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물웅덩이 옆에서 하루를 더 보내고 나자 이브라힘을 비롯한 세 사람의 상태가 전날보다 더 나아졌다.
비록 하루의 대부분을 멍한 상태에서 보내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고 주변을 돌아보거나 이것저것 말을 하는 시간이 늘어났던 것이다.
그들의 상태를 살피며 사흘을 더 보낸 도윤은 마침내 분지를 떠나기로 했다.
“일단 트럭을 숨겨놓은 곳까지 이동하자. 지금 출발해서 이르쿠츠크에 도착하려면 며칠 더 걸릴 테니까 그 사이에 조금이라도 상태가 더 나아지겠지.”
세 사람의 정신이 정상 상태에 가까워짐에 따라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시간을 보내는 걸 무료하게 여기는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걱정했던 것에 비해서는 매일매일 회복되는 속도가 빠르다는 게 도윤의 결심을 부추겼다.
아마 이르쿠츠크에 도착할 때쯤 되면 예전의 모습을 거의 회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실 도윤이 지금까지 그들의 회복을 기다렸던 것은 바이크 운전 때문이었다. 걸어서는 이틀이 넘게 걸릴 거리를 바이크를 타면 하루에 주파할 수 있다.
그런데 사흘이 지나자 세 VIP들 모두 혼자서 바이크를 운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계속 멍한 상태로 있었다면 도윤과 석훈도 바이크를 포기하고 그들을 보호하면서 도보로 산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칭기즈칸의 무덤에서 나온 지도 벌써 나흘째가 되었다.
그 사이에 도윤과 석훈은 멀리 떨어진 곳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공기 압축기와 연료통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장비를 모두 묻어버렸다.
나중에 혹시 다시 오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칭기즈칸의 무덤 위치가 공식적으로 알려져서 정부 주도의 조사대가 조직된 뒤가 될 것이다.
이른 아침, 도윤이 앞장서고 석훈이 후미에서 세 사람을 보호하고 감시하며 조심스럽게 이동한 끝에 해가 저물기 전에 간신히 트럭과 승합차를 놓아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행은 이르쿠츠크로 출발하기 전에 일단 그곳에서 한 번 더 텐트를 치고 야영했다.
도윤과 석훈이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이브라힘과 리히터 회장, 그리고 우바오량은 이제 서로 대화를 나누며 웃음을 터트리기까지 할 정도로 정상인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신에 이상이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저녁 식사를 위해 레토르트 식품을 데우던 석훈이 그들을 흘낏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양반들도 이제 정상인 다 됐네. 근데, 형. 아깝지 않아요?”
“아깝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칭기즈칸의 무덤 안에서 형이 만든 가짜 칼을 놓고 경매를 했다면서요? 그거 낙찰 금액이 십일억 달러까지 올라갔었잖아요. 근데 칼은 부러지고 저 사람들은 그걸 기억도 못하니 십일 억 달러가 그냥 날아간 거나 마찬가지 아니에요?”
도윤이 입맛을 다셨다. 아깝다.
한두 푼도 아니고 십일 억 달러나 되는 거액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어떻게 아깝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원래 그의 계획은 칭기즈칸의 무덤에서 나온 뒤 일종의 쇼를 하는 것이었다.
그걸 위해서 물웅덩이에 들어가기 전부터 옆구리에 은막대기를 붙여놓고 그 위에 잠수복을 입었다.
세 VIP 모두를 주인으로 택했던 십자가 목걸이의 능력을 옮겨놓은 은막대기였다.
낙찰자는 이브라힘 왕세제였다. 따라서 그가 십일억 달러를 이체시키면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능력을 전해줄 생각이었다.
한 손을 그의 머리에 얹고 다른 손으로는 가짜 칼을 잡은 채 정신을 집중시키면 아무도 모르게 은막대기에 담긴 능력을 이브라힘 왕세제에게 전하는 게 가능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칼의 능력이 옮겨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십일억 달러를 꿀꺽할 수 있었을 텐데…, 쩝.’
하지만 애써 계획했던 일은 칭기즈칸의 해골에서 흘러나온 이상한 아우라로 인해 모조리 수포로 돌아갔다.
일은 사람이 꾸미되 성사는 하늘에 달렸다더니 딱 그 꼴이 된 것이다.
이브라힘 왕세제를 비롯한 세 사람은 붉은 아우라에 연결되는 바람에 하마터면 무덤 안에서 모두 죽을 뻔 했다.
다행히 웅덩이를 빠져나온 뒤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경매는커녕 자신들이 칭기즈칸의 무덤 안에 들어갔었다는 사실조차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다른 건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는데도 유독 그 부분만 머릿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것처럼 굴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른 일상적인 기억들을 회복했다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
“일종의 정신적인 장애를 얻은 게 아닐까요?”
석훈의 말에 도윤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정신적 장애? 기억상실증 같은 거 말이냐? 하지만 다른 건 다 기억하잖아?”
“저도 잘 모르지만 사람들이 굉장히 강한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던데요? 심리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 끔찍한 기억에 일종의 장벽 같은 것을 설치한다던가? 아무튼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대요.”
