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아이와 어른 사이.
관리자님의 포근한 품에서 깨어나는 아름다운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일어나거라 아이야."
차가운 바닥이 느껴지고,
"아니.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은 거 같기도 하구나."
등에는 무거운 감각이 느껴졌다.
"아…"
"깨어났느냐?"
"몸이 무겁습니다."
"규칙이니 참고하거라."
등에는 서류와 책들이 쌓여 있었다.
"저 관리자님. 외계는 책을 안 쓰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흠. 맞춤형 서비스라는 것이다. 지구의 문명 수준에 맞춘 것이니. 고마워하거라."
헛기침하며 입꼬리가 씰룩이고 있었다. 앞에 쌓여 있는 술병과 접시를 보니 책을 쌓으며 장난치신 것 같았다.
"잘 받겠습니다. 인공이에게 보여주고 정확하게 지키며 살겠습니다."
"그래. 복잡하고 어렵게 쓰여 있지만. 네게 주어진 권리와 책임은 실로 간단하다."
책의 양과는 상반된 말이었다.
"경청하겠습니다."
관리자는 긴말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설명충 걱정은 없었다.
"쉽게 생각하거라. 외계에 대한 권한이 조금 늘어나고, 지구에서 몇 가지 제한이 걸렸을 뿐이니."
"권한이 늘어났다면, 책임도 늘어난 건가요?"
권한과 책임은 언제나 한 묶음이었다.
"아이는 벗어났으나 어른이 되지 못한 이에게 책임이 부여되겠느냐?"
"설마…"
책임이 없는 권한.
그런 권한은 하나뿐이었다.
"사는 겁니까?"
"똑똑하지 않은데 이리 눈치가 빠르니. 설명해주는 맛이 나는구나."
문제는 대가였다.
"업입니까?"
"업으로 구매할 수도 있고, 우리의 부탁을 들어줄 경우 보상이 주어질 수도 있다."
임무와 업이 권한을 확장할 방법이었다.
대충 감이 오기 시작했다.
"이걸 제일 먼저 여쭤봤어야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묻습니다."
관리자는 궁금한 듯 현규를 쳐다봤다.
"관리자님께서 계속 계시는 거지요?"
아부가 아닌 진심이었다.
관리자의 존재는 와일드 카드나 다름없었다.
"일어나자마자 달콤한 말을 하는구나."
"다행입니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머무는 게 확실해 보였다. 관리자님의 기분까지 좋아졌으니. 일거양득이었다.
"지구에서도 권한이 늘어났지만, 그게 네가 원하던 상황일지는 지켜보겠다."
"인공이에게 물어보겠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인공이가 있으니.
이 많은 책과 문서들도 문제없었다.
"그래. 오늘 하루는 푹 쉬거라. 이건 관리자로서 내리는 명이니. 꼭 쉬어야 한다."
무슨 일인지 휴식을 강조했다.
현규에겐 나쁠 게 없었다.
"알겠습니다. 인공이에게 몇 가지만 물어보고, 오늘은 쉬도록 하겠습니다."
"몸에 무리가 많이 갔을 터이니. 이만 가서 쉬어보도록 하거라."
괜찮게 끝난 것 같았다.
"술 한잔 따라드리고, 가보겠습니다."
"따라 보거라. 내 오늘 불쾌한 것들을 만나 술을 더 마셔야겠으니."
검토를 위해 온 사람들. 그들과 싸우며 현재의 결과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탁해지지 말거라."
감사 인사를 끝으로 면담이 끝났다.
***
"너굴너굴!!"
"휴먼 괜찮습니까?"
너굴맨과 인공이의 격한 환영을 받았다.
"왜들 그래?"
인공이는 말없이 문을 가리켰다.
외계가 연결됐던 문은 균열이 가 있었다.
"이거 왜 이래?"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어!?"
"너굴너굴!!"
위험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현규는 양팔을 뻗어 괜찮다고 보여주었다.
"난 완전 쌩쌩한데?"
"정말 다행입니다. 관리자님이 계셔서 안전하셨겠지만, 차원의 경계가 부서질 만한 일이다 보니. 걱정이 앞섰습니다."
"너굴! 너굴!"
"너굴맨 님께서 행성이 폭발했을 때 이런 현상을 본 적 있다고 하십니다."
둘의 모습을 보니 보통 일이 아닌 듯했다.
"특별한 일은 없었는데?"
"기억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기억?"
인공이의 분석은 도움이 될 것이다.
"괜찮을 거 같은데?"
"기억을 확인하겠습니다."
인공이는 현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엑세스 거부. 기억이 잠겼습니다."
