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1)
“싫어.”
- 듣지도 않고 거절하지라?!
황금자라는 라지에르의 칼 같은 단호함에 충격 받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지에르는 심드렁하게 다시금 입을 열었다.
“도와주면 뭐 해줄 건데.”
- 해줄 수 있는 건 딱히 없지라.
“그럼 수고.”
- 히익. 너무 현실적인 인간이지라…….
자라는 암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자라와 대화하기 시작한 주군을 어찌할 바 모르고 바라보던 휘온이 손짓을 받고 다가섰다.
“이거 원래 자리로 가져다놔.”
- !
붓으로 점찍은 듯 작은 눈이 한껏 커졌다. 자라는 다급히 애원하기 시작했다.
- 안 되지라! 안 되지라! 제발 도와달라지라!
“싫다고.”
- 한번만 부탁하지라! 다른 인간들은 내 목소리를 잘 못 듣지라. 들어도 놀라서 도망가 버리지라. 들려도 들어줄 생각이 없지라.
“나도 들어줄 생각이 없어. 그럼 이만.”
차갑게 응수한 라지에르가 돌아섰다. 그러자 황금자라는 엉금엉금 기어 그의 바지자락을 콱 물었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라지에르가 인상을 팍 구겼다.
- 제발.
“이거 안 놔?”
- 마지막이지라. 카나스의 황제에게 반드시 전해야 할 말이 있지라.
황제라는 말에 라지에르의 파란 눈동자가 다시 자라에게로 향했다.
오래 살아 덩치가 커다래진 황금자라는 온몸에 힘이 거의 없었다. 덩치를 유지할 체력도 없어 보였다. 그 와중에도 입에 문 옷자락만큼은 필사적으로 놓지 않고 있었다.
늙은 자라는 꺼져가는 불꽃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 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지라…….
마지막 숨이 다하기 전, 카나스의 어린 주인에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노라고.
술에 취해 까무룩 정신줄을 놓았던 세드나는 유쾌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야, 진짜로 감탄했어. 감히 황제더러 오라 가라 시키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시킨다고 진짜로 온 쪽이 더 대단한 거 아니냐?”
“그건 그렇지. 아하하핫!”
라지에르의 방에 손님이 와있었다.
환한 백금발에 녹안을 가진 카나스 제국 소년황제, 율리우스였다.
‘뭐지? 내가 언제 방에 들어왔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멍하니 흐릿한 머릿속을 더듬던 세드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
‘뭔가 생각나는 것 같기도 한데, 전부 다 꿈인가……. 근데 쟨 누구야?’
세드나는 길거리에서 만났던 율리우스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때 만났던 허름한 차림새의 소년과 지금 때 빼고 광낸 모습의 황제는 딴판으로 달라져 있었다. 어차피 세드나에게 있어서 라지에르 외 인간은 기억할 의미가 없기도 했다.
카나스의 황제는 호탕하다 못해 경박하기까지 한 자세로 바닥에 털썩 앉아있었다. 그리고 무려 황제를 방바닥에 앉힌 라지에르가 그 맞은편에 자리했다. 둘 사이에 징검다리처럼 놓인 황금색 덩어리도 발견할 수 있었다.
- 어! 저거 꿈에서 내가 사냥해온 달인데!
“…세드나.”
- 이상하네. 꿈이 아니었나?
황금색 보름달로 추정되는 물체 앞에 쪼그려 앉은 세드나가 연신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본 율리우스가 큭큭거렸고, 라지에르는 창피함을 이기지 못하고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꿈 아니야.”
- 정말?!
“응.”
- 우와, 나한테 달을 사냥하는 능력이 있었다니!
상황이 이쯤 되자 율리우스 황제는 아예 바닥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박장대소를 해댔다.
“세드나.”
라지에르가 곁으로 총총 다가온 세드나의 목걸이를 훅 잡아당겨 무릎에 앉혔다.
딸랑.
갑자기 끌어당겨진 탓에 방울이 요란하게 울었다.
분홍빛 여우가 놀란 눈을 깜빡거리자 그는 슥 손가락을 들어 바닥에서 번쩍거리는 달을 가리켰다.
“제대로 봐. 넌 아직도 저게 달로 보이냐?”
- 어……. 아니야?
“아니야.”
당연히 달이겠거니 생각했던 세드나가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렸다.
동그랗고, 빛이 나고, 하늘에 떠있는 보름달처럼 예뻤다. 분홍여우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되물었다.
- 달이 아니라고?