“아직 성급하게 판단하기는 일러. 다른 기억들은 거의 회복이 됐잖아.”
“그렇긴 한데, 솔직히 저 사람들이 무덤 안에서 겪었던 일을 모두 잊어버린다고 해도 나쁠 건 없지 않아요? 십일 억 달러를 날린 것만 빼면 차라리 그게 더 나을 수도 있잖아요.”
석훈의 말에 도윤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쁠 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좋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저들이 도윤이 링커라는 사실까지 모두 잊어버렸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내가 보기에는 칭기즈칸의 무덤에 대한 기억만 사라진 건 아닌 것 같아. 나한테 괜히 친근하게 대하잖아? 저 사람들이 나하고 얽혔던 일들을 다 기억하고 있다면 그럴 리가 있겠어? 내 생각에는 칭기즈칸의 무덤에서 있었던 일만 잊어먹은 게 아니라 그냥 기억이 여기저기 도막도막 난 것 같아.”
“선택적 치매라는 얘기에요? 그럼 더 안 좋은데….”
“이 자식이, 어울리지 않게 전문 용어는? 나도 몰라. 이르쿠츠크까지 가려면 아직 이틀 정도 더 걸릴 테니까 그 사이에 계속 관찰해 보자.”
퉁명스럽게 말을 잘랐지만 사실 도윤도 은근히 불안하기는 했다.
칭기즈칸의 무덤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 건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최소한 자신들이 지금 왜 이곳에 와 있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 해야 정상이다.
다들 각 나라에서 거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쟁쟁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자신들이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무 이유도 없이 시베리아의 오지에 와 있다는 게 이상할 거 아닌가?
하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바에 따르면 세 VIP들은 그 점에 대해 궁금해 하기는커녕, 도윤과 석훈에게조차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모든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도윤으로서는 그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저러다 나중에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갑자기 정신이 확 나가면 어떡하죠?”
석훈이 걱정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윤이 눈을 흘기며 그의 머리를 쾅 쥐어박았다.
“말이 씨가 된다.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말고 스프나 저어.”
다음날, 트럭이 있던 곳을 출발한 일행은 그로부터 이틀 후 무사히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보름 정도를 예상한 일정이었는데 불과 열흘이 채 되지 않아 모든 일을 끝내고 돌아온 것이다.
그 이틀 사이에 세 VIP들 모두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상태를 회복했다. 그 덕분에 그들을 기다리던 수행원들도 그들에게서 아무런 이상도 느낄 수 없었다.
“이 박사. 자주 연락하겠습니다. 시간이 되면 다시 또 봅시다.”
“수고하셨소. 북경에 오면 꼭 연락하십시오. 식사나 같이 합시다.”
각자의 전용기를 타기 위해 출국장을 나서기 전에 세 사람 모두 도윤의 손을 꼭 잡으며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 기묘한 상황이 너무나 납득이 되지 않아 도윤은 저들이 아니라 자신이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이르쿠츠쿠에서 그들과 해어진 도윤과 석훈도 곧바로 서울로 돌아왔다. 도윤으로서는 계속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찜찜함은 해가 가기 전에 현실이 되었다.
그들에게 후유증이 전혀 없기를 바랐던 기대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 * *
후일담이 되기는 하겠지만 가장 먼저 비보가 날아든 곳은 중국이었다.
도윤이 한국으로 돌아온 지 한 달가량 되었을 때, 왕이푸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른 아침, 북경에는 아직 해도 뜨지 않았을 시각이었다.
“간밤에 우바오량 상무위원께서 돌아가셨소.”
간단히 샤워를 하고 최서라를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도윤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간밤에요? 아니 어떻게…. 계속 편찮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심장마비예요. 자다가 돌아가셨으니 고통은 없었을 거라 짐작하고 있어요. 시신의 자세나 얼굴 표정으로 볼 때 편안히 가신 것 같습니다.”
도윤은 서윤문화재단에 소식을 알리고는 곧바로 석훈과 함께 북경으로 날아갔다.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워낙 거물급 정치인의 죽음이라서 그런지 장례식장에는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어 줄을 서서 조의를 표했다. 도윤은 왕이푸 회장을 만나 다시 한 번 정확한 사인을 물었다.
“심장마비라고 하셨죠? 평소에 심장이 안 좋으셨습니까?”
“그 나이 때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상무위원께서도 늘 여러 가지 지병을 달고 사시기는 하셨어요. 하지만 심장에 특별히 문제가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왕이푸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사고사가 아니고 주무시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따로 부검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신을 처음 확인한 의사의 말에 의하면 원인불명이랍니다. 연로한 분들이 돌아가시면 대개 노환이나 심장마비로 사인을 기록하지요.”
“자연사라는 말씀입니까?”
“공식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좀 애매한 부분이 있어요. 최근 들어 계속 살이 빠지셨거든요. 그래도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만 해도 특별한 이상 징후는 발견되지는 않았습니다.”
계속 살이 빠졌다고?
나이가 들면 체중이 줄어드는 게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도윤은 그 사실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연말이 지나기 전까지 비슷한 얘기를 연속해서 두 번이나 더 듣게 될 줄은 몰랐다.
