의 거소로 향했다. 문 앞에 선 나는 노크를 했다.

“누구지?”

다소 건조한 목소리가 들린다.

“어머니, 마틴입니다.”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돌아오는 로델린의 대답이 갑자기 확 부드러워진다.

“아, 들어오렴.”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인사를 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천과 바늘, 그리고 실. 자수를 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앉아라, 무슨 일이니?”

로델린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자리에 앉아 입을 열었다.

“성안의 구조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혹시,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내 말에 로델린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아랫사람들에게 안내를 받기는 난처한 상황이니.”

들킨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내 기억상실은 일단 아는 사람이 최대한 적을수록 좋다. 그러니 도움은 가능하면 이미 내가 기억상실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에게 받아야 한다.

“잘 생각했다. 어디, 잠깐 함께 산책이나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구나.”

말을 마친 로델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방해한 건 아닐까 모르겠어요.”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젓고는 웃었다.

“아들이 어미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방해라니. 당치도 않는 말을 하는구나.”

아들이라. 그렇지, 어쨌든 안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이건 나는 로델린의 아들이 되었다. 물론, 내가 이 사람을 어머니라고 생각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조건 없는 도움이라고 하는 것에 어색하지 않은 나는 약간 가슴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는 로델린의 안내를 받아서 성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서재가 엄청나게 크네요.”

서재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규모가 아닌데. 이 정도면 수천 권은 있을 것 같다.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드우드 가문이 꾸준히 모은 장서란다. 귀족들 중에서도 이렇게까지 서책을 모아놓은 곳은 많지 않아. 가신들 중에는 이 장서를 읽고 싶어서 가문에 봉사하는 사람들도 있지.”

저 말을 들어보니, 책이 그렇게 흔한 물건은 아닌 모양이다. 자주 들르게 될 것 같다.

“혹시, 따로 거둬들인 물자를 보관하는 곳간도 볼 수 있을까요?”

내 말에 로델린이 내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웃었다.

“따라오렴.”

로델린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간에는 물자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수확철이 지난 겨울이라 그런 걸까. 그 이외에도 성안에는 이런저런 장소들이 많았고, 로델린은 한 곳도 빼놓지 않고 나와 함께 다니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와중에, 성에 마련된 영주의 권좌 뒤편의 진열함이 눈에 띄었다.

“저 진열함에는, 아무것도 없네요.”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가지라는 목검이 놓여있던 진열함이란다. 레드우드 가문의 가보였지.”

목검이 가보라고? 나는 그 말에 다소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로델린을 바라봤다.

“처음에 결혼을 하고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지었던 표정과 같구나.”

그렇겠지, 가문의 상징이 목검이라니, 이상하잖아.

“레드우드 가문의 시조는 수천 년을 살아온 드라이어드와 결혼해 이 가문을 이루었다는 전설이 있단다. 남편이 죽은 다음, 드라이어드가 후손의 번영과 안녕을 바라며 남긴 유산이 바로 붉은 가지라는 목검이었지.”

이 진열함만 남은 게 벌써 수백 년 전 이야기라고 한다. 그러니, 원래 가문의 보물이었다고 하는 그 목검의 위치는커녕 간직하고 있던 힘이 뭔지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냥, 그런 게 있었다는 것 정도만 전해질 뿐이다.

“그렇다면 레드우드 가문은 무가였던 모양이군요.”

목검도 무기니까. 가보가 무기라면 아무래도 그쪽 방면에 치중해 성장하지 않았을까.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젓고는 영주의 권좌 양옆에 걸려있는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가리켰다. 하얀 바탕에 검은 실로 수를 놓은 나무에는, 붉은 과실이 한가득 달려 있는 형상이다.

“레드우드 가문의 피를 받은 사람은 어디까지나 한 그루의 나무란다. 자라나는 나무가 검을 사랑하는지, 펜을 사랑하는지, 또는 마법을 사랑하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무엇을 선택하든 결실을 맺는 거지.”

자라서 열매를 맺는 과실수. 레드우드 가문의 상징이다. 로델린이 내 등을 쓰다듬었다.

“기억을 잃어서 많이 불안할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부족한 점이 많아 너에게 뭘 해줘야 할지 잘 모른다는 점이 가슴 아프구나. 하지만, 언젠가 충분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너 또한 선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과실을 맺을 수 있는 나무가 되었으면 하고 언제나 기도했단다.”

말을 마친 로델린이 잠깐 그 문양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성은 다 돌아본 것 같은데. 혹시 더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말해다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후로는 이 성안에 어디든지 길을 찾을 수 있다.

“충분합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다. 자주 찾아오렴.”

다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기는 하다.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가 다소 냉담한 것은, 저 때문인가요?”

내 말에 로델린의 표정이 굳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 나와 그이는 문제가 전혀 없는데.”

아가씨, 목소리가 그렇게 떨리면 너무 티가 난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제인 부인과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계신지요?”

잘은 모르겠지만, 백작 부인이라는 자리는 간단하게 말해서 집의 안주인과 마찬가지다. 아침에 자수나 놓으면서 시간을 보낼 만한 사람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내 말에 로델린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시선을 피했다.

두 사람은 식당에 함께 들어왔다. 같이 밥 먹으러 오는 타이밍을 서로 미리 맞춰놓은 것이 아니라면 둘이 한 침대를 썼을 확률이 높다는 거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 오해라고 생각한다. 차차 알게 될 거야.”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저 말은 로델린의 말에 맞다. 어차피 몇 번 더 아침 식사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까. 아직은 나도 제대로 뭔가를 추리해 내기에는 너무 아는 상식이 적고. 머리에 상식과 정보를 채워 넣고, 계속해서 관찰하다 보면 결국 정답에 도달할 수 있을 거다.

나는 로델린과 헤어진 다음 바로 서재로 향했다.

“여기 있는 책을 다 읽기 전에 늙어 죽겠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서재의 책들 중에 쓸모 있어 보이는 것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아무거나 막 구겨 넣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당분간 심심할 일은 없겠군.”

뭘 해야 할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 읽을거리가 이렇게나 많다는 건 복 받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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