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장은서에게 초상화를 부탁한 도윤은 내친 김에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많은 지인들을 만났다.
그 중에서도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은 역시 오윤수였다.
사실 그가 일부러 뉴욕까지 날아온 것은 장은서에게 최 회장 부부의 사진을 전달하고 초상화를 부탁하는 한편, 개인 전시회를 준비 중인 오윤수를 만나려는 목적도 있었다.
가드너 미술관에서의 전시회가 끝난 뒤 오윤수와 장은서는 예전에 쓰던 건물에서 나왔다.
원래 작업실이 있던 건물 자체가 아직 정식 데뷔를 못한 신인 화가들을 위해 저렴하게 공간을 빌려주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유명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한데다 작품 판매 실적도 좋았던 두 사람이 계속 작업하는 것은 아무래도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오윤수는 뉴욕 시 외곽에 집 하나를 빌려서 새로 작업실을 만들었다.
그는 최근 들어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바깥에도 나가지 않은 채 그곳에서 먹고 자며 새 작품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도윤이 작업실로 찾아갔을 때 그는 커다란 대야에 하나 가득 먹물을 풀고 있던 중이었다.
“준비는 잘 되고 있니?”
활짝 열린 문 옆에서 일부러 크게 소리를 치른 도윤은 작업실 여기저기에 걸려 있거나 포개져 있는 캔버스와 광목천들을 보면서 씩 웃었다.
그러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던 오윤수가 여기저기 먹이 잔뜩 묻은 모습으로 그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셨어요? 준비랄 게 뭐 있나요? 늘 하던 대로 하는 거지요.”
심드렁한 말투 속에 은근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잘 되고 있구나.
“그래도 전시가 몇 달 안 남았잖아? 작품은 많이 완성했어?”
“몇 점만 더 완성하면 전시할 정도는 될 거 같아요. 언제 오셨어요?”
“어제 저녁에 왔다. 오늘 아침에 은서를 만나서 초상화를 하나 부탁했어. 모레까지는 아마 뉴욕에 머물 거다. 네 전시회와 관련해서 만날 사람들이 있거든.”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좋지.”
오윤수의 안내를 받아 거실로 이동한 도윤은 집안을 둘러보았다. 화가의 거처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삭막한 내부 장식.
그래도 가끔 청소는 하는지 생각보다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거실에도 그동안 완성한 작품 몇 개가 벽에 걸려 있었고, 벼룩시장에서 산 게 분명한 소품들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풍경에 그나마 약간의 악센트를 주었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돌아온 오윤수가 커피 두 잔을 내려 도윤의 앞에 앉았다.
다소 피곤해 보이지만 건강한 얼굴.
무엇보다 눈이 빛나고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전시회 준비는 잘 되고 있는 거야? 아직 시간 많이 남았다고 너무 여유부리면 안 돼.”
도윤의 말에 오윤수가 피식 웃었다.
“저야 늘 하던 대로 하는 거죠. 전시회 준비는 형이 알아서 해 주기로 했잖아요.”
최근 들어 오윤수는 도윤을 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도윤이 그렇게 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은서는 여전히 그를 박사님, 혹은 이사장님이라고 부르는데 반해 오윤수는 쉽게 호칭을 바꿨다.
사실 그는 도윤이 발굴한 첫 번째 화가였고 그래서 그런지 다른 장학생들에 비해서는 유난히 정이 가는 녀석이기도 했다.
“물론 전시회 준비는 내가 알아서 할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너도 너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겠다는 식으로 나오면 안 돼. 공간은 내가 만들겠지만 거길 채우는 건 너잖아.”
“에이, 전시회를 의식하고 작품을 만들면 안 되죠. 늘 하던 대로 하다가 작품 수가 어느 정도 된다 싶으면 그때 가서 전시회를 생각할게요. 지금은 그냥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재미있게 한다라…. 그럼 됐다. 도윤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슬럼프는 없고?”
“왜 없겠어요? 어떤 때는 한 달이 넘게 한 작품도 완성 못하기도 해요.”
“그럴 때는 억지로 뭔가를 그리려고 하지 마라. 슬럼프를 완전히 피하기는 어렵지만 그럴 때마다 가능하면 마음을 편안히 갖고 부드럽게 넘어가야 해.”