11월이 되자 서울 거리를 휩쓰는 바람에서 냉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현소 화랑과 청파 갤러리에서는 한 주 간격으로 전시회를 진행 중이었고, 그 때문에 도윤과 최서라 모두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브라힘 왕세제의 비서실장인 압둘이었다.
“왕세제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도윤의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들이 한꺼번에 스치고 지나갔다.
북경의 우바오량이 사망한 지 불과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돌아가시게 됐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도윤의 물음에 압둘은 얼른 대답하지 않고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한참 만에 긴 한숨을 내쉬더니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욕을 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저택에서 일하는 직원이 너무 오랫동안 욕실에 계신 게 이상해서 들어갔다가 돌아가신 것을 발견했어요. 욕조에 몸을 담근 채였지요.”
“목욕을 하다가 돌아가셨다고요? 아니 도대체 왜….”
“이르쿠츠크에 갔다가 돌아오신 뒤로 계속해서 살이 빠지셨습니다. 여러 차례 병원에 가서 검사도 해봤지만 특별히 이상한 부분이 발견되지 않았어요. 살이 계속 빠진다는 것만 제외하면 일상적인 활동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으셨고요.”
“그런데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겁니까? 혹시 심장마비 같은 것이었나요?”
압둘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내부적으로는 약물에 의한 쇼크사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기력이 자꾸 떨어지는 것 같다면서 이런저런 약물을 사용하셨거든요. 이건 이 박사에게만 개인적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얘기하지 마십시오.”
약물에 의한 쇼크사?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브라힘 왕세제가?
이번에는 도윤이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압둘이 다시금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왕세제께서 이 박사와 함께 이르쿠츠크에 가셨을 때 특별한 사고가 있었습니까? 뱀이나 곤충에게 물렸다거나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느냐는 뜻입니다.”
“왕세제께서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던가요?”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저로서는 그게 더 이상합니다.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겠다고 가셨던 것 아닌가요? 그런데 정작 돌아와서는 그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그곳에 갔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이 박사에게 이런 말씀도 드리는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렇구나.
역시 이브라힘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돌아가서도 기억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우바오량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왕이푸를 통해서도 같은 사실을 확인했었다. 그래도 다른 부분은 멀쩡한 줄 알았는데 우바오량에 이어 그마저도 계속 살이 빠졌다는 것으로 봐서는 그게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기는 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습니다. 지진 때문에 곳곳이 무너져 내려서 실질적으로 내부 깊숙한 곳에는 들어가지도 못했었거든요.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온 게 전부입니다. 물론 큰 충격을 받았다거나 뱀이나 곤충에 물린 적도 없고요.”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언제 한국에 가게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장례식장에 가지는 못하겠지만 멀리서나마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말투로 보아 압둘은 도윤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칭기즈칸의 무덤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다만 그는 그에 관해서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그냥 전화를 끊었다.
나중에 만나면 이렇게 쉽게 넘어가지는 않겠군.
그로부터 한 달 후, 이번에는 리히터 회장의 딸, 크리스틴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화기에 표시된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도윤은 불안감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 역시 리히터 회장이 죽었다는 비보를 전했다.
“아빠가 돌아가셨어요. 사정이 있어서 장례식에 초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소식이라도 전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 전화 드렸어요.”
12월 중순. 크리스마스가 멀지 않은 때였다. 도윤은 칭기즈칸의 무덤에 함께 갔던 사람들이 모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당시 붉은 아우라에 잠식되었던 사람들에게 모두 심각한 후유증이 남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하지만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교통사고였어요. 고속도로에서 차를 몰고 가다가 곡선주로에서 그대로 직진하셨어요. 길가에 설치된 펜스를 들이받고 차가 뒤집히는 바람에 현장에서 즉사하셨어요.”
“리히터 회장님이 직접 운전을 하셨다는 말입니까?”
“고급 스포츠카를 운전하는 게 아빠의 취미 가운데 하나였어요. 최근에는 계속 살이 빠지면서 기력이 떨어지시는 것 같아서 운전을 삼가시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
짐작했던 대로 또 살이 빠졌다는 얘기가 나왔다.
“살이 빠졌다면 무슨 병이 있으셨다는 뜻입니까?”
“분명히 몸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병원에서 검사를 하면 아무런 이상이 없는 걸로 나왔어요. 이 박사와 함께 칭기즈칸의 무덤에 갔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시는 걸로 보면 분명이 정상이 아니신 것 같은데 본인은 괜찮다고만 하셨어요. 흐흑.”
크리스틴은 말을 하다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왕이푸나 압둘과는 달리 딸이라서 그런지 감정을 제대로 수습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나중에 독일에 들르게 되면 묘지를 찾아뵙고 헌화라도 하겠습니다. 그때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조심스럽게 조의를 표한 뒤 전화를 끊은 도윤은 당장 집 안에 있는 체중계를 찾아냈다. 깊게 심호흡을 한 뒤 올라가자 표시된 몸무게는 85Kg. 지난 몇 년 동안 유지해왔던 몸무게 그대로였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다음 화에서 계속)