"잠겨? 누가?"
"관리위원회에서 잠가놓았습니다."
"관리위원회? 관리자연합. 뭐 이런 거야?"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는데. 정답이었다.
"진짜!?"
"관리자님이 허가할 수 없는 루트입니다. 이건 다른 관리자가 왔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놀랍기보다는 의아했다.
"다른 관리자랑 같이 검토했다는 뜻이야?"
"가지고 나온 자료들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인공이는 대답하지 않고 자료를 요구했다.
"어차피 부탁하려고 했어. 관리자님 말로는 아이와 어른 그 사이에 있는 권한과 책임을 부여한다고 하셨어."
인공이는 빠른 속도로 자료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너굴너굴."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너굴!"
너굴맨은 현규의 몸을 살펴보고, 작은 손으로 만져가며 꼼꼼히 확인했다.
"정말 괜찮지?"
"너굴너굴! 너굴!"
"너굴맨 님께서 온몸의 근육이 곤두서 있는 상태라고 하십니다. 휴식을 권한다고 하십니다."
관리자가 쉬라고 한 이유가 있었다.
"심각해?"
"너굴너굴! 너굴! 너굴?"
"놀랐을 때 긴장하는 근육들이 한계까지 곤두선 상태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괜찮은 게 이상하다고 하십니다."
넥타르를 마시고 여러 기계로 단련한 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통증을 못 느끼는 게 아니었다. 관리자님이 손을 쓰신 것 같았다.
"관리자님도 오늘 하루는 방송하지 말고 쉬라고 하셨어. 명령이라고까지 하셨으니. 걱정 안 해도 돼. 푹 쉴 거야."
"너굴! 너굴너굴!"
"다행이라고 하십니다. 뜨거운 물을 준비할 테니. 욕조에 꼭 몸을 담그라고 하셨습니다."
너굴맨은 그대로 화장실로 들어가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이거 참."
몸은 엉망이고 새로운 상황이 벌어지는 데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해 주는 너굴맨이 있고 기다려 주는 인공지능이 있다.
산속 시골집에 처박힌 이후,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쁩니다. 표정을 정돈하길 요청합니다."
표정을 찌푸린 인공이를 보고 웃음이 터졌다. 뭔가 속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관리자님의 상담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예상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상담 진짜 잘하시네."
감탄은 잠깐이었다.
"자료 정리가 끝났습니다. 독특한 케이스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인공이의 자료 정리가 끝났다.
***
"휴먼이 알고 있는 내용을 말해주면 설명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이와 어른의 중간. 나름의 권한이 있지만, 책임은 없고 대가가 필요한 상태. 지구에서 뭘 할 수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음. 이게 내가 들은 내용이야."
인공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자님은 낭만적으로 표현했지만, 저는 좀 더 직관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좋아! 설명충 빼고, 간단명료하게 핵심만! 알지?"
현규에게 단련된 인공이는 설명의 프로였다.
"청소년이란 표현은 나름대로 적절한 비유입니다."
"그래?"
"원래보다 권한은 늘어났고, 여전히 책임은 관리자님이 감수하고 계십니다."
권한은 약간 늘어났고, 관리자님이 책임자로 남아 있다.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됩니다. 성과를 보여주고 관리자님께 권한을 받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과정은 됐고, 그래서 어떻게?"
중요한 건이 다음이었다.
"RPG게임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게임?"
"퀘스트를 하거나 업을 벌어 권리를 구매하면 됩니다."
현규의 눈높이에 맞춘 설명이었다.
"권한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고?"
"그렇습니다."
"외계 건물 밖으로 나가거나 멜랑이를 지구로 데려오거나. 다른 행성을 여행하는 거. 이런 게 권리에 포함되는 거지?"
"정확하진 않지만 그렇습니다."
자세하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되는지. 전부를 알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아는 것보다 감을 잡는 게 중요했다.
"좋아. 외계 부분은 이해가 됐어. 지구는 뭐가 달라진 거야?"
"딱 두 가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설명이 이래야지! 오케이. 뭐야?"
"첫째. 지구에서 외계의 물건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둘째. 지구인들에게 물건 사용을 들키면 안 됩니다."
이건 좀 애매했다.
"지금이랑 다를 게 없지 않아?"
"다릅니다."
"다르다고?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지금도 자유롭게 사용하고 들키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휴먼이 사용한 종류의 물건들은 모두 지구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물건입니다. 그런 물건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아니! 잠깐만!"
이건 너무 큰 권한이었다.
"휴먼이 예상하는 물건들이 맞습니다. 지구를 뒤집어 놓을 만한 물건들. 그런 물건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제한이 걸린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한의 존재였다.