- 자라지라.
이번에 대답한 건 라지에르가 아니었다. 세드나는 갑자기 쑥 튀어나온 자라목에 화들짝 놀라 온몸의 털을 다 곤두세웠다.
- 라, 라지에르! 달이 말을 했어!
- 황금자라지라.
- 게다가 얘 말투도 이상해!
- 너무하지라. 아무리 자라라도 면전에서 욕하면 상처받지라.
자라는 풀죽은 얼굴로 웅얼거렸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 하고 있는 황금자라를 라지에르가 손으로 집어 들었다. 간단한 설명이 주르륵 나열되었다.
“이름은 아몬드. 종은 황금자라. 연못에서 천 년을 산 영물.”
- 왜 이름이 아몬드야?
- 내 주인이 붙여준 이름이지라. 어릴 땐 땅콩만했지라.
세드나의 질문에 황금자라가 자랑스럽게 대답해주었다.
지금은 사람 품에 안아도 꽉 찰 정도로 큰 크기였지만 새끼였을 적에는 작고 노란 것이 아몬드를 연상케 했다고 한다.
“근데 왜 나는 아몬드가 하는 말이 안 들리지?”
그때까지 웃으면서 지켜보던 율리우스가 문득 의문을 표했다.
그에게는 황금자라 아몬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해신의 여우님이 하는 말은 잘 들리는데.”
“세드나는 아주 특별한 경우지.”
“하긴, 해신의 전령사랬지. 신의 뜻을 전하려면 사람들과 말이 통해야 할 테고.”
꿈보다 해몽이었다.
라지에르는 거기에 이어 뻔뻔스레 대꾸했다.
“그리고 나도 해신의 성흔을 받았으니까.”
“허 참. 나만 평범한 인간이라서 자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가? 이거 은근히 서러운데.”
모인 사람들 중 황제가 가장 평범해지는 엉뚱한 자리였다.
“자, 그럼 가자.”
- 어딜?
“아몬드가 살던 연못.”
라지에르의 말에 율리우스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방문을 열자 황제의 기사들이 주르륵 대기하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 세드나가 황금자라를 안아든 라지에르의 곁에 따라붙으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 혹시 날 기다려준 거야?
“응. 네가 필요했거든. 세드나.”
자신이 필요하다는 말에 분홍빛 여우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황제의 장대한 행렬에 비해 라지에르는 분홍여우에 더해 테이와 휘온만을 데리고 이동했다. 사파이어 기사들도 따라붙으려 했으나 깔끔하게 제지당했다.
“앞으로 사흘. 린슈슈와 룬슈슈의 곁을 지키고 있어라.”
“어디, 가?”
“우리는 같이, 안 가?”
두 땅요정은 기사들 틈에 남은 채 불안한 눈으로 물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따뜻한 손길이 내려앉았다. 시선을 맞춰준 라지에르가 씩 웃었다.
“사흘만 기다려.”
3일 뒤는 바로 황제의 즉위식 전날이다. 라지에르는 땅요정과 기사들에게 애매한 시간약속을 남겨놓고 떠났다.
그의 이름 아래 귀속된 사파이어 기사들은 국왕의 명령조차 잊고 그의 뜻에 따라 요정들의 곁에 남았다.
연못에 도착한 라지에르는 일단 물가에 자라를 풀어주었다.
“이제 말해 봐. 황제에게 남기고 싶었던 유언은 뭐야?”
- …당장 죽는 건 아니지라.
아몬드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리곤 엉금엉금 기어 물속에 천천히 잠겼다.
- 따라오지라. 연못바닥에 봉인된 문이 있지라.
“뭐?”
- 내 주인이 봉해놓은 유산이지라. 잘 지키고 있다가 황실에 위기가 찾아오면 열어주라고 했지라.
황금자라의 주인이라면 천 년 전 카나스 제국을 통치했던 황제일 터였다.
연못 안에 뭐가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지하로 이어지는 문이 있을 줄은 몰랐던 라지에르가 턱을 짚었다.
‘땅요정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공간인가.’
그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자라의 말을 듣지 못한 율리우스가 물었다.
“아몬드가 뭐라고 하는가?”
나름 보는 이들이 많아 말투를 신경 쓴다고 바꾼 모양이지만 라지에르가 보기엔 소꿉놀이를 하는 것처럼 우스웠다.
라지에르는 비뚤어진 웃음기를 속으로 감추고 소꿉놀이에 어울려주었다.
“…아몬드가 말하길.”