“사실 굳이 슬럼프라기보다는 변화의 시기에요. 갑자기 지금까지 그렸던 것과는 전혀 다른 뭔가 색다른 작품을 만들고 싶어질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면 억지로 붓을 들기보다는 주변을 산책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영감이 뚜렷하게 떠오르기를 기다려요. 그렇게 해서 내가 뭘 그리고 싶어 하는지가 분명해지면 그때 다시 작업을 시작하는 거죠.”
“좋은 태도다. 관성에 젖어서 계속 같은 그림만 그리면 그건 창작이 아니라 그냥 노동이지. 모든 창작이 노동의 일종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뼈 빠지게 일한다고 해서 저절로 예술이 되는 건 아니니까.”
오윤수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의성이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매너리즘은 가장 경계해야 할 장애물이었다.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는 자칫 화가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한때 돌을 그려서 유명해진 화가가 있었다. 처음에는 돌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질감과 투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색감이 마음에 들어 그걸 그렸다.
그런 그의 작품이 지닌 독창성인 예술성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자 그림이 잘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게 오히려 족쇄가 되었다.
다른 소재나 기법으로 새로운 그림을 그리려 할 때마다 화랑이나 미술 중개상들로부터 타박을 받은 것이다.
“기껏 ‘돌의 화가’라고 소개를 해 놨는데 갑자기 다른 걸 그리면 누가 좋아합니까? 화백님의 정체성이 흐트러지면 고객들이 혼란해 한다고요. 저희도 마케팅하기가 어렵고.”
결국 그 화가는 계속해서 돌을 그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붓을 꺾고 말았다.
즐거워서 그리던 그림이 쳐다만 봐도 지겨워졌기 때문이다.
창작이 지겨운 노동으로 바뀌는 이런 사례는 사실 생각보다 흔했다. 좋은 화가가 잘못된 화상을 만나 화단에서 사라지는 경우다.
도윤은 편안한 웃음을 짓고 있는 오윤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에 열정이 담겨 있으면서도 그게 자신을 갉아먹지 않는 환한 빛으로 타오르는 녀석. 그는 오윤수가 눈치 채지 못하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다. 너는 모네가 되고 르노와르가 돼라. 나는 뤼엘이 될 테니까.”
그의 말에 오윤수가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에이, 저는 그냥 오윤수가 될래요. 형도 그냥 형이 되세요. 그래야 평생 만나도 서로 지겹지 않은 사람이 될 거 아니에요. 형을 만난 게 아마 제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일 거예요.”
“그래, 그게 더 낫겠네. 알겠다. 작업하는데 불쑥 찾아온 것 같으니까 난 이만 가마. 며칠 동안 뉴욕을 비롯해서 몇 군데를 들렀다가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아마 널 보러 다시 여기 오기는 힘들 것 같으니까 내년이나 되어야 볼 수 있을 것 같다. 자주 연락하자.”
도윤은 오랜만에 만난 그와 채 삼십 분도 얘기를 나누지 않고 그의 집을 떠났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화가가 자기 세상을 만들고 있을 때는 옆에서 함부로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 편이 낫다.
이미 잘 하고 있는 녀석에게 쓸 데 없는 조언은 불필요한 참견이나 간섭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가 언급했던 뤼엘은 프랑스의 화상이었던 폴 뒤랑 뤼엘을 가리킨다.
그는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걸쳐 인상주의를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성장시킨 대부와 같은 사람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 서양 미술사를 개척하고 변화시킨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뤼엘은 당시 가난한 집시나 다름없는 처지에 빠져 있던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수집가들에게 소개하고 대여해주면서 끊임없이 그들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사비를 털어 그들의 그림을 구매하기도 했고, 처참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인상주의 전시회를 열어 모네 같은 화가들이 마침내 화단의 주목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뤼엘이 없었으면 인상주의는 물론이고 근대 미술의 발전 자체가 적어도 몇 십 년은 지체되었을 수도 있다. 그는 화가가 아니지만 화가보다 더 중요한 미술계 인사였다.’
어떤 미술 평론가는 뤼엘의 의미를 그렇게 평가하기도 했다. 도윤은 그런 뤼엘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그가 엄청난 돈을 들여 서윤문화재단을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 * *
뉴욕을 떠난 도윤은 워싱턴과 시카고, LA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미국에서 여러 도시들을 순회하듯 들른 이유는 당연히 내년에 있을 오윤수의 전시회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각각의 도시에서 그동안 여러 가지 일과 관련해서 인연을 맺었던 미술계 인사들을 두루 만나서 그들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러나 핵심은 역시 오윤수의 전시회였다.