"외계 물건을 획득하여 지구에서 개발하는 일은 안타깝게도 불가능합니다."
"그게 왜 안타까워! 차라리 잘됐어!"
외계의 물건이 지구에 풀리는 건 독이나 다름없었다. 관리자의 반응이 증거였다.
"잠깐만, 몰래 사용하는 건 된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이 권한과 제한은 절묘하단 생각이 들었다.
재미있는 연출이 가능할 것 같았다.
"다른 건?"
"여기까지입니다. 세부적인 내용은 상황에 따라 조언을 해 드리겠습니다."
나머지는 앞으로 경험해보며 확인하면 될 것 같았다.
"끝이지?"
"그렇습니다."
"그럼, 결산 때려볼까?"
"지금 바로 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너굴맨!! 나와!! 결산하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결산의 시간이었다.
"너굴너굴!!"
***
현규와 너굴맨은 뛰어다니며 소리치고, 인공이는 계속 자료를 모니터에 띄웠다.
축제였다.
"구독자 추이!!"
-빈약하던 외국인 시청자가 빠르게 채워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유입속도를 추월했습니다.
이보다 빠른 성장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래프는 하늘을 뚫고 있었다.
"너굴너굴!"
"그래! 좋다! 후원금은!?"
-세금 제외하고 8, 290만 원입니다.
역대 최고 후원금이었다.
랜덤박스의 팬뿐만 아니라 다른 유튜버들의 팬이 후원하면서 후원금이 크게 늘었다.
"지화자!"
"너-굴!"
현규와 너굴맨의 상태는 점점 심해졌다.
"마지막 선물상자 열어보자!"
"너굴!!"
드디어, 최종 업 차례였다.
"업은 얼마야!?"
"너굴너굴!"
원래라면 상점을 통해 확인해야 했는데.
우리에겐 업 확인기가 있었다.
-1,700만입니다.
"1,700만!? 그림 15개 팔고 1,700만!?"
1,700만이란 수치도 놀라웠는데.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앞으로 들어올 업은 대략 800만 정도 됩니다.
"그림 보내주면 들어 올 업이지!?"
-맞습니다.
심지어 대략적인 수치였다.
더 높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너굴맨!!"
"너굴너굴!!"
-축하합니다. 휴먼. 성공적인 원정이었습니다.
인공이가 칭찬할 정도의 성과였다.
"미쳤다!!"
"너-굴! 너굴!"
10만 포인트로 가성비 최강의 로봇을 만들었다. 2,500만 포인트,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새로운 쇼핑 목록도 있었다.
"권리 쇼핑하자!! 2,500만이야!! 너굴맨 새 로봇 사 줘!?"
"너굴너굴!!"
벅찬 성과는 긴장을 풀게 했고, 간신히 유지되던 몸의 균형을 깨트렸다.
- 쿵!
현규의 몸이 넘어갔다.
"이거 왜 이래!!"
"너굴!!?"
문제는 의식은 선명했다. 절망, 혼란, 당혹,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이제 시작인데!!"
"너굴너굴!"
-오바입니다. 휴먼. 놀란 근육들 때문입니다. 하루 쉬면 회복될 겁니다. 넥타르를 마신 육체입니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놀랬잖아!!"
-저한테 화를 내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 쫌!!!"
"너굴너굴!!"
어느새 휴머노이드를 탑승한 너굴맨이 현규를 번쩍 들어 옮기기 시작했다.
"너굴맨!! 어디가!!"
"너굴너굴!!"
-근육은 뜨거운 물에서 풀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놀라고 감동받고 감탄하고 당황하고, 정말 다이나믹한 하루였다.
문뜩,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짜! 개판이다!"
"너굴너굴!"
- 동감입니다. 휴먼.
드디어 휴식이었다.
***
"아니, 이건 이야기가 다르잖아!! 우리 쇼핑한다며!! 쇼핑은 즐거운 거잖아!!"
- 전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자고 일어나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쇼핑'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쇼핑이었는데.
-판매자는 제가 정한 게 아닙니다.
"아 주여!! 제게 왜 이런 시련을!!"
문제는 권한을 판매하는 사람이었다.
"판매자가 관리자님이시라고?"
-그렇습니다.
판매자는 관리자님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는데 업에 눈이 멀어 떠올리지 못 했다.
싫은 건 아니었지만 구매자 입장에서 편한 상대는 아니었다.
"어차피 권한 쇼핑해야 하지? 미루지 말고 제일 처음 가자!! 할 수 있다!!"
- 현명한 판단입니다.
마음을 다잡고 외계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살벌한 쇼핑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