황금자라가 짧은 목을 빼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점처럼 작은 눈을 대신하여 라지에르가 그 목소리를 옮겨주었다.
“천 년 전 제국황실의 선조께서 남긴 유산이 연못 밑에 있다고 합니다, 폐하.”
“황가의 유산이라.”
확실히 천 년 전에도 카나스 제국은 존재했다. 오히려 현재보다 훨씬 부강했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카나스는 황권다툼과 귀족파벌의 득세로 영토 안에서조차 피가 마를 날이 없다. 그러다 보니 영역을 넓히기는커녕 기울지나 않으면 다행인 혼란스러운 시국이었다.
‘그런 게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율리우스는 잠시 아몬드와 라지에르를 번갈아 훑어보았다.
황금자라는 확실히 영물로 알려지긴 했고, 황궁 내에서 먹이를 주며 키우고 있는 특별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 자라가 무언가를 지키는 수문장으로서 연못에 자리했다는 사실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처음 만난 제르에이라의 왕족, 처음 듣는 황가의 보물.
카나스의 황제가 그 말을 믿어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율리우스는 평범한 황제가 아니었다.
“연못 밑에 가라앉은 유산을 건져내려면 굉장한 공사작업이 필요하겠군.”
얼토당토 않는 말에도 진지하게 응대하는 율리우스를 보며 라지에르가 감탄했다.
‘이런 또라이 황제 놈. 의심하는 척이라도 좀 하지?’
라지에르는 속으로 욕한 것과 다르게 겉으로는 화사하게 웃어주었다.
“아뇨. 공사는 필요 없습니다.”
“음?”
“세드나.”
그의 부름을 듣고 세드나가 움직였다. 물을 다루는 천호에게 있어 연못물쯤이야 준비 운동 꺼리도 되지 않았다.
딸랑.
라지에르가 그녀의 목에 달려 있던 방울을 풀어주자 마기가 사라지며 분홍여우의 털이 순식간에 청은빛으로 되돌아왔다.
그걸 본 사람들 사이에서 오오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풍성한 꼬리털까지 청은빛으로 되돌린 세드나가 살며시 연못 물 위로 내려앉았다. 물이 아니라 빙판 위를 밟고 서 있는 듯 흔들림 없이 완벽한 자태였다.
“우리가 지나갈 수 있도록 물을 전부 치워줘.”
- 알았어!
세드나는 경쾌하게 답하곤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피어오른 푸른 안개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우우웅
가장 먼저 연못 수면이 가뭄 든 땅처럼 쩍하고 금이 갔다. 그 금을 따라 연못이 딱 반으로 갈라져 그 사이로 길을 만들어냈다.
고개를 내밀어 바싹 마른 연못 바닥을 내려다 본 율리우스가 휘파람을 불며 박수쳤다.
“대단하군!”
“오오, 과연 해신의 전령사다!”
“전령사가 저 정도라니!”
황제의 감탄사를 서두로 기사들과 하인들, 그리고 무슨 일인가 싶어 몰려든 몇몇 귀족들 사이에서 호응이 터져 나왔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치 황궁이 아니라 공연장이라 착각할 수도 있는 광경이었다.
괜히 우쭐해진 세드나가 환호성을 들으며 연못 바닥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물이 사라진 연못 바닥은 제법 깊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우를 따라 뛰어내리진 못했다.
황제는 사다리를 내려 연못 바닥으로 직접 걸음 하였다.
그들은 케이크 단면처럼 갈라진 채 꿀렁거리고 있는 연못물을 무시하고 황금자라가 안내한 자리까지 다가섰다.
“이건…….”
“황가의 문양입니다. 폐하.”
기사 하나가 굳은 얼굴로 보고했다.
연못 바닥에 카나스 황가의 문양이 떡하니 찍혀 있었다. 특별한 마법을 활용해 새긴 문양이라 오랜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는 않았으나 물이 찰랑거릴 때엔 가려져 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율리우스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문양을 관찰했다.
“거짓은 아닌 모양이군.”
황제는 라지에르의 말을 의심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차가운 황궁에서 힘없는 6황자로 자라온 그가 처음부터 온전히 믿는 존재란 없었다. 모든 감상을 드러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그래서 율리우스는 늘 웃었다. 잔혹하게 사람을 베는 순간조차.
“해서, 이 봉인을 열고 유산을 되찾기 위해선 어떻게 하면 좋겠나? 라지에르 왕자.”
날을 숨긴 율리우스의 녹안이 라지에르를 채근하듯 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