이제 데뷔한 지 고작 만으로 일 년이 겨우 지난 화가가 미국의 주요 도시 네 곳에서 개인 전시회를 연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었다.
더구나 도윤은 미국에서의 순회 전시회가 모두 끝나면 그의 그림들을 가지고 다시 유럽으로 건너갈 생각이었다. 런던과 파리에서의 전시회 문제는 이미 협의를 진행 중이었고, 그 밖의 다른 도시도 물색 중이었다.
만약 오윤수가 작년에 가드너 미술관에서의 전시를 통해 독창적인 예술성을 인정받지 못했다면 이번 전시회는 얘기를 꺼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윤의 적극적인 노력이 일을 성사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도 분명했다.
그는 그동안의 여러 사건으로 인해 한국인으로서는 드물 정도로 각국의 미술계에 두루 인맥을 구축한 상태였다.
사실 도윤은 미국으로 가기 전에 전화와 이메일, 팩스 등을 통해 전시회 장소에 대한 협의를 대강 마친 상태였다.
이번 여행은 그걸 바탕으로 구체적인 논의를 거쳐 일정을 확정짓기 위한 것이었다.
도윤이 그 일을 모두 끝내고 유럽으로 가기 전에 일단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바오량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다시 북경으로 날아갔다.
“요즘 바쁘게 여행 중이라는 애기를 들었습니다. 경황이 없으실 텐데 어렵게 시간을 내어 장례식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례식장에서 그를 만난 왕이푸 회장은 그에게 멀리까지 조문을 와 준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도윤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당연히 와야지요. 함께 칭기즈칸 무덤을 탐사하러 가기까지 했던 분이 아닙니까. 그때만 해도 나이에 비해 정정하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입니다. 오래 사셨으니 아쉽기는 하지만 가실 때가 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맞겠지요. 하지만 너무 갑자기 돌아가신 건 저도 뜻밖이었습니다.”
죽은 이를 화제로 한 인사치레의 대화가 끝나갈 무렵, 왕이푸 회장이 느닷없이 예상치도 못했던 문제를 꺼냈다.
“최근 들어 몇 군데 투자를 해서 좋은 성과를 거두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근 세계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데바 인스트루먼트의 대주주이기도 하시다면서요?”
“그곳의 주식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말 그대로 지인의 소개를 받아서 여유 자금을 투자한 것에 불과합니다. 다행히 결과가 좋아서 안도하고 있지만 경영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고 있는 형편이지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이 박사가 투자에 관심이 있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습니다. 아리스 옥션의 대주주이기도 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쭤보는 건데 혹시 자금에 조금 더 여력이 있으십니까?”
장례식장에서 갑자기 웬 투자 얘기? 도윤이 영문을 알 수 없어 눈만 껌뻑거리자 왕이푸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돌아가신 우바오량 상무위원께서는 사실 문화 산업에 흥미가 많으셨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우리 아리스 옥션의 주식도 가지고 계시는데다가 상하이를 비롯한 몇 군데 대도시에 위치한 옥션들의 주주이기도 하지요. 물론 대부분이 차명이기는 한데, 이번에 너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 지분들의 처리가 조금 난감해진 상황입니다.”
“저보고 상무위원이 남긴 주식을 인수하라는 말씀입니까?”
“전부는 아닙니다. 저 역시 그 분의 주식 일부를 사들일 테니까요. 하지만 저 혼자 그것들을 모두 인수하기에는 조금 곤란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 박사께서 조금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잘 아시겠지만 중국의 미술 시장은 발전 가능성이 큽니다.”
도윤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왕이푸 회장은 중국에서 한 손가락에 안에 들 정도의 갑부다.
그런 그가 단지 돈이 부족해서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인수자를 분산시켜 정부의 눈이 자신에게 쏠리는 걸 피하자는 뜻일 텐데, 도윤 역시 쓸 데 없는 관심을 받는 건 사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저 역시 최근에는 자금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은데다 어차피 주식을 인수해 봤자 그 회사들의 경영에 신경을 쓰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좋은 제안을 해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
도윤이 정중히 제안을 거절하려는 순간 왕이푸가 슬며시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흠칫 놀라 손을 뿌리치려는 순간 왕이푸의 간곡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일전에 한국에서 홍도관을 발견해서 중국에 넘긴 일 때문에 당과 정부에서 이 박사를 보는 눈이 상당히 호의적입니다. 더구나 이 박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정가이면서 측천무후의 정릉 발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분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 박사가 그 주식들을 인수하면 정부도 크게 트집을 잡지 않을 겁니다.”
난감했다.
도윤은 고민에 잠겼다.
이렇게까지 간곡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왕이푸의 사정이 그다지 편치만은 않은 게 분명했다.
말로는 우바오량이 가지고 있던 주식의 양이 적은 편이라고 했지만 내막은 꼭 그렇지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생각이 들었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도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필요한 자금의 액수가 대충 어느 정도 됩니까?”
“정확한 액수를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상무위원께서 남기신 주식을 모두 인수하려면 상당히 많은 돈이 필요할 겁니다. 물론 이 박사께서 그걸 다 부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상해와 홍콩, 성도 등을 비롯한 몇 군데 옥션의 주식 일부만 인수해 주시면 됩니다.”
“홍콩이라고요? 설마 홍콩의 크리스티나 소더비에도 투자를 했습니까?”
“홍콩도 중국 땅이니까요. 그리고 중국 땅에 들어온 기업은 모두 투자 대상입니다.”
이것 봐라? 도윤은 하마터면 허탈하게 웃을 뻔 했다. 상무위원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공격적으로 여기저기에 손을 뻗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걸 한꺼번에 처리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일 게 뻔했다.
“말씀을 듣고 보니까 조금 관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제 자금 사정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닙니다. 홍콩 소더비만 해도 거기 주식 1퍼센트를 인수하려면….”
“홍공 소더비의 경우 12.3퍼센트입니다. 시세로는 육백만 달러가 넘지요.”
“그 정도면 거기 하나만 인수하는 것만으로도 제 계좌가 텅텅 빌 겁니다.”
“시세대로 팔겠다는 게 아닙니다. 절반 가격만 내시면 명의를 이전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장외 거래지요. 다른 회사들의 주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도윤의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이 이루어졌다. 그는 짐짓 헛기침을 한 뒤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정작 입으로는 슬쩍 발을 빼는 말을 내뱉었다.
“아무래 여기서는 자세한 얘기를 하기 어렵겠군요. 저는 오늘 저녁 비행기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투자와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메일로 보내주십시오. 그럼 신중하게 검토해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도윤은 왕이푸에게 끝까지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검토하겠다고 말한 것만으로도 반허락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왕이푸의 얼굴에 희색이 감돌았다.
뭔가 복잡한 정치적 거래가 포함된 인수 제안인 모양이군. 지위와 경력에 맞지 않게 다급한 표정으로 인수를 제안하는 왕이푸를 보면서 도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왕이푸가 보낸 메일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메일에 첨부된 파일을 확인한 도윤은 그것을 모두 프린트해서 노영태 변호사를 만났다.
그로부터 한 달 동안, 두 사람은 거의 사흘에 한 번 꼴로 만나 머리를 맞대고 투자 건에 대해 상의했다.
10월의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던 어느 날, 결심을 굳힌 도윤이 왕이푸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죄송하지만 제 자금 사정 때문에 많은 곳에 투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상해의 홍광(紅光) 옥션하고 홍콩 소더비의 지분만 제가 인수하는 것으로 하죠.”
전화를 받은 왕이푸는 그 밖의 몇 군데 회사를 더 추천하며 끈질기게 투자 액수와 범위를 늘려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도윤은 자신이 정한 선을 넘는 투자에 대해서는 고집스럽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결국 왕이푸가 아쉬움을 금치 못하며 도윤의 의사를 수용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우바오량 상무위원이 죽은 건 어떤 면에서는 내 책임도 있는데, 그가 남긴 열매를 이렇게 싸게 따먹자니 조금 미안하기는 하네. 하지만 주는 떡을 굳이 뿌리칠 필요는 없지.”
이번 투자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도윤은 비에코와 데바 인스트루먼트를 제외한 다른 회사의 주식들을 모두 매각했다.
그런 뒤에 몇 군데 조세회피처에 설립했던 투자회사들을 모두 없애버렸다. 이제 비밀리에 운용하는 자금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약간 아쉽기는 했지만 덕분에 한결 홀가분해지기는 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